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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

신경 끄기의 기술

by Diligejy 2018. 4. 17.

p.10

내 경험에 따르면 소위 '인생의 목적'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게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뭘 포기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거다.


p.11

모든 걸 가지려는 사람, 즉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모두 채우려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잃지 않는 인생을 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어떤 부족함도 용납하지 못하는 태도, 모든 걸 가져야 한다는 믿음이 인생을 '지옥의 무한궤도'에 빠지게 만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경 끄기의 기술'이다. 


p.12

삶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엄청난 고난들을 순탄하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천하무적이 될 수 있다. 단언컨대 고통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고통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p.21

자신만만한 사람은 자신감을 증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진짜 부자들은 굳이 돈을 자랑할 필요를 못 느낀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크게 신경 안 쓴다. 반면 늘 무언가를 꿈꾸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한 가지 현실을 끊임없이 신경 쓴다.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현실 말이다.


p.22

좋은 삶을 살려면, 더 많이 신경 쓸 게 아니라, 더 적게 신경 써야 한다.


p.24~25

우리에겐 신경 끄기가 필수다. 신경 끄기야말로 세상을 구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세상이 엉망진창이라는 것'과 '그래도 괜찮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면 세상은 여태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니까.


더러운 기분에 신경을 끄면, 지옥의 무한궤도를 끊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기분이 더럽군. 근데 그래서 어쩌라고?" 그러면 신기하게도 더는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자신을 미워하지 않게 된다.


p.26

더 긍정적인 경험을 하려는 욕망 자체가 부정적인 경험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부정적인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긍정적인 경험이다.


p.27

역효과 법칙을 '역효과' 법칙이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신경 끄기가 역방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긍정 추구가 부정적인 것이라면, 부정 추구는 긍정을 낳는다. 가령, 체육관에서 고통을 추구하면, 그 결과로 건강과 활력을 얻는다. 사업에 실패하면, 성공하기 위한 필수 요소를 알게 된다. 역설적이지만 불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감과 카리스마를 뽐낼 수 있다. 힘들더라도 바른말을 하면, 상대의 신뢰와 존중을 얻는다. 공포와 불안을 겪고 나면, 용기와 인내를 얻을 수 있다.


p.27

가치 있는 것을 얻으려면, 그에 따르는 부정적 경험을 극복해야 한다. 부정을 피하거나 막거나 억누르거나 입막음하려는 시도는 역풍을 불러올 뿐이다.


p.28~29

우리 삶을 결정하는 건 이런 무신경한 순간들이다. 새로운 직종에 뛰어들기. 어느 날 갑자기 대학을 그만두고 록밴드에 들어가기. 당신의 뒤를 캐다가 들킨 남자친구를 마침내 차버리기로 결심하기.


신경을 끈다는 건 삶에서 가장 무섭고 어려운 도전을 내려다보며 아무렇지 않게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p.31~32

우리 삶에는 어떤 진리가 숨어 있다. 사실은 신경 끄기 같은 건 없다는 진리 말이다. 우리는 뭔가에 신경을 써야만 한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늘 뭔가에 주의를 기울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연히 늘 신경을 쓰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무엇에 신경 쓸 것인가?


신경 쓸 대상으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근본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신경을 끄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p.32~33

우리가 "젠장, 조심해, 마크 맨슨이 신경 안 쓴다는데"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 말로 마크 맨슨이 '아무것에도 신경 쓰지 않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마크 맨슨이 '목표에 따르는 역경에 신경 쓰지 않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보기에 옳거나 중요하거나 고귀한 것을 하기 위해서라면, 누군가를 열 받게 하는 것쯤은 신경 쓰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마크 맨슨은 그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3인칭으로 서술하는 그런 남자다.


감탄스럽지 않나? 아니, 내가 아니라, 역경을 극복하는 것 말이다. 또 따돌림당하고 배척당할지라도 남들과 발맞추기를 거부하는 것, 자신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이 모든 것을 감수하는 것 말이다. 피할 수 없는 실패에 맞서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드는 의지, 역경, 실패, 수치, 또는 몇 번의 '폭망'에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 어떤 일이든 그저 웃어버리고 자신이 믿는 바를 행하는 사람들.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하는 사람들. 이들은 이것이 자신보다 중요하고, 자신의 느낌과 자존심과 자아보다 중요하다는 걸 안다. 인생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이 아닌, 중요하지 않은 모든 것을 향해 "꺼져"라고 말한다. 진짜로 중요한 것에 쓰기 위한 신경을 따로 남겨놓는다. 친구, 가족, 목표, 퇴근 후 마시는 맥주 한잔 그리고 혹시 모를 소송을 위해. 이렇게 중요한 것만을 위한 신경을 남겨 놓았기 때문에, 그것들에 신경을 쏟을 수 있다.


