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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

소명으로서의 정치

by Diligejy 2023. 3. 3.

 

p.10

막스 베버가 강의와 책을 통해 탐색하려던 것은, "누군가 정치를 평생의 직업으로 삼고자 한다면, 그 선택이 그 자신에게 갖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에 있었다. 이를 위해 베버는 한편으로 도덕적인 판단을 전제하지 않고 정치라는 세계가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살펴보려 했고, 달느 한편 인간의 정치가 갖는 '무도덕적 실재' amoral actuality로부터 어떤 '윤리적 책임'ethical responsibility을 도출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자 했다. 이런 논지에 따르면 이 책의 주제는 직업과 소명 가운데 어느 하나가 아니라 "직업 정치가가 된다는 것이 갖는 실재적 의미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책임감과 소명의식에 대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p.22

근대국가의 발전은 어디서나 군주가 그와 공생해 왔던 (독립적이며 '사적인' 행정 권력을 소유한) 신분제 ㅈㅂ단의 권한을 박탈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때까지 이 계층은 행정 수단, 전쟁 수단, 재정 수단 및 기타 정치적으로 이용 가능한 모든 종류의 재화를 직접 소유하고 있었는데, 크게 볼 때 이들로부터 행정 권력을 빼앗아 오는 과정은 자본주의 기업의 발전 과정과 아주 유사했다. 자본주의 기업의 발전 역시 독립적 생산자들로부터 생산수단을 점차 박탈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p.28~29

직업으로서의 정치에 '의존해' 사는 사람은 정치를 지속적 소득원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이다. 이에 반해 정치를 '위해' 사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사유재산제도가 지배하는 곳 어디에서든, 누군가 정치를 '위해' 살 수 있으려면, 일견 사소해 보이는 경제적 조건을 갖춰야 한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그런 사람은 정치가 그에게 가져다줄 수 있을 소득에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지극히 단순화해 말한다면, 그는 부유하거나 아니면 충분한 수입을 보장하는 개인적 생활 여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적어도 일반적 조건에서는 그렇다.

 

p.31

재산이 없는 정치가에 대한 앞의 언급이 단지 의미하는 바는, 만약 우리가 정치 지망생이나 지도층 혹은 그의 추종자들을 비금권적인 방식으로 충원하고자 한다면 당연한 전제 조건은 이 지망생들이 정치 활동을 통해 정기적으로 호가실한 수입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는 '명예직으로' 수행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정치는 흔히 말하듯 '남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즉 자산가나 특히 금리생활자에 의해 수행된다. 그러나 재산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정치적 지도층의 길을 열어 주고자 한다면 이들은 보수를 받아야 한다.

 

p.40

근대적 정당 체제는 권력을 얻기 위한 투쟁 내지 권력을 다루기 위한 방법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에 따라 정치라는 일은 이제 [권력을 다루는 방법을 익히는] 훈련을 필요로 하는 '업무'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공적 기능이 두 개의 뚜렷한 범주로 나뉘었다. 비록 두 범주 간의 차이가 그렇게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그 하나는 전문 관료이고, 다른 하나는 '정무직 관료'이다.

 

p.48~49

프랑스 대혁명 이래 근대적 법률가와 민주주의는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우리가 말하는 이 법률가 집단 역시 중세 이후 서양에서만 존재했다. 그들은 엄격한 절차와 형식을 중시한 게르만법하에서 변호사 내지 '법률 대리인'들에 의해 소송절차 가 합리화되면서 하나의 독립 계급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정당이 출현한 이래 서양 정치에서 변호사가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정당정치는 극히 단순화해 말하자면 이해 당사자에 의해 정치가 운영된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에 대해서는 곧 살펴볼 것이다. 이해 당사자인 고객에게 유리하도록 소송을 이끌어 가는 것, 이것이 곧 숙련된 변호사의 직업적 능력이다. 이 점에서 변호사는 어떤 '관료'보다도 우원한데, 이는 적군의 프로파간다가 발휘했던 우월성을 경험하면서 알게 된 교훈이었다.

 

p.50~51

정치 지도자의 행동은 관료와는 전혀 다른, 아니 그와는 정반대되는 성격의 책임 원칙을 따른다. 관료의 명예는, 그가 보기엔 잘못된 명령을 그의 이의 제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급자가 고수할 경우, 그 명령자의 책임을 떠맡아 이 명령이 마치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듯이 성심을 다해 정확히 수행할 능력에 기초하고 있다. 관료가 이런 규율을 따르지 않거나 자기 절제를 하지 못한다면 전체 국가기구는 붕괴하고 말 것이다.

