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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와 인간 탐구 - 전두환의 마지막 33년

by Diligejy 2023. 9. 13.

이 책은 슬프다. 하지만 슬픔에 과도하게 휩싸이지 않았다.

눈물이 맺혀있는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듯, 과도하게 슬퍼하면 현실을 직시할 수 없고 그러면 정확히 알겠다는 목표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79년 12월 12일 긴박했던 전투현장으로 조금씩 들어간다. 

혼란의 시기였다. 모든 걸 통제하던 독재자의 죽음. 권력의 공백을 엿본 아귀들의 다툼. 

하지만 승리는 전두환에게 돌아갔다. 

 

교과서에서도 이 정도 사실은 배운다. 그렇지만 왜 전두환이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깊이있게 다루진 않고, 못하기도 한다. 왜 전두환이었을까? 

 

이 책은 이에 대한 탐구서다. 역사책처럼 딱딱한 나열이 이어질 때도 있고, 사회과학서처럼 구조적인 세력 분석을 할 때도 있으며, 문학책처럼 사람들의 마음 속을 묘사하거나 추측할 때도 있는 책이라 이 책은 하나의 범주에 국한할 수 없을 듯 하다. 

 

그렇기에 좋은 책이다. 하나의 틀이 아니라 여러 틀을 통해 역사와 인간을 관찰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이 학술서는 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밑줄긋기

p.10

잘못을 저지른 이가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일 경우, 제 잘못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과제가 된다. 그의 인격과 삶이 이미 그 자신의 것만이 아니기에, 무엇이 자신의 과오이고, 무엇이 시대 문화적 상황 때문이었는지 따지는 작업은 복잡하고 난해하다. 결국 그가 지도자 자리에서 내려온 뒤에야 재임 동안 했던 일이 무엇인지 감을 잡게 될 텐데, 권좌에서 내려와 있는 상황 또한 집권기에 행했던 일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역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p.23-25

임명장을 받은 탄탄한 체구의 사내에게 될 것 같지 않은 일을 되게 만든 파격의 이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1967년 수도경비사령부 대대장이던 시절, 전두환은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향해 중화기인 박격포 설치를 건의해 성사시켰다.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한다는 명분이긴 했지만, 동시에 대통령을 향해 중화기를 발사할 위험도 있는 일이었다. 현역 군인 누구도 생각하거나 건의할 수 없는 유의 과감한 발상이었다. 전두환은 그런 일을 최초로 건의해 성사시킴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대통령에게 신임받고 있는지를 과시했다.

 

그는 1970년대에 4년제 정규 육사 출신 중 처음으로 연대장이 되었고, 1977년에는 4년제 정규 육사 출신 중 처음으로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의 군 경력 자체가 파격의 연속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파격은 임명장을 받은 바로 이날, 1979년 3월 5일, 49세의 소장 신분으로 보안사령관에 취임한 일이었다. 전두환은 평범한 이라면 한 가지도 제대로 성취하기 힘든 일을 연달아 이루어냈고, 그 경력을 훈장처럼 달고 있었던 것이다.

 

따져보면, 그 훈장들은 대부분 임명장과 모종의 기운을 넘겨주고 있는 왜소한 체구의 사내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탄탄한 체구의 사내가 남들보다 더 과감하고, 겁 없고, 용맹한 기질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왜소한 체구의 사내가 그를 용인해 주고, 평가해 주고, 파격적인 보상을 내려주지 않았다면 완성할 수 없는 이력이었다. 수여자가 파격을 허용했기에 가능한 시나리오였다는 말이다.

 

임명장을 건네주는 박정희야말로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사나이' 계보의 적장자이자 그 계보의 전성기를 구가한 인물이었다. 그는 '안 되는 일 되게 만들기 대회'의 개최자이자 감독이자 주요 플레이어로 정주영, 박태준, 남덕우 같은 플레이어들을 발탁해 힘을 실어주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초대형 조선소 건설, 중화학공업 육성 등 박정희 시대의 굵직한 업적으로 남은 일들을 모두, 박정희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에게서 날아왔던 '국력만 낭비하고 끝날 불가능한 일'이라는 예측을 딛고 시작되었다. 어떻게든 해내고 말겠다는 결심을 한 박정희가 눈에 불을 켜고 '뚝심을 가지고 끝까지 갈만한 인물'을 발견한 뒤, 그 인물들을 설득하고 채찍질해 불도저처럼 밀어붙여 해낸 일이었다.

 

가능하지 않은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은 거칠고 우악스러웠다. 필연적으로 많은 희생자와 부작용을 낳았고, 이는 박정희 시절의 '공 & 과' 중 치명적인 '과'로 남았다. 여기서는 그 일들이 잘한 것이냐, 아니냐에 대한 판단은 하지 ㅇ낳기로 한다. 

 

p.26-27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말과 함께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강국의 헤게모니 다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원년이었다. 대한민국은 떠오르는 양 패권국이 세력 다툼을 벌였던,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땅이었다. 식민 모국의 지배자들이 막 떠나간 빈터에 낯선 패권국 강자들의 입김이 서리기 시작했고, 한반도에 맞는 체제와 질서를 세우려는 움직임은 양대 강국의 입김에 휘둘리다가, 한국전쟁이라는 대규모 내전에 휩싸이며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1953년, 97만의 군인 사망자와 100만의 민간인 사상자를 낸 한국전쟁이 종료된 후, 한반도 남쪽의 지도자들에게는 잿더미가 된 국토에서 근대국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엄중한 책무가 주어졌다. 잿더미만 남은 허허벌판에서 복잡하고 단단한 무엇을 만들어내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었다. 서구 열강이 삼백여 년에 걸쳐 이루어낸 근대국가의 구축, 즉 산업화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과업을 일순간에 해내야 했는데, 그 작업을 하는 내내 영토의 북쪽에 사는 이들의 진척 속도와 성공 강도를 한시도 잊을 수 없었다.

 

국경을 마주한 북쪽에는 형제국이면서도 그보다 더한 적을 상상할 수 없는 극악한 적이 자리 잡고 있었고, 유일한 이웃인 바다 건너 일본은 식민 시절의 기억 때문에 손을 잡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렇듯 세상의 어느 섬나라보다도 더하게 고립된 대한민국은 지구상의 오직 한 나라, 대양 건너의 미국에만 의지할 수 있었다. 

 

천연자원도 없고, 기존에 존재하던 체제, 건물, 도로, 설비, 지역 단위의 관행과 질서 등 물질적 정신적 자산을 전쟁으로 모두 잃었다. 외부로부터의 도움은 오직 태평양 너머에 있는 미국의 손길뿐인데, 그 미국도 제 이권에 맞을 때에만 손을 내밀기에 도움을 얻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세워야 한다. 북한이 먼저 성공해 쳐들어오기 전에 국가 세우기 과업을 해치워야 하니, 언제나 시간에 쫓긴다. 생각 같아서는 삼사 년, 아니 몇 개월만에라도 작업을 해치우고 싶다. 이것이 당시 지도자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국가가 처한 시 공간 적 상황 자체가 안 되는 것을 되게 만들어야 하는 여건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이승만과 박정희와 전두환이라는 세 지도자가 편법과 위법과 독재를 했던 것은 주로 개인적인 야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 개인의 불타는 야욕 주변에는 국가적 상황과 그에 따른 조급함, 어떻게든 근대국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공동체 차원의 강박관념도 상당한 기세로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p.31

육군 소장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한 일은 박정희가 살아서 맞은 마지막 해에 밀어붙인 가장 큰 파격이었다. 전두환은 제1사단장을 맡은 지 막 1년 3개월이 된 소장이었다. 본래 군단장급 직위인 보안사령관은 중장 이상의 장성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49세의 소장이 임명된 전례 없는 파격에 정계와 군부는 무섭게 술렁였다.