삶에는 또 다른 진리가 숨어 있다. 바로 사람들의 웃음거리나 골칫거리가 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꿀 만큼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럴 수가 없다. 왜냐면 우리에게 고난이 부족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없다. 옛말에 "네가 어디로 가든, 그곳에 네가 있다"라고 했다. 고난과 실패도 그렇다. 당신이 어디로 가든, 그곳에 200kg짜리 '똥 덩어리'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괜찮다. 중요한 건 똥 덩어리에서 도망치는 게 아니다. 당신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똥 덩어리를 찾는 게 중요하다.


p.34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신경이 쓰인다면, 이를테면 전남친의 페이스북에 새로 올라온 사진, TV 리모컨 건전지의 수명, 원플러스 원 행사를 연달아 놓쳐 손 세정제를 못 산 일에 너무 신경이 쓰인다면, 당신 인생에는 신경 쓸 가치가 있는 그럴듯한 일이 없는 거다. 이것이 진짜 문제다. 손세정제나 TV리모컨이 아니라.


p.36

기본적으로 우리는 '기꺼이 신경을 쓸 대상'을 좀 더 꼼꼼히 고르게 된다. 이게 바로 성숙이다. 가끔은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 사람은 진짜로 가치 있는 것에만 신경 쓰는 법을 배울 때 성숙해진다. 


p.38

"문제 없는 삶을 꿈꾸지마.

그런 건 없어.

그 대신 좋은 문제로 가득한 삶을 꿈꾸도록 해."


p.39

우리 삶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대부분 잘 하지 않는 질문들이 있다. '당신은 어떤 고통을 원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기꺼이 투쟁할 수 있는가.'


p.42

내 꿈은 거대한 산과 같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난 그 산을 오를 마음이 별로 없다는 것을. 그저 정상을 상상하는 걸 좋아했을 뿐이었다.


p.42

'무엇을 위해 투쟁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당신이라는 존재를 규정한다. 체육관에서의 투쟁을 즐기는 사람은 철인3종 경기를 뛰고, 탄탄한 복근을 가지고, 집채만 한 바벨도 들어올릴 수 있다. 야근과 사내정치를 즐기는 워커홀릭은 초고속 승진을 한다. 배고픈 예술가 생활에 따라오는 스트레스와 불안을 즐기는 사람은 결국 예술로 성공할 확률이 높다.


p.43

성공을 결정하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즐기고 싶은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는 똥 덩어리와 치욕이 널려 있다.


당신은 뭔가를 선택해야 한다. 고통 없이 살 수는 없다. 꽃길만 걸을 수도 없다. 쾌락에 관한 질문에 답하기는 쉬우며, 아마 모두가 비슷한 답을 내놓을 것이다. 더 흥미로운 질문은 바로 고통에 관한 것이다. 당신은 어떤 고통을 견디고 싶은가? 이는 무척 어렵고도 중요한 질문이며, 당신을 실제로 나아가게 해 주고 사고방식과 삶을 바꿔줄 수 있는 질문이다. 이 질문이 나를 나로, 당신을 당신으로 만든다. 이것이 우리를 규정하고 구분 지으며, 궁극적으로 우리를 하나로 묶어준다.


p.46~47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고통을 애써 밀어내려는, 온실 속 화초와 같은 사회는 위험하다. 그런 사회의 사람들은 유익한 고통을 통해 이익을 얻을 기회를 잃고, 그 결과로 현실감마저 잃는다. 영원한 행복과 끊임없는 연민으로 가득 찬, 문제라곤 전혀 없는 삶을 기대하며 몽상에 빠져 있는 이가 아직도 있는가? 꿈 깨라. 지구에서 '문제'가 사라질 일은 없다. 장난이 아니다. 문제에는 끝이 없다. 


