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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다정한 무관심

by Diligejy 2022. 6. 12.

p.8~9

나는 개인주의에 대한 사회 일반의 경계와 거부감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집단주의에 물들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징표라고 생각한다. 사회 전반적으로 단체와 집단주의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개인을 개인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스스로를 개인주의자라 표방하는 사람들 또한 개인주의의 개념을 정확히 아는 경우가 드물다. 그 결과가 바로 개인주의가 이기주의와 자주 혼용되는 지금의 상황인 것이다.

 

p.10~11

나는 한 사람의 행위에 대한 상벌이 그가 속한 집단에게 공동으로 부여되는 것에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 그것이 국가, 성별, 인종, 가족, 학교와 같은 '반강제적' 집단일 경우 더더욱 그러하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저지른 잘못으로 그의 부모나 자식이 함께 비난을 들어야 마땅한가? 범죄자의 자식은 범죄자와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나? 재미동포가 저지른 범죄는 한국인 전체의 잘못인가? 아시아인이 저지른 과오는 아시아인 모두의 공동책임인가?

 

물론 누군가의 과오를 그가 속한 집단 전체의 잘못으로 확대하여 해석하는 것, 그에 대한 책임을 집단 전체에게 추궁하는 것은 매우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며, 과거부터 지금까지 빈번하게 반복되어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언제나 표적을 필요로 하며, '집단'은 복잡하고 다단한 세상을 이해하기 쉽도록 압축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보편적이며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하여 옳으냐고 묻는다면 결단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인류에게 일어났던 수많은 비극은 대개 어떤 혐오의 감정이나 개인의 잘못을 특정 집단에게 덧씌우려 해서 일어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p.13

얼마 전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시대에 성별 갈등이 심해서 큰일이라고. 역시 페미니즘이 문제라고. 인터넷에 득실거리는 흥분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해악을 좀 보라고. 글쎄, 그것이 과연 페미니즘 때문일까? 페미니즘만의 문제일까? 오히려 시대의 문제를 '페미니즘' 때문이라고 너무 단순하게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닐까? 어떠한 이념 안에서 극단적으로 변한 개인을 찾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단 페미니즘뿐만이 아니라 지역, 인종 등 온갖 지표를 둘러싼 모든 갈등 안에 '광신적인' 움직임이 있다. 이 세상 모든 남성에게는 원죄가 있다고 주장하는 극렬 페미니스트의 발언이 문제라면, 지금의 모든 갈등이 페미니즘 때문에 일어난다는 주장 역시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p.28~29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무작정 공주 이야기만 보여주고 공주풍 의상만 권하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하지 않겠지만,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여자아이에게 공주 이야기와 공주풍 의상을 무조건 금지하는 것 또한 어딘가 이상하다. 아이 입장에서는 공주풍 옷이 그냥 마음에 들어서 입고 싶을 수도 있는데, 공주가 등장하는 이야기에 재미를 느끼고 취향에 맞아서 찾는 것일 수도 있는데, 어쩌면 남자아이가 공주 영상을 보겠다고 하거나 공주 의상을 입겠다고 할 때 '그건 남자답지 못해서 안 돼!'라고 제약을 가하는 것과, 여자아이가 같은 주장을 할 때 '그건 지나치게 여성성을 강조하는 거라서 안 돼!'라고 제한을 두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일지도 모른다. 성별 고정관념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것과, 그것을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것 모두 성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점에서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p.30~31

무엇이 여성성을 상징하는지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성별 고정관념에 대한 집착과 그것을 의도치 않게 강화하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여성주의에서 탈코르셋을 응원하고 권장하는 이유는 그것이 여성들에게 다양한 선택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여성은 무조건 어때야 한다'는 획일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여성이 진정한 자신의 취향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일부 극단적 여성운동을 하는 이들이 '탈코르셋'을 하지 않은 이들을 비난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 '탈코르셋'은 어디까지나 여성 개개인이 사회적 압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해방감을 맛보는데 의의가 있을 뿐, '여성적인'것으로 상징되는 기표를 전면 부정하고 없애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획일화를 거부하고자 시작된 운동이 또 다른 획일화의 강요로 이어지는 것은 곤란하다. '긴 생머리'에 대한 강요에 저항하기 위해 거꾸로 '짧은 머리'를 강요하는 것은 올바른 해답이 될 수 없다.

