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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국소설

김영하 퀴즈쇼 (2)

by Diligejy 2015. 11. 10.

p.110~111

존경하는 찰스 다윈 선생님. 말해주세요. 저는 이 세계의 적자일까요? 아무래도 아닌 것만 같거든요. 각 개체는 자기가 이 세계의 적자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나요? 그냥 겪으면 알게 되나요? 그냥 겪어보고, "이런, 나는 이 세계의 강자도 아니고 적자도 아니었잖아? 그럼 여러분, 이만 안녕!" 이러면서 퇴장하면 되는건가요? 그건 너무 비정하잖아요. 인생은 한 번뿐인데,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건가요? 인생이라는 게 패자부활전도 없는 그런 잔혹한,

만인 대 만인이 투쟁하는 냉정한 게임인가요?

 

다윈은 말이 없었다. 나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형광등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형광등에게라도 묻고 싶었다. 형광등아, 조명의 세계에서 다른 모든 조명들을

이기고 살아남은 국민조명 형광등아. 별로 분위기도 안 나고 켜는 데도 오래 걸리고 툭하면 스타터가 나가는, 그러나 전기료가 싸게 먹히고 수명이 긴, 그래서 살아남은 조명계의 우세종아. 내가 이 세계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니?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 말 같은 말을 하고, 집 같은 집에서 잠들고, 밥 같은 밥을 먹으며 사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니?

 

p.116~117

세상에는 되물을 것들투성이였다. 어떤 세계에 들어가 그 일원이 된다는 것은 곧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게 된다는 뜻이었고, 무슨 말을 들어도 다시 되묻지 않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체로는 몰라서 되묻지만 알면서 되물을 때도 있다. 그것은 힘없는 어린 남자가

세상에 맞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사보타주였다.

 

p.129~130

만약 당신이 한 인간을 서서히 파멸시키고 싶다면 그런 눈빛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상대가 자기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눈빛이며, 앞으로 그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절대로 믿지 않는 눈빛이며, 혹시 그런 존재가 되더라도 적어도 자신만큼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하는 눈빛이다. 만약 그런 눈빛을 가진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가 있다면 그 삶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그런 눈빛을 가진 교사 밑에서 배우는 아이라면 자신감이라는 감정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것은 경멸과는 또 다른 것이다. 그것은 경멸에 들어가는 에너지조차 아까워하는, 얕은 수준의 감정이었다. 그것은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고,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기고, 필요하면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을 때나 생겨나는 종류의 감정일 것이다.

 

p.191

인생의 어떤 특별한 순간에는 비유가 현실이 된다.

 

p.261

감각을 날카롭게 벼리고 촉수를 곤두세워 자기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해. 그리고 온몸으로 느껴야 돼. 느끼지 못하는 순간, 인간은 벌써 죽은 거야.

죽어버리는 거야.

 

p.262~263

분노는 아주 신성한 거야.

빈정대거나 비아냥거리는, 그런게 아니야. 자기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힘, 폭력 같은 것에 맞서 싸우려는 숭고한 정신이란 말이야.

 

p.285

인간은 운명과 맞서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운명과 대결하는 것을 보고 싶어합니다. 운명이 잔인하게 누군가에게 등을 돌리는 것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응원하는 사람에게 운명의 신이 미소지어주기를 기다립니다.

 

p.330

잘 될 거야. 다 잘 될 거야. 넌 늘 자신을 비하하지만 그럴 필요 없어. 이제 겨우 시작이잖아. 이제 겨우 인생의 삼분의 일 지점을 지나왔을 뿐이야.

 

내가 네 편이 되줄게.

 

p.509

민수야, 난 이해할 수 있어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니까 이해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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