p.69

실제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부정적인 부분을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래, 난 돈 문제에 무책임할 때가 있어." "그래, 난 내 성공을 과장할 때가 있어." "그래, 난 타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해. 자립심을 키워야겠어." 그리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행동한다. 그러나 허세꾼들은 자신의 문제를 솔직히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삶을 알차고 의미있는 방향으로 바로잡지 모한다. 끝없이 쾌락을 좇고 부정을 차곡차곡 쌓아 올릴 뿐이다.


p.80~81

지미 같은 인간이 자아도취에 빠진 꼴통이라는 건 대부분의 사람이 쉽게 알아챈다. 망상에 가까운 자만심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못나고 가치 없다고 여기는 사람도 실은 허세꾼이라는 건 잘 모른다. 세상만사를 다 끌어들여 자신을 피해자로 몰아가는 사고방식도 엄청나게 이기적인 태도다. '내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믿음과 마찬가지로, '내겐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믿음을 유지하는 데도 상당한 에너지와 망상에 가까운 자의식이 필요하다.


사실 '나 혼자만의 문제'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경험하는 문제를 수많은 사람이 과거에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고, 미래에도 겪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 또한 그럴 것이다. 당신에게 생긴 문제나 당신이 느끼는 고통을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다. 피해자 시늉도 때를 봐가며 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당신은 특별하지 않다.


p.82

충고하건대, 자신이 특별하다거나 남다르다는 생각을 버려라. 삶의 기준을 평범하고 일반적인 것으로 다시 정하라. 자신을 유망주나 재야의 천재로 보지 말라. 비참한 피해자나 형편없는 실패자로도 여기지 말라. 그보다 훨씬 평범한 정체성인 학생, 배우자, 친구, 창작자와 같은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라.


p.89

고통이 불가피하다면, 살아가면서 문제를 피할 수 없다면,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은 '고통을 어떻게 멈출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왜 고통받고 있는가', 즉 '무엇 때문에 고통받는가'다.


p.92

왜 형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지?

'가족이니까. 그리고 가족은 친해야 하니까!'

왜 그렇게 생각해?

'가족은 세상 그 누구보다 중요해야 하니까!'

왜 그렇게 생각해?

'가족은 가까운 게 '정상'이고 '건전'한 건데, 난 그렇지 못하니까.'


p.93

형제라고 해서 다 친한 건 아니며, 심지어 서로 사랑하는 형제도 친하지 않을 수 있고, 그래도 괜찮다.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당신이 처한 상황에 관한 객관적 사실보다, 당신이 그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가치와 기준으로 평가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문제가 생기는 건 필연적이겠지만, 문제의 의미는 필연적이지 않다. 문제의 의미는 우리가 어떤 사고방식과 평가기준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p.100

우리는 가치관에 따라 자신과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을 정한다. 오노다는 일본 제국에 대한 충성과 가치를 둔 덕에 루방에서 30년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가치 탓에 일본으로 돌아갈 때 비참함을 느꼈다. 메탈리카보다 잘나가야 한다는 기준은 머스테인이 록스타로 우뚝 서는 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이 기준이 결국 성공을 성공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 역시 문제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싶다면, 어디에 가치를 둘 것인지 그리고 어떤 기준으로 실패와 성공을 가를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p.103

쾌락은 가짜 신이다. 연구에 따르면, 얕은 쾌락에 에너지를 쏟는 사람이 불안과 감정 동요, 우울함을 더 많이 늒니다. 쾌락은 만족감 가운데 가장 얄팍한 형식이기에 그만큼 얻기도 쉽고 잃기도 쉽다. 그럼에도 쾌락은 연중무휴로 사고 팔리며, 우리는 쾌락에 꽂혀 멍하게 살아간다. 적절한 쾌락은 사는 데 필수적이지만, 쾌락에는 충분함이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쾌락은 행복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가치와 기준을 바로 세우면, 그 결과로 쾌락이 따라올 것이다.


p.107

프로이트는 말했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투쟁했던 나날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므로 쾌락, 물질적 성공, 나는 다 안다는 태도, 무한 긍정과 같은 가치는 삶의 이상으로 삼기에는 적절치 않다. 한 사람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쾌락, 성공, 지식, 긍정과는 거리가 멀다.