 

같은 선상에서 아이가 선물받은 어린이용 화장품을 '코르셋'에 대한 걱정 때문에 처분한 트위터리안의 행위에 나는 찬성할 수 없다. 비록 그러한 행위를 하게 된 배경과 목적, 우려에는 십분 공감함에도 말이다. 어쩌면 화장품을 무작정 버리기 전에 아이에게 이야기하고 선택할 기회를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린이용 화장품을 써보고 싶으면 써도 된다고. 다만 화장과 여성 사이에는 사회적으로 이러한 관계가 있다고. 때로는 화장품이 여성에게 즐거움이 될 때도 있지만, 어떤 압력과 굴레가 될 떄도 있다고.

 

p.35~36

모두가 여성으로 구성된 여대에서는 타인을 판단하는 잣대 중 성별이라는 기준이 아예 사라져버린다. 살면서 무수히 경험하고 들었던 "여자가 어떻게", "여자라서" 혹은 "여자니까"의 이유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여성들은 자연스레 스스로의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된다. 한계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자유로운 사고를 하게 된다. 마치 <어둠의 왼손>에 등장하는 게센인들과도 같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같은 선상에서 여대는 여성들 스스로가 가진 다양한 층위를 깨닫게 하는 역할도 할 수 있다. 흔히 성차가 사라지면 사회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실제로는 '여성'이라는 장막을 한꺼풀 걷어낸 뒤에도 경제적으로, 신체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여전히 다양한 차별이 남는다. 그러므로 이런 세계를 경험한 여성들은 개인의 정체성이 매우 복합적인 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자신이 상대적으로 약자일 수는 있으나 언제나 그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p.38

트렌스젠더 여성의 입학에 대해 누구보다도 강력한 의견을 표출했던 단체들은 여성은 오로지 여성이기 때문에 핍박을 받고 목숨을 잃고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 왔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상 여성은 피해자뿐만이 아니라 가해자도 얼마든지 될 수 있다. 위와 같이, 여성을 보호하겠다는 이유로 트렌스젠더 여성을 공격하고 비난하여 결국 쫓아내고 만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젠더와 성차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에서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 젠더와 성차에 집착하며 약자에 대한 혐오를 휘두르고 있었다. 물론 여성도 인간이며, 인간인 이상 누구든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으므로 그 자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대는 '그러라고'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p.47~48

그날 나이를 알아야 친구인지 아닌지 안다고 대답하는 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친구가 되기 위해 나이가 아주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설사 나이가 같지 않더라도 서로 동등하기만 하다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물론 궁금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상대의 나이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그러고 보니 나의 경우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나이를 물어보지 않은 지 한참 되었다. 물론 상대가 물어보면 대답을 해주지만 그뿐이다. 자연히 말을 놓는 경우 또한 거의 사라졌다. 간혹 나보다 어린 상대가 내 나이를 듣고 말을 편하게 하라고 권하면 사양한다. 나보다 나이 많은 이에게도 말씀 편하게 하시라고 선뜻 먼저 권하지 않는다. 서로 동등하지 않은 언어로는 동등한 입장에 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등한 입장에 서지 않으면 상호 존중하는 관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다면 영 서먹서먹한 상태로 남아 있지 않겠냐고, 차라리 둘 다 반말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되물을 수 있겠지만, 역시나 가능한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때로 무작정 반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나 역시 반말을 같이 사용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좀 이상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약간의 불편한 관계에서 오히려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약간 불편하면서 평등한 관계.

 

p.49

평등하고 느슨하며 적당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관계, 달리 말하면 상호 존대하는,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주 선 관계를 나는 가장 좋아한다. 역설적이게도 적당한 거리감이 느껴질 때 가장 진실된 나로서 그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것 같다. 무언가를 부탁하면서도 거절에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거꾸로 말하면 그만큼 부담없이 내 의사를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서로의 처지와 감정과 상황에 따라 때로는 가까워지기도, 그러다가 멀어지기도, 다시 가까워지기도 하며 느슨하면서도 단단한 교류를 길게 이어가는 관계. 물론 세상 모든 일을 내 뜻대로 하고 살 수는 없으므로 모든 관계가 늘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지만, 되도록 그러고자 노력하며 살고 있다.

 

p.57

이와 같은 말, 그러니까 "브라를 하고 다니든 말든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나랑은 상관없지만 적어도 나는 그 사실을 모르게 하라"는 이야기는 얼핏 상대의 자유 의사와 개성을 인정하는 관대한 태도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을 굉장히 무리한 요청이다. 알다시피 브라의 불편함은 '안 하면 티가 난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안 하면 티가 나는데 안 해도 좋으니까 티는 내지 말라니, 아니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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