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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군주론 - 박상훈 역

by Diligejy 2016. 12. 11.

p.45~46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들이 지향했던 시민적 휴머니즘의 전통에서 비르투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덕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현명함과 사려 깊음의 미덕을 중심으로 도덕적 선을 강조하고, 그것은 그 자체로 보상받는다고 가정한다. 그들과 달리 마키아벨리는 그리스적인 덕이나 기독교적인 덕보다 로마적인 덕을 부각시킴으로써, 도덕적인 덕과 자연적인 덕을 날카롭게 구분하려 했다. 정치적 가치는 기독교적 윤리와 신학 내지 그와 병행하는 형이상학과 상이할 뿐 아니라,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점 때문에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텍스트들에서 자연적 정의라든가 자연법 같은 말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역사적 사실을 넘어서는 어떤 기준들 내지 추상적 보편성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따라서 역사는 인간과 정치를 현실주의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다. 역사는 상상이 아니라 경험적 지식의 풍부한 자원을 제공하는 보고라 할 수 있다. 인간들이 만들어 낸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일정한 지속성과 반복적인 패턴을 발견하고, 당대의 현실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실천론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p.69~70

1950년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의 고대사 교수 아놀드 존스Arnold H. M Jones는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수많은 문헌들이 생산된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 정치 이론에 대한 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라고 말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투키디데스 크세노폰 이소크라테스 등 수많은 철학자와 역사가들은 (헤로도토스를 예외로 한다면) 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왜일까? 이 질문은 그리스 민주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더불어 대표적인 철학자들을 재해석하는 고전 연구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 민주주의는 이를 옹호하는 자신의 이론가를 갖지 않았다. 반면 로마공화정은 폴리비오스 키케로 세네카 리비우스 살루스트 타키투스는 물론, 그 뒤를 잇는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특히 피렌체의 라티니 부르니 마키아벨리 귀치아르디니 지아노티 등의 이론가를 가졌다. 이 대표적인 인문학자와 철학자들은 한결같이 공화정을 최고 형태의 정치체제라고 옹호 찬양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공화주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p.96

마키아벨리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 저작을 "군주국에 관하여"De principatibus : On principalities라고 불렀다. 이 저작이 처음 출판된 것은 그가 사망한 1527년으로부터 5년이 지난 1532년이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군주론]Il Principe; The Prince이라는 제목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출간된 책은 교황으로부터 출간 허가를 얻기 위해 내용이 많이 수정되었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 뒤 원본을 회복시키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마키아벨리가 직접 쓴 원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에 다른 사람이 옮겨 쓴 필사본 가운데 19개 정도가 원본에 가깝다는 판정을 받았고, 이를 기초로 여러 판본의 책이 출간되었다.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이탈리아어 판본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1899년 리지오가 출간하고 1924년 차보드에 의해 개정된 리지오-차보드Lisio-Chabod 판본으로, 초기 영어 번역판의 대부분은 이 판본을 사용해 왔다. 둘째는 1929년에 완성된 마초니-카젤라Mazzoni-Casella 판본으로, 영어권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채택되어 왔다. 셋째는 가장 최근인 1994년에 나온 잉글레제Inglese 판본으로, 1999년 리날도 리날디Rinaldo Rinaldi에 의해 이 판본의 수정된 텍스트가 나왔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듯, 이 세 이탈리아어 판본은 모두 완성도가 높고 최근에 나온 판본이라고 해서 더 우월한 것은 아니며, 특히나 이탈리아 밖에서 번역을 할 경우 그 차이는 미미하다(Connel 2005, xiii-xiv). 


p.113

[군주론] 본문은 주제를 기준으로 볼 때 크게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1장에서 11장까지는, 군주국의 유형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이를 어떻게 장악하고 통치해야 하는가와 관련된 문제를 다룬다. 12장에서 14장까지는 군대를 조직하는 문제를 다루는데,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자국의 민중을 조직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15장에서부터 23장까지는 정치에서 윤리의 문제가 갖는 매우 특별한 성격을 다루는데, 인간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이해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24장에서 26장은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이탈리아가 처한 안팎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해 정치 지도자가 감당해야 할 과업을 다소 웅변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1장에서 11장까지의 주제가 전체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주제가 몇 장에서 다뤄지는지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마키아벨리는 당시 인문주의자들의 관행에 따라 국가를 1. 공화국과 2. 군주국으로 나누고, [군주론]에서는 후자에 대해서만 다룰 것이며 전자의 공화국에 대해서는 별도의 책에서 다루겠다고 말한다. 군주국은 1) 세습 군주국(2장)과 2) 신생 군주국으로 나뉜다. 신생 군주국은 ① 새로 만들어진 신생 군주국과 ② 혼합 군주국(3장)으로 나뉜다. 혼합 군주국은 ⓐ 군주 통치에 익숙했던 곳을 병합한 경우(4장)와 ⓑ 공화국하에 자유롭게 살았던 곳을 병합한 경우(5장), 그리고 ⓒ 자신의 군대와 비르투로 획득한 경우(6장)와 ⓓ 타인의 군대와 운명의 힘으로 획득한 경우(7장)로 나뉜다. 그 밖에도 군주국 관련 주제 몇 가지를 더 살펴보는데, 첫째는 사악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국가를 획득한 경우(8장), 둘째는 시민들의 지지로 국가를 획득한 경우(9장), 셋째는 야전에서 승리하기 어려워 성벽을 쌓아 방어해야 하는 경우(10장), 그리고 넷째는 교회 군주국(11장)를 다룬다.


p.136~137

군주론에서 '두려움'은 매우 중요한 권력 효과를 갖는 개념이다. 이와 관련해 두 표현이 사용되는데, 하나는 temere(와 그 파생어로서 temerlo, temuto)이고 다른 하나는 paura(와 그 파생어로서 paure, paurosi, pauroso)이다. 기존 영어 및 한글 번역에서는 어느 경우든 모두 'fear'(두려움)로 옮겼다. 문제는 그럴 경우 [군주론]의 내용 안에서 의미의 충돌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17장에서는 "인간이란 두려움을 갖게 하는 사람보다 사랑받고자 하는 사람을 해치는 일에 덜 주저한다."라고 말한다. 19장에는 "모든 사람이 그를 두려워하고 존경했으며 자신의 군대로부터 미움을 사지 않았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런 의미로 사용된 표현은 모두 temere(temerlo, temuto)이다. temere에는 신이나 법에 대해서처럼 '누구 혹은 무엇인가를 경외하면서 두려워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paura는 그런 의미로 사용할 수 없다. 그보다는 '회피하고 싶을 만큼 겁을 주거나 무섭게 하는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paura와 그 파생어를 '두려움'으로 옮긴다면 [군주론]안에서 의미가 충돌하는 문장이 여럿 있는바,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인간이란 자신이 두려워하거나 미워하는 자에게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7장). "군주는 누군가를 신임할 때나 조치를 취할 때는 진지한 태도를 보여야지 두려움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17장). 그러나 앞서 말한대로 이 두 문장에서 원어는 temere가 아니라 paura이고, 이 사실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마키아벨리는 두려움을 갖게 하라고도 하고 두려움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고도 말한,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따라서 이 번역본에서는 temere를 '두려움'으로 옮기고 paura를 '무서움'으로 옮김으로써 차이를 보여주고자 하는데, 그렇다면 위 두 문장은 다음과 같이 달라진다. "인간이란 자신이 무서워하거나 미워하는 자에게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7장). "군주는 누군가를 신임할 때나 조치를 취할 때 진지한 태도를 보여야 하지 무서움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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