중요한 건 가치와 기준을 못 박아 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즐거움과 성공은 그 결과로 자연히 따라온다. 즐거움과 성공은 좋은 가치관의 부산물로, 그 자체로는 공허한 쾌락에 지나지 않는다.


p.109

진정한 의미의 '자기계발'이라는 건 곧 더 나은 가치를 우선하는 것이며 더 나은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더 나은 것에 신경을 써야 더 나은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은 문제를 다뤄야 삶이 나아진다.


그렇다면 좋은 가치와 나쁜 가치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좋은 가치는 

1 현실에 바탕을 두고 2 사회에 이로우며 3 직접 통제할 수 있다.


나쁜 가치는

1 미신적이고 2 사회에 해로우며 3 직접 통제할 수 없다.


p.115~116

쓰라린 기분을 느낄 것인가, 솟구치는 기운을 느낄 것인가. 둘 사이를 가르는 건, '이건 내 선택이니 내 책임이다'라는 마음가짐이다. 지금 비참함을 느끼고 있다면, 아마도 그건 현재 상황의 일부를 내가 통제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내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내 선택과는 무관하게 억지로 떠맡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문제는 내가 선택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에너지를 느낀다. 반면 내 의사와 상관없이 문제가 강요되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부당함과 비참함을 느낀다.


p.119

명심하라. 외부 환경이 어떠하건 간에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내 책임이다. 우리한테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전부 통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리고 거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언제나 우리 마음에 달려 있다.


p.120

좋든 싫든, 우리는 우리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에 언제나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언제나 매순간, 매 사건의 의미를 해석한다. 언제나 가치를 선택해 그에 따라 살아가며, 기준을 정해 그것으로 사건을 평가한다. 때로는 어떤 기준을 택하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이 좋은 것이 될 수도 나쁜 것이 될 수도 있다.


요점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우리는 언제나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인간은 어딘가에는 신경을 쓰게 되어 있다. 어떤 것에도 신경을 안 쓰는 것도 뭔가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선택에 관한 것이다. 무엇에 신경을 쓸 것인가? 어떤 가치에 따라 행동할 것인가? 어떤 기준으로 삶을 평가할 것인가? 그리고 좋은 가치와 좋은 기준을 선택했는가?


p.121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사실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나은 더 심오한 버전이 있는데, 명사 두 개만 맞바꾸면 된다. 내 문제는 내가 책임지겠다는 자세가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다.


전에 알던 한 남자는 자기가 여자를 못 만나는 이유가 키가 작아서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실 교양 있고, 재미있고, 잘생긴 일등 신랑감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자들이 키 작은 남자를 안 좋아한다고 확신했다. 스스로 키가 작다고 느낀 탓에 그는 여자를 만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몇 차례 만나도 봤지만 상대 여성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그녀가 자신을 매력 없는 남자로 생각한다는 증거로 받아들인 후, 자신을 싫어하는 거라고 결론 내렸다. 알고 보면 상대방이 자신에게 호감이 있을 때조차도. 그러니 그의 연애사는 당연히 엉망진창이었다.


그가 깨닫지 못한 건 자신을 괴롭히는 '키'라는 가치를 스스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그의 상상속에서 여성들은 오로지 키에만 매력을 느꼈다. 그러니 솟아날 구멍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 가치를 선택함으로써 삶의 주도권을 잃고 형편없는 문제에 시달리게 됐다.


p.122~123

많은 사람이 '내 문제는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기를 꺼리는 이유는, '내 책임이 곧 내 잘못'을 의미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책임과 잘못이 일반적으로 붙어 다니는 건 사실이지만, 둘은 같은 게 아니다. 가령 내가 당신 차를 들이받으면, 그건 내 잘못이고 동시에 난 법적으로 당신에게 보상할 책임이 있다. 설령 우발적 사고였다 해도 내 책임이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잘못이라는 개념은, 내가 사고를 쳤으면 내가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렇지만 내 잘못이 아닌데도 내가 책임져야 하는 문제들이 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아침 현관에 갓난아이가 놓여 있따면, 그 아이가 거기 있는 건 내 잘못이 아니지만, 이제 그 아이는 내 책임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 최종적으로 어떤 행동을 선택하든, 내 선택과 관련한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거기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나다.


p.123

우리는 항상 '경험'을 책임지며 살아간다. 그것이 '내 잘못'으로 생긴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것은 삶의 일부다.