 

p.33-35

본래 보안사령관은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자리였다. 군 내부의 정보기관이라고 하지만, 성인 남성 상당수가 생의 일정 기간 동안 군에 몸담도록 의무 지워진 국가에서 '군 내부'와 '외부'의 구분은 모호할 수밖에 없었다. 분단 상황이고 사실상 국민 대부분이 '군인 가족'인 상황에서, 보안사령관의 레이더는 민간 영역에까지 뻗칠 수밖에 없었다.

 

극단적으로 가정하면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 심지어는 군의 서열 최상부를 차지하는 국방부 장관과 육군참모총장까지 모두 북한이 내려보낸 간첩일 수 있음을 의심하며 지켜본 뒤 수상한 동향이 보이면 즉시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해야 하는 자리였다. 보고할 상급자가 대통령밖에 없었기에, 실질적 권력 서열이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이어 4위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전두환이 보직을 받았을 때 보안사령부의 위세는 그리 높지 않았다. 경호실장인 차지철이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에게 직접 하던 정보 보고를 자신에게 하도록 했고, 1977년 10월에 있었던 20사단 대대장의 월북 사건 이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또한 보안사령부가 일반 정보 업무를 직접맡지 않고 중정의 통제를 받게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보안사령관은 경호실장과 중정부장 양쪽으로부터 견제를 받는 처지가 됐다. 

 

독재의 시대에, 권력은 독재자와 자주 만나는 데에서 나오는 법이다. 그런데 신임 보안사령관에게는 대통령과 독대해 직접 보고할 기회가 막혀 있었다. 하지만 전두환은 그런 상황에 낙심하지 않았다. 우선 보안부대에 '하나회' 소속 우수 인재(허화평, 허삼수, 이학봉)를 등용해 참모진을 제 사람들로 탄탄하게 꾸리면서 보안사의 위상과 권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참모들에게는 계엄 선포 시 보안사가 취할 조치에 대한 '시국 수습방안 연구'를 시켰다. 차지철과 김재규의 권력을 약화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운 뒤, 기회가 될 때마다 박정희에게 건의해 정보 수집 권한과 직접 보고 기회를 야금야금 되찾아 왔다.

 

그런 처지라 해도, 명분상 보안사령관은 장관들처럼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고위직이었다. 그렇다면 49세의 일개 육군 소장이 어떻게 그런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전두환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장기 집권자였던 박정희라는 인물과 맺었던 관계에서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박정희는 18년의 집권 기간 동안 뛰어난 용인술을 보여주었던 인물이다. 유능한 인재를 등용해 권한을 일임하되, 발탁한 인재의 권력이 너무 커질 것을 대비해 경쟁자를 등용해 서로 견제하게 만들었다.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를 두고 정보 계통 책임자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게 만든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통치 기간 내내 '2인자를 허용하지 않는' 인사 전략이 이어졌기에 18년 동안 1인자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박정희 사후에 그를 승계할 2인자가 없어 권력이 텅 빈 '공백기'가 발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전두환은 박정희가 구사한 용인술에 중요한 장기 말로 쓰인 인물이었다. 구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의 마음속에는 군부 내에서 누군가 자신이 했던 것처럼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넘실거렸다. 그래서 군부의 동향에 민감하게 촉각을 기울였고, 군부의 세력 판도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기 위해 친위 세력을 두려 했다. 

 

성실하고, 적극적이고, 담대하며, 대통령에게 높은 충성심을 보여주는 전두환은 그런 친위세력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더군다나 전두환은 군 요소요소에 모세혈관처럼 침투해 정보를 수집해 오는 군 내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이끌고 있었다. 박정희는 전두환과 하나회 세력을 키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안전판이자 보험으로 삼았다.

 

p.35-37

당시 정황을 보면, 박정희가 너무 비대해진 차지철의 권력을 전두환이라는 장기 말을 이용해 제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3권짜리 박정희 전기를 쓴 언론인 조갑제는 박정희가 1974년 광복절에 배우자인 육영수를 잃은 이후 판단력이 흐려져 용인술에서도 특유의 냉철함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그 때문에 차지철이라는 단순한 인물에게 권력을 몰아주어 스스로 몰락을 앞당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을 마감하기 7개월 전 40대 육군 소장 전두환에게 파격적으로 힘을 실어주었던 것을 보면, 권력에 대한 박정희의 감각과 판단력은 희미하게나마 유지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전두환이 박정희의 여러 장기 말 중 주요 말로 발탁되었던 시점이다. 전두환이 견제구로서 중요 직책에 임명된 것은 대한민국 정치의 한복판에서 절대 권력자가 일순간에 증발해 버리기 불과 몇 개월 전이었다. 그 시점에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지 않았다면, 우리 현대사에서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얼굴을 내미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엔 누구도 7개월 뒤에 박정희 시대가 막을 내리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물론 전두환도 몰랐다. 전두환은 그저 자신에게 온 보직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을 뿐이다.

 

그는 겉보기엔 파격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허울뿐이었던 보안사령관 자리에 앉은 것을 둘도 없는 기회로 여겼다. 매 순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제가 차리한 자리의 권위를 복구했고, 군부 내 구석구석 침투한 하나회 요원들을 활용해 발 빠르게 정보를 수집했다. 권력 안팎의 인사들에게 손을 뻗어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했다. 10.26으로 권력 한복판에 갑작스레 공백이 생겼을 때 가장 중요한 권한을 갖게 된 것, 즉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대통령 시해 사건을 조사할 책임자가 된 것은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종말을 코앞에 둔 절대 권력자에 의해 중요한 장기 말로 발탁된 것은 우연에 속하는 일이었지만, 보안사령부를 지키며 권한을 키워나가고 결정적인 순간에 중요한 자리를 꿰찰 수 있도록 '준비된 태세'를 유지한 것은 전두환이라는 개인의 노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실오라기 같은 기회만 있어도 맹렬하게 임해 지위 상승 가능성을 극대화하며 살아온 전두환은, 대통령 유고라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왔을 때 엄청난 기세로 덤벼들어 그 기회를 낚아챘고, 이후 한국의 현대사에 일어날 수 있었던 모든 경우의 수를 소거하며 제 야심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질주했다.