 

이에 반해 정치 지도자, 즉 지도적 역할을 하는 정치가의 명예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전저거으로 스스로 책임지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이 자기 책임을 거부할 수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할 수도 없으며 전가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타고난 관료인 사람,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의 관료적 품성을 타고난 사람이야말로 나쁜 정치가일 수밖에 없으며, (책임 개념이 가진 정치적 의미를 기준으로 볼 때는) 무책임한 사람이고 그런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저열한 정치가들이다.

 

p.76

현재의 상황을 우리는 '대중적 정서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에 기초한 독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영국 의회의 매우 잘 발달된 위원회 체제이다. 그것은 지도부에 가담할 의사가 있는 모든 정치가를 위원회 활동에 합류하도록 강제한다. 위원회 활동을 보고하고 공개적으로 논쟁하는 과정을 통해 모든 중요 각료들은 지난 수십 년간 매우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실무 훈련을 거쳤다. 이는 위원회가 실제로 유능한 지도자들을 선발하고 순전히 선동가이기만 한 사람을 배제하는 그런 교육기관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p.91

직업 정치가가 마주해야 할 질문은 자신이 어떤 자질을 갖춰야 이 권력을 제대로 다루고, 그래서 자신에게 부과된 책임성을 제대로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그 권력이 제아무리 좁고 특수한 업무 분야에 한정된 권력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 질문은 우리를 이제 윤리적 문제의 영역으로 데려간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야말로 스스로 물어야 할 윤리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직업 정치가는 어떤 종류의 인물이라야 역사의 수레바퀴를 손에 쥘 권리를 갖게 될까?

 

p.92-94

정치가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 세 가지의 자질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대의에 대한 헌신을 뜻하는] 열정, [선의를 내세워 변명하지 않고 결과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의] 책임감, 그리고 [사태를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능력을 뜻하는] 균형적 현실감 감각이 그것이다.

 

여기서 열정이란 객관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대의' 및 이 대의를 주관하는 신 또는 [인간과 신 사이에 있는 수호신으로서] 데몬에 대한 열정적 헌신을 가리킨다. 고인이 된 나의 친구 게오르그 지멜이 '불모의 흥분 상태'라고 부르곤 했던, 그런 내적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이 불모의 흥분 상태는 특정 유형의 지식인들(러시아 지식인들이 특히 그렇다. 물론 그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이자, 오늘날 '혁명'이라는 신성화된 이름에 취해 있는 독일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지향하는 바에 대한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흥분하는 이런 마음 상태는 '지적인 척하려는 낭만적 태도'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열정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는 - 그것이 제아무리 순수한 것이라 하더라도 - 정치가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대의'에 대한 헌신과 함께, 대의에 대한 책임성이 행동을 이끄는 결정적인 길잡이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균형적 현실 감각이다. 저어치가가 가져야 할 매우 중요한 심리적 자질로서 균형적 현실 감각이란 내적 집중력과 평정 속에서 사물을 받아들이는 능력이자, 달리 말하면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두는 능력을 말한다.

 

정치가에게 있어서 '거리감의 상실'은 곧 죽음과 입맞춤하는 일이 될 것이다. 미래의 지식인들이 이런 거리감을 잘 연마하지 못한 채 정치를 하게 되면 결국 정치적 무능력자로 비난받는 일에 직면할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이런 것이다. 뜨거운 열정과 냉철한 현실 감각이 한 사람의 영혼 속에서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정치는 머리로 하는 것이지, 다른 신체 기관이나 영혼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가 경박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진정한 인간 행위가 되려면, 정치에 대한 헌신은 열정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고 또 유지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정적 정치가를 그저 '불모의 흥분 상태'에 있는 정치적 아마추어들과 구분하게 해주는 것은, 영혼에 대한 자기 통제력이 있느냐에 있다. 그리고 이는 오로지 거리감에 스스로 익숙해져야만 성취될 수 있다.

 

p.94-95

권력을 향한 야심은 정치가가 일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이다. 흔히 '권력 본능'이라고 불리는 것이 정치가에게는 정상적인 자질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런 권력 추구가, 전적으로 '대의'에 대한 헌신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결여한 채 순전히 개인적인 자기도취를 목표로 하는 순간, 그의 직업이 갖는 신성한 정신에 대한 죄악이 된다. 왜냐하면 정치 영역에서는 궁극적으로는 두 종류의 치명적 죄악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객관성의 결여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흔히 이것과 동일시되는) 책임성의 결여가 그것이다.