책임과 잘못이라는 개념의 차이를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잘못은 과거 시제고, 책임은 현재 시제다. 잘못은 과거에 선택한 것의 결과이며, 책임은 지금 이 순간 선택하는 것들의 결과다.


p.123~124

자신의 처지를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 것과 자신의 상황에 실제로 책임을 지는 것은 다르다. 당신의 상황에 책임이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 자신이다. 당신의 불행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불행을 책임질 사람은 오로지 당신뿐이다. 왜냐면 살면서 맞닥뜨리는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응하고,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건 언제나 당신이기 때문이다. 경험을 평가할 기준을 선택하는 건 언제나 당신이다.


p.132

많은 사람이 자기가 선천적으로 불리하게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강박장애가 있건 키가 작건 뭐건 간에, 이들은 자기가 진짜 좋은 것은 얻지 못할 운명이라고 믿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으로 체념함으로써, 상황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다. 이들은 생각한다. "이런 형편없는 유전자를 선택한 건 내가 아니야. 그러니까 일이 잘못돼도 내 잘못은 아니라고."


그래 당신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당신 책임이다.


신경적 유전적 결함으로 인해 정신적 감정적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지만, 그래도 달라질 건 없다. 이들은 나쁜 패를 물려받았고, 그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키가 작은 거나 도둑질당한 게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역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 정신과 치료를 받든, 심리 치료를 받든, 아무것도 안 하든, 선택은 결국 자기 몫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학대당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겪는 문제와 장애는 이들 탓이 아니지만, 역시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한다. 문제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갈 책임과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할 책임은 언제나 자신에게 있다.


p.141~142

결정적인 '정답'을 구할 게 아니라, 오늘 틀린 점을 조금 깎아내 내일은 조금 덜 틀리고자 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성장은 상당히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우리가 받아들이는 가치가 가설이다. 즉 이런 행동은 좋고 중요하지만 저런 행동은 그렇지 않다는 판단이 가설이다. 그리고 우리는 행동으로 그것을 실험한다. 다시 말해, 그 가치에 따라 행동했을 때 나타나는 감정과 사고방식이 실험 자료가 되는 것이다.


정설이나 이념 따위는 없다. 경험을 통해 각자 옳은 것을 찾아갈 뿐이며, 경험을 통해 얻는 것조차도 어느 정도는 틀릴 것이다. 당신과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의 욕구, 개인사, 생활환경이 다 다르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내 답에는 몇 년 동안 혼자 이곳저곳 여행하기,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찾아 살아보기, 방귀를 뿡 끼고 껄껄 웃기가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내가 변화하고 발전하면 답도 변화하고 발전할 것이다. 난 나이가 들고 경험을 쌓는 과정에서 틀린 점을 조금씩 덜어내 매일 덜 틀린 사람으로 거듭날 것이다.


p.142~143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라리 호가신에 안주하기를 택한다. '난 매력이 없으니까 할 수 없어.' '상사가 어리석은데 어쩌겠어.' 이렇게 믿으면 당장은 어느 정도 위안을 얻을 수 있지만, 결국엔 그 대가로 더 큰 행복과 성공을 놓치게 된다.


길게 보면 이건 형편없는 전략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거기에 매달리는 건 자기 생각이 옳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난 이미 알고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즉 이야기의 결말을 확신하는 것이다.


확신은 성장의 적이다.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조차도 논쟁의 여지는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택하는 가치관이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점을 받아들여야만 성장할 수 있다.


확실성을 추구할 게 아니라, 끊임없이 의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자신의 느낌과 믿음을 의심해야 한다. 확신을 추구하는 자세를 버린 뒤, 스스로 미래를 일구지 않는다면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 질문해야 한다. 항상 내가 옳기만을 바랄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틀렸는지를 따져 봐야 한다. 우리는 항상 틀리기 때문이다.