 

p.43

회고록 3권의 첫 장에 기술된 문장을 여러 번 읽으며 당시의 전두환이, 전두환의 아버지가, 전두환의 어머니가 되어보려고 노력하다 보면, 행간을 곱씹던 자는 어느 순간 이 두 사건이 전두환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1) 말로 해결하거나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기 앞서 실천으로 옮기고 보는 아버지의 행동파적인 기질과

2) 가족에 대한 어머니의 단순하고 맹목적인 사랑

 

전두환의 부모에게서 나타나는 이 두 가지 특성은 성년기 이후의 전두환을 이루는 핵심 키워드이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전두환은 직접 쓴 회고록을 통해 제 선천적 후천적 기질의 기원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는 셈이다.

 

p.44-45

초등학교 졸업 후 전두환은 대구공업중학교와 대구공업고등학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다. 합격자 228명 중 226등의 성적으로 겨우 입학에 성공한 그에게 육사의 교육 과정은 벅찰 만큼 어려웠다. 제대로 된 초 중등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대학 과정의 수준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수학을 잘하는 친구에게 개인 지도를 받거나, 취침 시간에 몰래 빠져나와 화장실에 가서 공부하는 등 악바리처럼 노력해 정규 과정을 소화한다.

 

육사를 마친 뒤 그의 군인 경력은 탄탄대로였다. 졸업 뒤에는 미국 포트 브랙 기지의 심리전 학교에서 심리전 과정을 이수하고, 미 육군 보병학교의 레인저 과정과 패스파인더 과정을 이수해 특수전 전문가로 거듭난다. 한국에서 7~8명만 선발해 대표로 보내는 과정에 선발되어 미국 유학을 갔으니, 꼴찌에서 두 번째로 들어간 육군사관학교에서 그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가난에 시달리던 소년이 남들보다 서너살 늦게 공교육 궤도에 진입하고, 가난과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들어가기 어려운 코스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아등바등하다 한국 대표로 선발돼 미국 유학을 가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상승을 위한 한 사람의 에너지가 탄생되고 증폭되어 가다가 마침내 값진 열매를 맺는 과정이 생생하게 전달되어 온다. 그의 성장 과정은 한마디로, 상승을 위한 끈질긴 집념이 펼치는 강렬한 드라마였다.

 

p.50-52

스스로 '능동적인 자세로 대처해 나간다'라고 표현한 전두환의 이런 성향은 이후 그의 인생 내내 일관되게 이어졌다. 뒤로 물러서기보다 나서서 일을 돌파해 내는 '대장형'이었던 그의 기질은 대구공업중학교 시절, 수업 거부를 선동하는 학생들에게 "우리 부모님이 어려운 가운데 학비를 마련해 우리를 학교에 보냈는데 이게 무슨짓이냐"라고 호통을 치거나, 육군사관학교 입교 뒤 나갔던 외출에서 동기생 열 두 명의 점심을 해결해 주기 위해 참모장인 이규동 대령을 불쑥 찾아가는 일로 이어졌다.

 

어느 날 불숙 집으로 찾아가기 전까지, 육군사관학교 참모장인 이규동과의 인연은 육사 축구부 주장인 전두환이 부원들과 운동장에서 연습할 때 이규동이 가끔 들러 지도해주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전두환은 동기들의 점심을 해결해 주기 위해 참모장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평소 나를 비롯한 축구부원들을 따뜻하고 자상한 눈길로 봐주던 분이니 폐를 끼치러 가도 박대하시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전쟁을 겪고 있던 1950년대 초반, 당시엔 누군가의 집에 찾아가거나 갑자기 점싱르 달라고 하는 일이 흔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대단한 배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전두환은 동기들에게 점심을 책임지겠다고 큰소리쳤지만 혹시 참모장이 집에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면서, 당시 관사가 따로 없어서 참모장이 진해의 변두리 경화동에 조그만 집을 전세 내어 살고 있었다고 부언한다. 그러니까 그는 개인적 친분이 없는, 자신보다 한참 위 연배인 '참모장'의 셋집에 무작정 찾아가 열 명이 넘는 청년들의 점심밥을 내놓으라고 했던 것이다.

 

문을 두드렸을 때 참모장은 전두환과 육사 생도들을 반갑게 맞았다. 참모장의 부인은 갑자기 나타난 청년들에게 정성스럽게 밥상을 차려주었다. 밥을 먹은 뒤 동기들과 현관을 나서던 전두환이 다음 주에 또 찾아오겠다고 너스레를 떨자 참모장은 그렇게 하라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참모장 부부는 매주 일요일마다 별미를 만들어 놓고 전두환과 생도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날을 기점으로 전두환은 참모장의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참모장 가족과 친분을 쌓고 종국에는 참모장의 딸과 백년가약을 맺기에 이르니, 전두환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사교성이 좋은 인물이었는지, 그 사교성으로 얼마나 많은 기회를 거머쥐었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전두환은 원하는 일이 있으면 누구에게든 거침없이 다가갔다. 당연하다는 듯 원하는 바를 요구하고, 그를 통해 친분을 쌓고 지지를 얻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p.59

육사 생도 시절, 참모장의 집에 무작정 찾아가던 때 전두환의 모습은 악이나 추함과는 거리가 멀다. 개인적 친분이 있지 않은 참모장의 집에 불쑥 찾아가는 청년 전두환은 얼마나 젊고 구김살 없는가! 그 시절까지만 해도 전두환은 제게 내장된 특성들을 자연스럽게, 좋은 방향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한 사람의 장점과 단점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전두환만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람도 없으리라.

 

p.62~63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대통령 최규하와 총리 신현확은 국방부 장관 결제가 없으면 정승화의 체포를 승인할 수 없다며 승인하지 않고 버틴다. 당황한 전두환이 다급히 국방부 장관 노재현을 찾지만, 노재현의 행방은 묘연하다. 육군본부에서 난 총소리를 듣고 어딘가로 도주했는데 그 뒤로 소재를 찾을 수 없다.

 

대통령과 총리가 재가를 미루며 버티는 사이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된다. 노태우가 이끄는 9사단의 1개 대대 병력이 서울을 향해 출동하고, 육군참모총장 체포 소식을 들은 정병주와 장태완은 원대로 복귀해 진압군을 출동시킨다.

 

서울 한복판에서 국군끼리의 내전이 벌어지기 직전, 미군 벙커에 피신해 있던 국방부 장관 노재현과 총리 공관에 있던 국무총리 신현확은 아군끼리의 내전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돌린다. 반란군과 진압군 양쪽에 연락을 취해 출동을 멈추라 읍소하고 양쪽 세력은 결국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반란군 측이 약속을 어기고 서울로 병력을 출동시키면서, 다르게 끝날 수 있었던 이 겨울밤의 각축전은 한쪽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경호실 병력으로 총리실을 둘러싼 상태에서 반란군 측이 최 대통령을 협박해 자신들이 벌인 반란 행위를 '합법화'한 것이다.

 

밤을 꼬박 새운 뒤 12월 13일 새벽 5시, 대통령 최규하는 재가 서류에 결제한다. 날이 밝은 뒤 국방부 장관 노재현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과 관련해 군 수사기관이 체포해 조사 중이다."라는 특별 담화를 발표한다.

