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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by Diligejy 2017. 9. 20.

p.12

조선이 근대화의 문턱에서 일본에게 뒤처졌다는 인식은 착각이다. 두 나라 간 국력 차이의 연원은 그보다 훨씬 길고 깊다. 개중에는 18세기 이후에 이미 일본의 국력이 조선의 국력을 추월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정작 국력을 추월당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물으면 선뜻 답하지 못한다. 국력이 군사력, 경제력의 개념에 불과하다면 일본은 16세기에 이미 조선을 넘어섰다. 그러나 근대화의 원동력으로서의 국력은 군사력, 경제력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개념이다.


p.14~15

일본의 역사 중에서도 '에도시대'라 불리는 일본의 근세는 한국인들에게 트리플 마이너리그의 역사이다. 17세기 초반 에도 막부 성립에서 19세기 중반 메이지유신 이전까지의 에도시대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식은 '진공'에 가깝다. 근세는 일본 역사가들이 고안한 시대 구분이다. 서구의 '중세-근대'의 시대구분 사이에 일본인들이 '근세 early modern age'라는 '중개적intermediate' 시공을 설정했다. 한국에서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그 시대 구분을 무비판적으로 한반도에 적용하기도 한다.


일본인들은 왜 근세라는 시공을 설정했을까?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에도시대의 일본은 임진왜란 때 납치한 도공이나 조선통신사에게 한 수 배우며 선진 문물을 습득한 문명의 변방국이다. 고대 중화문명 확산 경로의 선후관계에서 비롯된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은 에도시대로까지 자연스럽게 연장되고 고정관념화되어 있다. 단언컨대, 일본의 근세 260여 년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에도시대는 서구의 르네상스, 대항해시대에 버금가는 전환의 시대이고 축적의 시대였다.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화 경로의 운명을 가를 거의 모든 선행조건들이 그 시기에 결정되었다. 많은 일본 연구자들이 서구나 중국 문명과 구별되는 독자적 문명으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에도시대의 일본은 문명의 흡수, 재생산이 역동적으로 진행된 시기였다.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여 열강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원동력이 궁금한가? 한때 동아시아 전체를 넘보던 국력과 세계를 제패했던 경제력의 원천이 궁금한가? 20명이 넘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비결이 궁금한가? 그렇다면 메이지유신이 아니라 에도시대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일본 근세를 무턱대고 들여다보면 '익사이팅'하지 않다. 서구의 종교혁명, 시민혁명, 산업혁명 등의 드라마틱한 변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일본 근세에서 뭘 눈 여겨 봐야 할지조차 감이 오지 않는다. 반일 감정의 발로에서 조선과 뭐 그리 달랐겠냐며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심리마저 있다. 그러나 근대성을 '권위와 시장간의 긴장', '경제의 분화와 전문화', '인적 물적 이동성의 확대'등이 두드러지는 패러다임으로 정의한다면, 일본의 근세는 엄청나게 '드라마틱'하고 '익사이팅'한 시대이다.


p.16~17

일본의 근세는 조선 근세의 거울이자 동전의 양면이다. 일본의 근세를 보면 비로소 조선의 근세가 뚜렷하게 보인다. 그것이 주변국 역사를 공부하는 묘미이다. 한국의 과거, 현재, 미래에 적용할 수 있는 통찰과 영감을 원하거든 [삼국지]나 [손자병법]이 아니라 에도시대 역사서를 들여다볼고 말하고 싶다. 


p.44~45

이에야스와 후대 쇼군들이 이토록 엄청난 토목 건축 사업을 감당할 수 있었던 데에는 '천하보청'의 존재가 있었다. 천하보청은 쇼군이 다이묘들에게 부과하는 공공사업 역무를 말한다. 뒷장에서 상술하겠지만, 일본의 '봉건제'는 유럽의 '봉건제feudal system'와 유사한 면이 있지만 몇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우선 센고쿠시대 이후 일본의 봉건제는 쇼군과 다이묘가 주종관계에 있지 않았다. 유럽의 '왕lord-제후vassal'관계와 달리 일본의 쇼군은 가장 강력한 무가일 뿐이다. 천황의 위임을 정통성의 근거로 하지만, 그 위임은 힘에 기반한 것이었고, 결국 통치의 근원이 되는 것은 무력이고 실력이었다. 제한적 권위의 통치자로서 쇼군은 다이묘들에게 세금을 징수할 수 없었다. 다이묘들의 충성 서약은 전시에 쇼군을 군사적으로 지원할 군역만을 의무화하였다. 일반적으로 중앙의 권력이 강성해지면 지방의 사적 무력 보유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통치체제가 정비되지만, 일본은 그럴 수가 없었다. 군역이 계약의 기초이므로 다이묘의 무력 보유를 금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극상이 난무하는 센고쿠시대를 거치면서 충성의 맹서는 약속의 무게를 잃은 지 오래이다. 쇼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군역의 의무가 쇼군의 안전을 위협할 수도 있는 패러독스의 상황에서 쇼군은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해 군역을 다른 형태로 부담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쇼군이 군역의 연장선상에서 성곽 축성, 제방 도로 건설 등 전쟁 기간시설 관련 공사에 다이묘가 인력과 자재 등을 제공하도록 의무를 부과한 것이 천하보청이다.


p.47

천하보청의 묘미는 국가에서 거두는 국부가 고스란히 인프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쇼군이 중앙의 군주로서 징세, 즉 화폐나 현물의 형태로 생산량의 일정 부분을 거두어 갔다면 그 과정에서 많은 비효율과 왜곡된 자본 축적 잉여가 발생하였을 것이다. 일본은 천하보청에 따라 세금 지웃가 아니라 '결과물'의 형태로 의무를 부과했기 때문에 관리비용 등의 매몰비용이나 착복으로 인한 증발 없이 모든 투입이 실물 인프라로 이어졌다. 이러한 인프라는 당므 장에서 설명하는 참근교대제의 시행과 맞물려 엄청난 경제 효과를 유발한다. 현대 경제학으로 말하면 승수효과가 매우 높은 재정정책이 절묘한 타이밍에 시행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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