틀리면 변화할 수 있다. 틀리면 성장할 수 있다.


p.152

"너 자신을 믿어",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해", 우리는 이런 달콤한 말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듣는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면 오히려 자신을 덜 믿어야 할 것 같다 자신의 마음이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더 많이 의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이란 항상 틀리기 마련이라면, 자신의 믿음과 가정을 꼼꼼히 따져가며 자신을 의심하는 것 외에 발전하기 위한 논리적인 방법이 달리 있겠는가?

p.158~159

우리가 자기도 모르게 '나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으려 하는건 이러한 불안과 깊은 절망의 순간이다. 이럴 때 우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난 사기를 좀 쳐도 된다고, 다른 사람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때로 폭력을 사용하더라도 난 원하는 걸 얻을 자격이 있다고 믿게 된다. 이 또한 역효과 법칙에 해당한다. 확신하려 하면 할수록, 더 불확실하고 불안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반대 역시 참이다. 즉 불확실성과 무지를 받아들일수록, 자기가 뭘 모른다는 사실을 더욱 개의치 않게 된다.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면 타인을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 TV나 사무실, 거리에서 누군가를 볼 때, 그에 대해 고정관념과 편견을 형성할 필요가 더는 없어진다. 또한 자신을 평가해야 할 필요도 사라진다. 우리는 자신이 사랑스러운지 아닌지 모른다. 얼마나 매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을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음을 열고 내가 그런 걸 잘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뒤 경험을 통해 알아가는 것이다.


불확실성은 모든 진보와 성장의 뿌리다. 옛말에 이르길, 모든 것을 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고 했다. 먼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무지를 인정할수록 배울 기회가 더 많아진다.


우리의 가치관은 불완전하다. 자신의 가치관이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위험천만한 독단적 사고방식에 빠져 허세를 부리고 책임을 회피하기 십상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먼저 여태까지의 행동과 믿음이 잘못되고 비효율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흔쾌히 받아들여야만 진정한 변화와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인생의 가치관과 우선순위를 검토하고 그걸 더 나은 것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그에 앞서 반드시 현재의 가치관을 의심해봐야 한다. 심혈을 기울여 현재의 가치관을 분석하고, 그 안에 있는 오류와 편견을 들춰내고, 그것이 어째서 세상과 조화되지 않는지 밝혀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무지를 똑바로 바라보고 그걸 인정해야 한다. 왜냐면 우리의 무지가 우리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p.161~162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간다. 우리는 그걸 지키고 정당화하고 고집하며 살아간다. 일부러 그러지 않더라도 우리 뇌가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앞서 말했듯이, 불합리하게도 우리는 기존 지식과 믿음에 크게 좌우된다. 자기가 착하다고 믿는 사람은 그 믿음과 모순되는 상황을 피하게 된다. 자기가 요리를 잘한다고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할 기회를 자꾸만 찾게 된다. 우위를 점하는 건 언제나 믿음이다. 먼저 자신을 보는 관점과 자신에 대한 믿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회피와 불안을 극복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변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자아를 찾아라'와 같은 말을 따르는 건 위험하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스스로를 특정한 역할이나 쓸데없는 기대에 옮아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잠재력과 기회를 자기 발로 차버릴 수도 있다. 너 자신을 절대 알지 말라. 그래야 끊임없이 노력해 깨달음을 얻게 되며, 자신의 판단을 과신하지 않고 타인의 생각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


p.163~164

명심하라.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건,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게 있다는 뜻이다. 당신이 날이면 날마다 거기에 시무룩하게 앉아 있다면, 그건 당신이 이미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 스스로 알아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p.174

대부분의 사람이 어느 시점이 되면 실패를 두려워하게 된다.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실패를 피하고 눈앞에 있는 것이나 이미 익숙한 것만을 고수한다. 이런 태도는 우리를 제한하고 억압한다. 어떤 분야에서 진짜로 성공하려면, 실패를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실패하지 않겠다는 건 성공하지 않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p.184

행동은 동기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어느 정도 동기가 부여될 경우에만 행동에 전념한다. 그리고 충분한 정신적 자극이 주어질 경우에만 동기를 부여받는다. 우리는 이런 단계가 일종의 연쇄반응을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정신적 자극-> 동기 -> 바람직한 행동


뭔가를 성취하고 싶은데 동기나 자극이 없을 때, 우리는 그냥 망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 버린다. 먼저 마음속에서 불꽃이 일어야만 실제로 소파에서 일어나 뭔가를 할 동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의 3단계 반응이 그대로 끝나는 게 아니라 무한히 반복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자극 -> 동기 -> 행동 -> 자극 -> 동기 -> 행동 -> 무한 반복


행동이 정신적 반응과 자극을 일으키고 뒤이어 다른 행동의 동기가 된다. 이 지식을 활용해 사고방식을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다.


