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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옥스퍼드 세계사

by Diligejy 2022. 4. 23.

p.10~11

폴 세잔은 정물화를 그릴 때 시점을 바꾸면서 인식하는 찰나의 지각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연결하려 했다. 그는 사과가 담긴 그릇 테두리의 곡선들이 마치 서로 만나지 않는 것처럼 그렸다. 그리고 시각에 따라 과일의 모양이 달리 보이는 방식을 포착하고자 멜론을 이상하게 부푼 형태로 그렸다. 이런저런 물체들을 모아놓은 세잔의 그림에서 각 대상은 저마다 고유한 시각을 나타낸다. 그는 같은 주제를 그리고 또 그렸는데, 새로 바라볼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면을 보았고 작품을 회고할 때마다 시각의 명백한 미비점이 불만스러웠기 때문이다.

 

과거는 세잔의 그림과 비슷하다. 또는 한 가지 시각으로는 그 실상을 드러낼 수 없는 원형 조각상과 비슷하다. 객관적 현실은 저기 어딘가에, 찾기 어려운 먼 곳에 있다. 있음직한 주관적 시각들을 모두 아우르지 않고는 그곳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관점을 바꿀 때 우리는 새로운 면을 흘끗 보고서 캔버스로 돌아와 기존 그림에 그것을 끼워 맞추려 한다. 바꾸어 말하면, 클레이오는 우리가 나뭇잎 사이로 목욕하는 모습을 엿보는 여신이다. 우리가 새로운 관점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실상이 조금씩 더 드러나는 것이다.

 

일상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다중 시점의 이점을 알고 있다. '나의 방식으로 보려 해봐. 너의 방식으로 보려 해봐'라고 비틀스는 노래했다. 범죄를 재구성하려면 주인공의 시각과 피해자의 시각을 통합해야 한다. 어슴푸레한 사건을 재현하려면 여러 증인의 증언이 필요하다. 사회 전체를 이해하려면 권력과 부의 수준에 따라 삶이 제각기 어떠한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문화를 이해하려면 그 문화를 맥락에 집어넣고 이웃 문화들이 그 문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거나 생각했는지 알아야 한다. 알맹이를 붙잡으려면 껍질을 벗겨야 한다. 그러나 과거는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바라보는 최선의 방법은 과거에 맥락을 더하는 것이다. 과녁의 중심에 원을 둘러서 표적을 더 분명하게 표시하고 시선을 잡아끄는 것과 같은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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