 

p.62

12.12 국면에서 노태우의 9사단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9사단은 당시 대한민국의 최전방에 주둔하던 사단이었다. 1979년 12월 당시에는 평시 작전 통제권도 주한미군 측에 있었고, 최전방 부대를 동원하려면 한미군사동맹 협정에 의거해 한미연합사령관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이를 무시하고 9사단 29연대와 30연대 소속 1개 대대를 출동시켰고, 이는 당시 한미연합사령관이었던 위컴의 격노를 유발했다.

 

p.71-73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군 지휘관으로 20여 년을 복무하고 중령으로 예편한 A는 12.12가 성공 가능성이 크지 않은 쿠데타였음을 이렇게 설명했다. "전두환이 장악하고 있던 보안사령부는 정보형 특수부대였습니다. 당시 연대 병력은 3,000명으로 잡는다면 그 중 보안부대에 속하는 인원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을 거에요. 사단 병력을 12,000에서 20,000명 정도로 보면 거기서 보안사령부 소속 지휘관은 열 명 안팎이었을 겁니다. 그냥 특경대 하나만 보내도 쓸어버릴 수 있는 수준인 거에요." 보안사령부가 가진 힘이 군 인사들에 대한 정보를 이용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일 뿐 직접 동원할 수 있는 물리력은 거의 없었다는 설명이다.

 

12.12가 국군 다수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거나, 성공하기 힘든 쿠데타였다고 회자되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직접 동원할 직속 부대가 없는 가운데 사조직과 신뢰 관계만으로 타 부대를 동원해 거사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곱씹으면 12.12가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 기도였는지 어림해볼 수 있다. 전두환의 조직력과 행동력, 배짱이 그만큼 막강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모두 쿠데타의 성공을 기정사실로 알고 있는 후대 사람들의 왈가왈부일 뿐, 당시 당사자의 심정은 형언할 수 없는 종류였을 것이다. 두려움으로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지 않았을까. 담대하기로 유명한 전두환이었지만, 자신과 가족, 측근들과 그 가족들의 명운을 건 일의 결과를 놓고 태연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조직된 85명의 군인이 3,740만여 명 인구의 대한민국을 접수해버린" 12.12가 성공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가장 먼저 손에 꼽을 수 있는 건 당시 대한민국의 총지휘권을 갖고 있던 이들의 모호한 태도였다. 쿠데타 군 진압을 명령할 권리는 국방부 장관 노재현과 대통령 최규하에게 있었다.

 

12.12의 밤, 쿠데타 발생 뒤 미국 벙커에 피신해 있던 노재현은 출동해 전두환 일파를 진압하겠다는 장태완을 만류했다. 미군 관할 벙커에 머물러 있으라는 한미연합사령관 위컴의 권유를 뿌리치고 신군부 세력이 장악한 국방부 건물로 간 뒤, 노재현은 완전히 전두환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최규하도 마찬가지였다. 북한군의 움직임을 걱정하면서 결정을 미루다가, 결국 진압의 결정적인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이후 최규하가 보인 행보는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헌법 개정에 착수하지 않고 시간을 끌면서 어정쩡하게 과도정부 체제를 끌고 갔다. 전두환 세력을 좌천시키거나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전두환이라는 물리적 힘과 손잡은 뒤 자신이 국가수반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는 시나리오를 꿈꾸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결정권을 가진 이들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정병주와 장태완이라는 진압 세력이 있었음에도 결국 반란군인 전두환 세력이 승기를 잡았다.

 

p.82-84

20사단과 특전사 부대를 보내 광주도청을 접수한 1980년 5월 27일 이후 죽는 날까지, 전두환은 광주에 대한 책임을 부인했다. 책임을 부인한다는 측면에서는 평생 일관된 자세를 고수했지만, 사안에 대한 구체적인 대처 방식은 시기에 따라 달랐다.

 

5공화국에서 공보비서관을 지낸 윤여준은 재임 당시 전두환이 광주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회고한다. "전 대통령은 가능한 한 광주와 전남 지역에 SOC 투자를 많이 하고 기반 시설을 잘 만들어주면 자신에 대한 원한이 사그라질 것이라고 기대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 쪽에 투자도 많이 하고 또 다른 지역보다 광주에 더 많이 내려갔습니다." 그때마다 시민들을 만나면 전두환은 "내가 광주를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다른 어느 곳보다 더 많이 내려온다."라고 말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잦은 방문과 립서비스가 아닌 실질적인 지원, 즉 광주에 주요 산업시설을 유치하거나 인재 등용을 하는 등의 본격적인 지원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이 에피소드로 추정해볼 수 있는 점이 있다. 당시 전두환의 마음 속에 가책 비슷한 무언가가 일렁였다는 점이다. 

 

1980년 5월에 있었던 광주에서의 참극은 전두환의 남은 인생 모두를 휘감아 버릴 거대한 휘장이었다. 1980년 5월 17일까지 전두환은 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한 무도한 군인이었다. 쿠데타 과정에서 희생자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특정 지역 시민을 대량으로 희생시킨 학살자는 아니었다. 1980년 5월 18일, 전두환은 한 가지 정체성만 지닌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전두환'하면 광주, '광주' 하면 전두환이 자동으로 떠오르게 되었고, 그는 그 굴레에 갇혀 영원히 헤어나오지 못하게 될 터였다.

 

1985년, 광주에서 1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민정당 소속 이영일이 전두환과 독대한 자리에서 광주항쟁 사망자와 유족, 부상자들을 더 이상 '폭도'로 부르지 말 것을 건의했다. 전두환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메모를 한 뒤 연구해 보겠다고 답했다. 이틀 뒤, 이영일은 정부에서 '폭도'라는 말을 쓰지 못하도록 지침을 내렸다는 연락을 받았다. 뒤이어 이영일은 정부에 광주항쟁 관련 해직 교수와 교사를 복직시키라는 건의를 했고, 대통령 측근들을 찾아가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해직 교원들의 복귀와 해직 기간의 월급 문제 해결까지 보장받게 된다.

 

퇴임 뒤인 1988년 11월 23일, 백담사로 가기 전 기자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전두환은 "80년 5월 광주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태는 우리 민족사에 불행한 사건"이라고 규정한 뒤 "피해자와 유가족의 아픔과 한이 조금이라도 풀어질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이는 전두환이 했던 발언 중 가장 '참회'에 가깝게 다가간 발언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잘못을 규명하거나 자기 책임을 인정하지는 않은 그 발언을 온전한 '참회'나 '사과'로 볼 수는 없다. 

 

p.86-87

전두환의 태도 변화를 이끄는 동인은 한 가지뿐이었다. '제가 처한 상황'이라는. 그는 뒤돌아보지도, 앞을 내다보지도 않았다. 오직 그 순간, 자신이 당면한 현재에 머물렀다. 시선도 오직 제 몸뚱어리와 그 내부에 있을 마음만을 향했다. 그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자신 혹은 자신의 피붙이들(혹은 자신의 보위 세력)뿐이었다. '광주'가 갖는 의미, '광주'에서 희생된 이들의 삶에 어렸던 가치와 아름다움과 가능성, 그 삶이 사라지는 순간 그 삶과 연결되어 있던 수많은 삶에 미쳤을 거대하고 압도적인 파장, 그런 것들은 한 순가도 그의 뇌리에 담기지 못했다.