행동 -> 자극 -> 동기


p.192~193

자유는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 기회를 주지만, 그 자체로 반드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의미 있고 중요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은 수많은 선택지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즉 자유의 범위를 좁히는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를 선택해 몰입해야 한다. 하나의 장소, 하나의 믿음, 하나의 사람을 말이다.


p.197~198

뭔가에 가치를 두려면, 우리는 뭔가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리고 뭔가에 가치를 두려면, 그 외의 것을 거부해야 한다. 즉 X에 가치를 두려면, X가 아닌 것을 거부해야 한다. 거부는 가치관과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무엇을 거부하느냐가 우리를 규정한다. 


(거부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는다면, 아예 정체성 자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부와 대립, 갈등을 피하려는 욕구, 모든 걸 동등하게 여기고 모든 걸 조화롭게 만들려는 욕구는 교묘하고 심각한 형태의 허세다. 


p.200~201

문제는 낭만적 사랑이 정말로 마약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아주 소름끼치게 비슷하다. 마약이 자극하는 두뇌 부위를 자극하고, 일시적으로 쾌락과 즐거움을 선사하지만,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그만큼의 문제를 새로 만들어낸다. 


우리가 죽고 못 사는 낭만적 사랑을 구성하는 요소들, 그러니까 극적이고 현기증 나는 애정 표현이나 롤러코스터를 타는 감정의 기복은 건전하고 진실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다. 사실상, 그건 관계를 통해 허세를 표출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맥 빠지는 소리라는 건 나도 안다. 그렇지만 사실 까놓고 얘기하면, 진짜로 낭만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 진정하고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라.


세상에는 건전한 사랑이 있고, 불건전한 사랑이 있다. 불건전한 사랑을 하는 이들은 감정을 통해 서로 자신의 문제에서 벗어나려 한다. 다시 말해, 상대를 탈출구로 여긴다. 건전한 사랑을 하는 이들은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고 처리하며 서로 격려한다. 건전한 관계와 불건전한 관계의 차이는 2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각자가 책임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는가. 


둘째, 각자가 기꺼이 상대를 거절하고 상대로부터 거절당할 수 있는가. 불건전하거나 치명적인 관계를 맺는 이들은 하나같이 책임감이 희박하며, 거절을 하지도 받아들지도 못한다. 건전하고 다정한 관계를 맺는 이들은 각자와 각자의 가치관에 명확한 경계를 두며, 필요하다면 서로 거절하고 거절을 받아들인다.


여기서 '경계'란, 두 사람이 각자의 문제에 대한 책임에 딱 부러지게 선을 긋는 걸 일컫는다. 이런 경계를 명확히 하는 건전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과 문제만 책임질 뿐, 상대의 가치관과 문제는 책임지지 않는다. 반면에 이런 경계가 흐릿하거나 아예 없는 치명적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문제에 대한 책임은 회피한 채 오히려 상대의 문제를 책임지려 한다.


p.204

피해자가 구원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건 내 문제야. 직접 해결할 테니 옆에서 응원해줘." 자기 문제를 스스로 책임지고 상대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게 진정한 사랑이다.


구원자가 피해자를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네 문제를 남 탓으로 돌리지 마. 네 문제는 네가 책임져야 해."삐딱하게 들리겠지만, 이처럼 자기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도록 돕는 게 진짜 사랑이다.


p.206

자신에게 물어보라. "내가 거절하면, 우리 관계가 어떻게 될까?" "내 애인이 내가 원하는 걸 거절하면, 우리 관계가 어떻게 될까?"


거절하면 난리가 나서 접시가 날아다닐 거라는 답이 나오면, 관계가 틀려먹었다는 뜻이다. 그건 당신 관계가 조건 없이 상대와 (상대의 문제를) 받아들이는 관계가 아니라, 상대로부터 얻는 피상적인 이익에 기초한 조건적인 관계임을 암시한다.


p.220~221

어떤 것도 해야 할 이유가 없다면, 어떤 것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다. 어차피 언젠가 죽을 거라면 두려움이나 민망함, 수치심 따위에 굴복할 이유가 없다. 이것들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 짧은 인생 대부분을 고통과 불편함을 피하는 데 써버린 나는 사실상 삶을 피해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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