 

p.103~104

윤리적 명령은 그런 문제에 전혀 개의치 않는데, 바로 그것이 윤리적 명령이 가진 핵심이기도 하다. 한쪽 뺨을 치거든 "다른 뺨도 내주어라!" 그것도 무조건, 무슨 권리로 당신을 때리는지는 묻지도 말고 그러라는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성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모욕을 감수하라는 윤리이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인간은 모든 점에서 성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아니면 적어도 성자가 되고자 소망해야 한다는 것, 예수나 그의 제자, 성 프란체스코 또는 그런 사람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이와 같은 윤리가 의미를 갖게 되고 존엄성의 표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는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영원한 것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현실도피적) 무우주론적 사랑의 윤리는 "악에 대해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정치가는 정반대의 격언, 즉 "너는 악에 대해 폭력으로 저항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악의 만연에 대한 책임은 너에게 있다."라는 명제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윤리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자는, 파업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파업 역시 강제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어용 노조에 가입하는 것이 마땅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혁명'을 운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어떤 복음서도 내전을 정당화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따라 행동하는 평화주의자는 이 전쟁 그리고 나아가 모든 전쟁을 소멸시키기 위한 윤리적 의무를 실천하고자, 무기를 드는 것을 거부하거나 그것을 내버릴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우리 독일인들에게 그렇게 권고했다.

 

p.105~106

윤리적 지향성을 갖는 모든 행위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고 화해하기 어려운 대립적인 두 원칙을 따른다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는 '신념 윤리를 따르는'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 윤리를 따르는' 원칙이다.

 

신념 윤리는 무책임과, 책임 윤리는 무신념과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당연히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념 윤리의 원칙에 따라서 행동하는가 - 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기독교도는 올바른 행동을 할 뿐, 결과는 신에게 맡긴다'는 식 - 아니면 책임 윤리의 원칙에 따라 - 우리는 우리 행동의 (예견 가능한) 결과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식으로- 행동하는가 사이에는 심연과 같은 깊은 차이가 있다. 

 

p.107

세상의 그 어떤 윤리도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은,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많은 경우 우리는 도덕적으로 의심스럽거나 위험한 수단을 택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작용이 수반될 가능성 또는 개연성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윤리적으로 선한 목적을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위험한 수단과 부정적 결과를 '정당화'해 줄 수 있는 상황은 언제이며, 또 어느 정도 정당화해 줄 수 있는지를 분별해주는 그 어떤 윤리도 세상에는 없다. 

 

p.111

초기 기독교 역시, 세상은 데몬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정치에 관여하려는 사람, 즉 권력과 폭력/강권력이라는 수단에 관여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악마적 힘과 거래를 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의 행위와 관련해 보면 선한 것이 선한 것을 낳고, 악한 것이 악한 것을 낳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차라리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실로 정치적 유아에 불과하다. 

 

p.117~118

어떤 종류의 것이든 정치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 특히 정치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정치가 가진 윤리적 역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이 역설들의 중압에 압도되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치가는 모든 폭력/강권력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p.118

자신의 영혼 또는 타인의 영혼을 구제하고자 하는 이는, 이를 정치라는 방법으로 달성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정치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과업을 갖고 있는데, 이는 폭력/강권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이기 때문이다. 정치의 수호신(혹은 데몬)은 사랑의 신(무우주론)뿐만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구현된 기독교의 신(우주론)과도 내적으로 긴장 관계에 있는데, 이들 사이의 긴장은 언제든 해결될 수 없는 갈등으로 표출될 수 있다. 

 

p.120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단련된 실력, 그런 삶의 현실을 견뎌낼 수 있는 단련된 실력, 그것을 내적으로 감당해 낼 수 있는 단련된 실력이다.

 

p.123~124

정치란 열정과 균형적 현실 감각,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구멍 뚫는 작업이다. 만약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을 이루고자 몇 번이고 되풀이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으리라는 말은 전적으로 옳다. 모든 역사적 경험에 의해 증명된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리더여야 한다.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영웅이어야 한다. 리더나 영웅은 아닐지 모르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단단한 의지는 간직해야 한다. 모든 희망이 무너져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오늘날 아직 남아 있는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해 내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확신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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