 

전두환은 철저히 '지금', '여기', '나'에 머물며 소탈하게 웃거나, 호쾌하게 농담하거나, 시원시원하게 살아있는 인간의 육신의 위해를 가하라는 명을 내렸다. 전두환에게 '과거의 자신'은 타인과 다름 없었다. 과거의 자신이 광주에 대해 무슨 말을 했든 어떻게 행동했든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저 '현재의 나'가 무사히 살아남아 안녕을 누릴 수 있다면 그는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할 수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광주를 피상적으로, 철저히 자기 위주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대응한 것은 그런 그의 근본적인 기질, 즉 '현재, 여기, 나'만 보고 사고하는 특성, 자신과 관련 없는 타인에게 완벽하게 둔감할 수 있는 그의 탁월한 능력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인간종 모두에게 내장된 경향이다. 삶과 죽음을 제 의지로 선택할 수 없고 추위와 배고픔 앞에서 덜덜 떨며 무릎 꿇게 되는 동물로서의 인간인 한, 나도, 너도, 그도, 그녀도, 모두 현재와 여기와 나 자신을 우선순위에 둘 수밖에 없게끔 운명 지워져 있다.

 

하지만 전두환의 경우는 그러한 경향이 강도와 순도와 일관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자신을 중심에 놓고 살다가도, 가끔 잣니보다 더 넓은 무언가를 향해 투신했다가 다시 '나'라는 생명체의 존속에 치중하는 대다수 살마과 달리, 전두환은 자신을 중심으로 한 기조를 일관되게 유지했다. 언제 어디에서나 고려 대상이 단일한 한 사람, 오로지 '나' 밖에 없는 전두환에게는 다른 요인에 대한 고민으로 속을 끓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언제나 용감하게 덤벼들어 사건을 만ㄷ르고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전두환을 '나이브'하다고 평한 허화평의 안목은 정확했다. 오직 한 가지만을 기준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인간은 타인들의 눈에 순수, 의리, 용맹, 카리스마 같은 가치의 상징으로, 동시에 단순, 무식, 잔인, 독선, 나이브함과 같은 무지성의 아이콘으로 비칠 수 있는 것이다.

 

p.97-99

입으로 '민주발전', '정의'를 지껄이며 실제로는 상상 가능한 범주를 넘어서는 폭력을 휘두르는 '장군'과 '민주주의'라는 말을 한 번도 입에 올려본 적이 없지만 제 가족을 사랑하고 배고픈 이웃을 돌볼 줄 아는 소박한 시민들이 대면해 사투를 벌였다. 수십 년 세월 동안 쌓여온 온갖 종류의 희로애락과 절대적인 소통 불가능성이 뒤섞여 악마들만이 태연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폭력을 만들어냈다.

 

1945년 해방 이후 38선 이남 영토에 일었던 모든 폭력이 집대성되고, 폭발하고, 결국 단죄받아 쇠락의 길을 걷게 되는 그런 역사적 현장 앞에서, 그 현장을 만드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이,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였던 전두환은 무얼 하고 있었던가? 80년 5월, 광주에서 점화된 불꽃을 인식한 모든 이들이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거리던 때, 무대에서 원 탑 안티 히어로 역할을 맡았던 장군 전두환은 가장 태연하고 가장 한결같은 모습으로 주어진 역할을 해냈다.

 

5.18 전야인 5월 17일에는 김대중을 연행해 중앙정보부 취조실에서 조사하고, 광주항쟁이 한창이던 5월 21일에는 광주에 내려가 헬기로 돌며 상황을 위에서 내려다보았으며, 시민수습위원회와 정부 간 협상이 진행되던 5월 22일에는 김대중을 광주폭동 주모자로 단언하는 계엄 당국 명의의 성명서를 발표해 협상이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같은 날, 광주 시민수습위원회와 정부 간의 대화를 촉구하는 미국 측 성명서를 은폐한 뒤 주한미군사령관이 광주 투입을 위한 병력 사용을 승인하고 권장했다고 방송했고, 5.18이 끝난 뒤에는 경찰을 앞세워 유족회 등 5.18 단체의 분열을 획책했다. 

 

나아가 그는 망월동에 묻힌 희생자 시신을 다시 파내서 개별적으로 이장시키라는 지시를 내려 유족과 경찰 사이의 갈등을 조장했고, 총을 들고 앞장서서 시민을 진압하라는 계엄사령관의 명령을 거부한 안병하 전라남도 경찰국장을 연행해 고문헀다. 이 밖에 5.18 당시 과잉 진압을 막기 위해 노력헀던 다수의 군경 인사들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연행, 고문, 강제 사직 강요를 자행했다. 그는 반백 년 동안 해온 습속대로 현실을 부인하고, 힘으로 제압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다시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광주에서의 항쟁이 마무리된 뒤에도 전두환의 행보는 한결같았다. 1980년 8월, 그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삼청교육대를 설립해 초법적으로 시민을 구금하고 인권을 유린했다. 1985년 7월에는 운동권 학생들을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는 학원안정법을 제정하려다가 강한 반발에 부딪혀 포기했다. 1986년 10월에 건국대학교에서 항쟁이 일어났을 때는 헬리콥터와 최루탄, 물(소방수)을 동원해 1,525명의 학생을 연행했고, 그 중 1,288명을 구속했다. 삼청교육대 설립과 학원안정법 제정 기도, 건대 항쟁 참가자들에 대한 대규모 연행 및 구속은, 법이라는 준거점 없이 임의로 국민을 잡아 가두고 인신을 멋대로 요리하려 했다는 점에서 광주항쟁 당시 전두환이 했던 대응과 유사선상에 놓일 만한 사건들이다.

 

p.105-106

10.25이후부터 12.12로 체포당해 끌려가기 전까지의 기간, 정치군인을 축출하라는 군 내부의 강력한 여론이 있었음에도 발 빠르게 조취를 취하지 않았던 것은,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부하 직원에 대한 것일지라도 기준에 맞추어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려는 정승화 특유의 소신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지식한 모범 군인 스타일의 정승화가 제 내면의 정당성과 규범을 중시한 나머지 전두환이라는 암초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

 

12.12의 밤, 정승화가 전두환의 전광석화 같은 조치에 당했던 것은 자신과 너무나 다른 인간상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일지도 모른다. 훗날 정승화는 12.12의 순간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뢰한에게는 당해낼 수가 없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짓을 벌이는 걸 도대체 어떻게 예상이나 하겠는가. 허삼수와 우경윤이 나를 데리러 온 게 쿠데타의 수순인 줄 알았다면 순순히 따라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관에는 외부로 통하는 숨겨진 통로가 있어 공관 밖에서 놈들의 병력이 아무리 지키고 있다 하더라도 얼마든 따돌릴 수가 있었으니까." 18년 간 대한민국을 호령하던 독재자가 사라진 커다란 암흑 공간에서, 합의된 규범과 상식선에서 행동했던 정승화는 야욕에 가득 찬 정치군인 전두환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휩쓸려 교도소의 수감자로 전락했다.

 

p.107-109

원론적으로 쿠데타에 찬성하지 않으면서도 한국의 군권을 장악한 새로운 인물과 우호적 교류를 이어가려 했던 미 대사 글라이스틴과 달리, 한미연합사령관 위컴은 전두환의 존재를 철저히 무시했다. 전두환을 만나주지 않았고, 전달 사항이 있으면 반드시 국방부 장관 주영복이나 대통령 최규하를 통했다. 신군부에게 끌려 내려진 뒤 수감 생활을 하고 있던 정승화에게 생일 케이크를 보낸 뒤 항의하는 신군부 인사들에게 "개인적인 친분으로 보냈을 뿐"이라고 태연하게 말하기도 했다. 위컴 못지 않게 자존심 강하고 감정적이었던 전두환으로서는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을 것이다.

 

쿠데타 발발 직후 한동안, 전두환은 위컴으로 대표되는 미국 측의 이러한 분위기에 겁을 먹었다. 한 예비역 장성의 말에 따르면, 전둔환은 위컴이 한 인사를 통해 12.12 거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전해오자 크게 상심했다고 한다. 배우자인 이순자가 자신을 찾아온 예비역 장성의 부인에게 "미국이 인정을 안 해줘 남편의 일이 실패해서 졸도했다"고 말했다는 일화를 통해 당시 신군부 세력이 얼마나 겁에 질려있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전두환은 미국의 반응이 제한적이며 실질적인 조치를 취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재빨리 반격에 나섰다.

 

이후 펼쳐진 위컴과의 대결과 결말을 보면, 전두환의 권력에 대한 동물같은 촉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권력 앞에 섰을 때 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빠른 두뇌 회전과 행동력의 극한을 탐구하는 데 위컴에 대한 전두환의 대응보다 더 좋은 예시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자신감을 되찾은 전두환이 괘씸한 외국 군인에게 무엇을 했던가. 미국 본국으로 손을 뻗었다. 위컴의 상관 혹은 위컴의 상관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인물들에게 서한을 띄우고 사람을 보냈다. 자신에게는 정치적인 의도가 '조금도' 없고 그저 위태로운 국가의 안보를 안정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미 고위 장성들에게 한국을 방문해줄 것을 청하고, 그에 대한 장성들의 응답을 왜곡해 '위컴 교체설'을 퍼뜨렸다. 그 괒어에서 마치 미국이 전두환을 한국의 지도자로 용인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만들어냈다. 전두환의 이러한 책동은 미 장성들 사이를 이간하고, 위컴의 지위를 흔들어놓는 결과로 이어졌다.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 발발 이후부터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1980년 9월까지, 한국 상황에 대한 미국의 기본 방침은 한국 헌법상의 최고 지도자들을(최규하와 신현확) 최대한 지원하되, 결정적 움직임은 한국 국민들 스스로에게서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정치발전을 이루도록 간접적인 지원은 하지만 한국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는다는 방침이었다.

 

전두환의 지지자들 사이에 'ㅅ기민지 총독'이라 불렸던 위컴은 전두환과의 대결 초반에 막강한 강자로 군림하는 듯 보였다. 그는 자신이 강자로서 전두환을 제압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전두환의 간교한 계략에 번번이 패퇴하면서 차츰 강자의 자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쿠데타로 권력 탈취를 꿈꾸는 한국군 장군과 한국에 파견 나와 있던 주한미군사령관 사이의 승부는 1980년 8월 10일, 한국 내 영자신문인 <코리아 헤럴드>에 미국이 전두환을 지지할 것이라고 위컴이 단언했다는 왜곡 기사가 나가고, 그로 인해 위컴이 본국과의 관계에서 결정타를 입고 비틀거림으로써 막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위컴은 "30년 동안 입었던 군복을 벗게 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전전긍긍했고, 사건이 마무리된 뒤 한미연합사령관 직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위컴은 이후 전두환의 정권 탈취를 막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은 채 한국에 머물다가 1982년 6월 4일 조용히 본국으로 돌아갔다.

 

p.114

관 주도의 수출 중심 경제보다 민간 중심 시장경제를 강조한 경제관료들이 대한민국에 도입했던 '안정화 조치'가 서서히 효과를 내기 시작하던 1985년, G5 정상 간의 '플라자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후 도래한 3저 호황(저금리, 저환율, 저유가)와 엔화 절상으로 한국 경제는 활짝 웃음 짓게 되었다. 자동차와 선박 등 주력 수출 품목의 세계시장 데뷔에 성공한 한국은 엔화 절상이라는 호재 덕에 가격 경쟁력을 장착하고 세계시장을 누비기 시작했다. 그 시기가 1986년에서 1988년까지다. 1986, 1987, 1988년의 연평균 성장률은 12%를 기록했고, 3년간의 경상수지 흑자가 286억 달러에 달했다.

 

p.131-132

박정희는 직접 저술한 책에서 "우리는 대개 자유경쟁에 따른 가격 결정 기능이 제공하는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시장경제에 대한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막 걸음마를 하는 어린이에 불과한 대한민국이 이미 규모의 산업화를 달성한 선진국들과 동등하게 세계시장에 참가하면 제대로 경쟁해 볼 새도 없이 넘어지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기에 정부 차원에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기업들이 국가의 부를 일구는 데 동참하도록 추동했다. 외풍을 막기 위해, 선진국의 앞선 산업의 산출물들이 국내에 들어오지 않도록 보호 정책을 폈다. 동시에 수출 기업들에 국내 은행 융자, 해외 대출 보증, 수출 보조금, 면세 혜택, 공공요금 감면 등의 혜택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기업들이 혜택을 받은 뒤 나태하게 이권만 챙기려 들 경우를 대비해 엄격한 방지책을 마련했다. 기업들이 일정 수준의 수출 실적을 달성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혜택을 끊어버리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세계시장에 수출하기 위해서는 기업이 자체적으로 핵심 기술을 보유해야 하고, 핵심 기술 보유를 위해서는 기업 차원에서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했다. 국가가 세금으로 뒷받침하는 영역이 핵심 기술 개발 의지가 있는 제조업 쪽으로만 한정되게 한 것은 외부적 강제가 없으면 곧바로 개별 기업의 이익 창출(골치 아픈 제조업 대신 부동산 투자를 하는 등의 방식으로)에 골몰하게 되는 기업인의 생리를 꿰뚫은 박정희의 냉철한 예지력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대규모 해외 부채를 끌여들었다는 점에서 박정희와 유사한 경로를 걸었던 필리핀의 마르코스가 그렇게 끌어들인 돈을 기업들의 수출 중심 산업 역량 증진에 쓰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국내 부동산 건설과 매표 활동 그리고 비생산적 수입으로 탕진되게 만들었던 것과 대조적인 처사다.

 

p.133-136

절대 권력의 자리가 공석이 되어버린 1979년 10월 26일부터 전두환이 공식적으로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1980년 9월 1일까지, 대한민국 경제 상황에 세계적으로 이목이 쏠린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사망하기 몇 달 전에 마지못해 '안정화 정책'을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연출하긴 했지만, 18년 동안 일관되게 정부 주도 성장 중심 정책을 추진해 온 박정희가 진심으로 그 정책을 받아들였는지는 미지수였다.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의 집권이 가시화되어 가는 기간, 새로운 권력자가 향후 어떤 경제 노선을 택할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국내시장을 세계시장에 개방할 만한 실력을 기르도록 국가가 산업 생태계를 육성하고 보호하는 기간을 대표했던 인물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뒤, 경제기획원 출신 관료들은 경제 정책의 대전환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전 정권의 수장 박정희 치하에서 위태롭게 고수하던 안정화 시책을 일관되게 밀고 나갔다. 수출 주도 성장 경제라는 역사가 그의 인생 자체이기도 했던 박정희라는 인물의 부재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하는 국가 경제의 행로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된 셈이다.

 

놀라운 것은 1년이 채 못 되는 이 기간 동안 차기 권력자인 전두환이 고위 경제관료들의 '안정화 정책'을 채택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 경제는 보폭을 크게 하여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에서 경제기획원 기획국 국장과 예산국 국장으로 일하고 전두환 정권에서 경제기획원 차관보와 재무부 장관으로 일한 강경식에 의하면, "안정화 시책은 정부에서 못하게 분명하게 명시한 것 이외에는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네거티브 시스템적 사고로의 전환"이었다. 그동안 정부가 행사해온 결정권을 기업, 은행 등 민간에게 넘기고 관여하지 않는 방향으로 국가 경제의 키를 돌린 것이다. 1948년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일관되게 정부가 해온 역할과 기능을 총체적으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이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빗댈 만한 일이었다.

 

5공화국 시기에도 수출 주도와 정부의 계획경제라는 외형은 유지되었다. 때로는 대통령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는 이유로 21개의 계열사를 거느렸던 서열 7위의 대기업을 하루아침에 해체해 버리는 등 시장경제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지점에 선 일들이 버젓이 행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일각에서는 물가안정을 위해 정부가 직접 개입해 가격을 통제하거나, 행정 규제에 의해 수입을 억제해 시장의 가격 선정 기능을 왜곡시키는 정책이 근절되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공장이 들어설 부지를 선정하거나 은행의 자금을 빌려줄 때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경우가 줄어들었고, 그와 함께 기업들이 자유롭게 경쟁하는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이전처럼 직접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기보다, 가장 적은 비용을 들여 가장 좋은 상품을 생산하는 '능력 있는' 기업이 살아남도록 간접적으로 복돋웠다. 그 효과는 기업에 고용된 국민 개개인에게도 퍼져나갔다.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경제활동의 가짓수가 늘어나고 그로 인해 개개인의 잠재력이 발현되면서, 생활상과 사고방식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열심히 하면 능력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상승와 함께 개인들은 열심히 노력하고, 그에 따라오는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국민의 관심사가 이전보다 더 고급스러운 차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배불리 먹고 추위를 피하기만 하면 되었던 시대에서, 단순히 먹고사는 일이 아니라 '나의 선택'을 통해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대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내 삶을 내 의지로 꾸려가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단순하고도 강력한 열망, 즉 내가 속한 공동체의 앞날을 좌우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리더'를 내 의지로 선택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연결되었다.

 

'전두환은 자신이 이룬 성과 때문에 권좌에서 밀려났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5공화국 시절 대한민국이 이룬 경제적 성과가 온전히 전두환이라는 개인에게서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말은 잘못되었지만, 5공 시절에 대한민국 경제의 체질이 개선됐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부분적인 진실을 담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p.157-158

'김대중을 살려주는 대가로 이루어졌던 정상회담'으로 알려진 이 만남에서, 레이건은 박정희가 시도했던 핵 개발을 전면적으로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전두환은 박정희 시절 핵 개발을 주도했던 원자력연구소와 한국핵연료개발공단을 즉각 통폐합시켰고, 82년 말에는 국방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와 연구소 직원들을 대규모(839명)로 해고했다. 후일 전문가들에게 국방과학기술을 10년 이상 후퇴시키고, 자주국방 의지를 현저히 떨어뜨렸다는 평가를 받은 퇴행적인 조치였다.

 

국가 간에 이런 협상이 오가는 경우, 대개 청구서를 받아든 다른 한쪽에서도 묵직한 청구서를 내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이 내밀었던 청구서는 달랑 하나, 그저 자신과 만나달라는 것이었다. 생각할수록 아쉬운 일이다. 전두환이 정통성 있는 대통령이었다면 레이건이 내민 청구서와 비슷한 중량의 요구사항을 내걸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전두환은 요구사항을 내걸기는커녕 국가 안보와 국익을 개인적 이익과 맞바꾸었다.

 

p.159

정통성 없는 지도자는 국가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안보와 교역, 민생과 치안에 막대한 손해를 입힌다.

 

p.172

낙천적이고 강인하며 시작한 일을 결기 있게 밀고 나가는 특성은 인간으로서 갖추면 좋은 바람직한 특성이다. 그런 기질이 있어야 비관에 빠지지 않고, 제가 가진 것에 만족하며 힘차게 인생이라는 배를 노 저어 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특성이 그 사람이 가진 유일한 특성이자 기질이 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사람은 실수를 저질렀을 때 제 과오를 돌아보고 반성해야 향후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게 되는데, 돌아보고 잘못을 성찰해야 하는 순간에조차 '난 잘한 거야!' '괜히 기죽을 필요 없어!'라고 외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 사람은 이후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부끄러움을 통해 나의 유한함과 타인의 유한함을 나란히 놓고 연대감을 느끼는 인간종 특유의 특별한 화학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의 유한함을 직시한 사람만이 타인의 유한함을 알아보고 연민할 수 있는데, 자신의 결함과 마주 서서 정면으로 대결한 적이 없는 사람은 관성적으로, 그저 내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주게 되는 것이다.

 

p.184-185

1987년 6월 남한에서 대대적인 민주화 시위가 일었을 때, 미국은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켰던 1979년 12월과 똑같은 잣대를 갖고 우방국의 상황을 주시했다. 미국의 기준은 오직 하나, '남한의 안보에 위협이 될 만한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대한민국 국민은 12.12나 5.18 때와 달라져 있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각계각층이 모두 박차고 나와 민주화를 부르짖었다. 미국의 기준에서 남한 시민들의 이러한 대규모 항쟁은 동북아 안보에 커다란 위협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협적인 것은 6월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겠다는 전두환의 의지였다. 탱크를 동우너해 시민을 대량으로 살상하는 것은 내전을 의미했고, 내전은 북한의 침공을 부르는 강력한 유혹이 될 것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의 확고한 의지를 지켜본 미국은 시위 진압에 군을 동원하려는 전두환에게 무력 진압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시그널을 보냈다. 주한 대사를 통한 미국 대통령의 친서라는 형태로 배송된 시그널 앞에서, 전두환은 망설였을 것이다. 올림픽이 한 해 앞으로 다가와 있는 때였다. 갈팡질팡하는 그의 마음에 올림픽이라는 행사가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떠올라 펄럭였을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시민과 정부군 사이에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진다면 올림픽 개최의 꿈은 물거품이 될 터였다. 그것은 자신이 몇 년 동안 사활을 걸고 매달려 온 대형 이벤트가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국민과 맞붙었을 때 군부가 전두환의 편에 서줄지도 미지수였다. 군 장성 중 누군가가 국민의 편에 서서 쿠데타라도 일으키면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장날 것이었다.

 

망설임 끝에 전두환은 국민의 뜻인 직선제를 받아들였다. 분단 상황이기에 운 좋게 권력에 올라탔지만, 또한 분단 상황이기에 장기집권 시도에 실패했던 셈이다. 이것은 1980년대라는 시대에 내재된 핵심적인 모순이었고, 이 세상을 '적과 아군'으로만 나누어 사고하는 방식 외에는 그 어떤 방식도 생각해낼 수 없었던 단순 인격체 전두환에게는 죽는 날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p.192-193

회고록에서 박철언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권위를 세우려 들고 독선적인 기분에 빠지는 듯하다. 때문에 충격적 대응이나 과격한 조치를 지시하는 일이 가끔 일어난다. 이런 때 핵심 참모들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하다. 당장 확정 집행될 일이 아닌 경우에는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치밀하게 준비하는 자세를 보이고, 대통려도 차츰 장 단점, 문제점을 직접 느낄 수 있도록 몇 차례 요약 정리 보고하여 결국 대통령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5공화국 시절, 요직을 맡으며, 전두환의 지근거리에 끝까지 머무른 이들은 모두 박철언과 비슷한 특징을 보였다. 권력자 앞에서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소신을 밝히기보다, 권력자의 욱하는 기질과 제 친인척을 감싸고 들며 특혜를 더 안겨주지 못해 안달하는 마음을 어느 정도는 받아주는, 혹은 받아주는 시늉을 하는 이들이 오래 권력자의 곁에 머물렀다. 정계에서는 장세동, 노신영, 노태우, 박철언이, 언론계에서는 이원홍, 이진희가 '전두환 마음 알아주고 받아주고 얼러주기'의 대표 달인들이었다.

 

물론 이들 무리 간에도 차이는 있었다. 장세동이 '싸나이 의리' 혹은 '주군과 부하' 분위기로 무협지 속 등장인물처럼 전두환을 보위했다면, 문관인 노신영은 살아오면서 쌓아온 총기와 지성을 총동원해 전두환을 지극정성으로 보필했다. 노태우가 세월을 낚으며 전두환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지 않는' 은근한 방식으로 장수했다면, 박철언은 전두환이라는 '나이브한' 인물의 심리를 꿰뚫고 부드럽게 유도하는 방식으로 장수했다.

 

p.232

노태우가 드리운 낚싯줄의 미끼를 물어 3당 합당을 진행한 것이 김영삼이었다는 점은 이런저런 의문을 남긴다. 당시 김영삼이 강원도 보궐선거 후보 매수 사건으로 정치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 내몰리지 않았다면, 김영삼이 노태우의 피를 수혈받아 제2의 켄타우로스가 되는 운명을 비껴갈 수 있었을까? 당시 김영삼이 노태우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면 그 후 김영삼은 정치인으로서의 행보를 이어갈 수 있었을까? 만일 당시에 궁지에 몰린 것이 김대중이었다면? 그랬다면 김대중은 노태우가 내민 떡밥을 향해 입을 내밀었을까?

 

p.253

박정희와 전두환 같은 '힘 만능주의' 신봉자들이 김대중을 두려워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다른 반대진영 정치인들은 현시로가 동떨어진 과격한 주장을 펼쳐 대중들의 신망을 잃는 일이 빈번했는데, 김대중은 그렇지 않았다. 김대중은 올바른 말을 하는 행위 자체에 중점을 두기보다, 그 말이 현실에서 어떤 파급력을 지닐지 면밀히 짚어보고 치밀하게 준비한 뒤에 말을 내놓았다. 그렇기에 다수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회고록에서 김대중은 이를 "중산층이 고개를 돌리면 어떤 투쟁도 성공할 수가 없다"고 표현하며 예시로 직선제 쟁취에 성공했던 6월 항쟁을 든다. 세상은 오직 강자가 휘드르는 힘에 의해서만 돌아간다고 믿는 독재자들에게, 시대정신을 꿰뚫어 보며 현실에 맞는 실용적이고 꼼꼼한 정책을 내놓는 김대중처럼 무서운 인물은 없었다. 

 

p.255-256

김대중의 정치 역정에서 과오로 기록될 만한 이들은 대부분 '1987년 단일화 실패' 이후에 일어났다. 앞서 언급한 전두환, 노태우 사면 건의, 외환위기 직전에 시급한 경제 관련 법안을 통과시켜 주지 않았던 일, 당선 전 정치 보복을 하지 않겠다던 당초 약속과는 달리 김영삼 정부의 안기부 인사들을 구속한 일, 당선 뒤 IMF에 대한 책임을 물어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경제수석 두 사람을 구속한 일 등은 대통령 선거에서 연이어 고배를 마신 김대중이 대중의 마음을 얻어 권좌에 앉기 위해, 권좌에 앉은 뒤에는 국가를 경영할 동력을 얻기 위해 벌인 일들이다. 김영삼과 단일화를 이루지 않았던 한 순간의 선택이, 이후 정치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그동안 비판해왔던 편법을 사용하도록 추동하는 강력한 불씨가 된 것이다. 

 

1997년 12월, 사수생으로 대통령에 도전하던 고령의 김대중에게 선거 판세는 녹록지 않게 돌아갔다. 당선 가능성이 있었지만 압도적이지 않았고, 당선된 후에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할 가능성도 낮았다. 더구나 두 명의 독재자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빨갱이' 이미지나 '독한 사람'이라는 평판, '전라도만 편애하는 지역주의자'라는 편견이 두터운 막으로 둘러싸 그의 운신의 폭을 좁혔다.

 

지역주의는 김대중이 아니라 독재자들이 조장했고, 김대중은 지역주의자가 아니라 지역주의에 타격을 입은 피해자였지만, 31년 동안 지속된 군부 세력의 언론 플레이와 정보 조작으로 상당수 국민이 김대중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지역주의자'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몇 개월을 기다렸다가 광주를 방문할 정도로, 김대중에게 씌워진 지역주의자 이미지는 강했다.

 

바로 이 '지역주의자 이미지'가, 김대중이 전두환 사면을 선택하게 만든 두 번째 요인이다. 오랜 기간 지역주의자라는 선입견에 시달려온 김대중에게 전두환을 사면하는 행위는 커다란 반전 상징이 될 수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정적을 용서하고 그 용서를 통해 지역 간 화합을 추구하는 정치인. 그에게는 오랜 기간 쌓여온 강성 이미지를 뒤집을 드라마틱한 장면이 절실했고, 전두환 사면은 그에 딱 맞는 구도를 제공할 것이었다.

 

p.258

김대중이 전두환 사면에 힘을 실어준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시스템과 법치가 아닌 지도자 개인의 심기를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였다. 또한 이후 후임자로 오는 대통령들에게 하나의 참고 사례가 되어, 그들이 전두환에 대한 단죄를 개인적 동기로 이용하거나 이용하지 않는 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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