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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고르고 고른 말

by Diligejy 2022. 3. 14.

 

p.282

나는 온갖 곳에 '약간'을 붙여대고 있었다. "이 카피는 약간 도발적인 부분이 있죠." "저는 그 때 약간 번아웃이 왔던 것 같아요." "요즘 이런 게 약간 유행인 느낌?" 왜 이렇게 '약간'을 많이 쓰지? 궁리하다 깨달은 것은 내가 유보적인 태도나 중립적인 위치를 지키고 싶을 때 저 말을 많이 쓴다는 사실이었다. '이 카피는 도발적이죠'보다 '이 카피는 약간 도발적인 부분이 있죠'가 빠져나갈 여지가 많지 않은가. 주관을 뽐내기보다 애매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 상대적으로 안전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창작하는 사람은 일정 기간 동안 '센스'로 표현되는 섬세한 감각이나 예리한 통찰로 먹고살 수 있지만, 나이가 들수록 '입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세계관이나 철학, 자신만의 주관을 갖고 '약간'을 약간씩 덜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p.284

한 지인은 술에 취하면 '옳지, 옳지'를 즐겨 썼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껄껄 웃었다. 함께 취해가는 중이라 그랬는지도 모른다. "한 병 더 시킬까?" "옳지, 시켜야지." "어머, 옆 테이블 술 취해서 춤춘다!" "옳지, 옳지! 잘한다!"

 

누가 무슨 의견을 내도 '옳지'라고 말하고 누군가 무슨 행동을 해도 '옳지, 옳지'라고 말하는 무한 긍정의 태도, 그것은 '아니, 그게 아니라'의 정반대에 있는 언어일지 모른다.

 

이 즐거운 언어 습관을 보며, 차마 따라할 엄두는 나지 않지만(어르신이나 회사 동료에게 '옳지, 옳지'하기란 힘든 일이므로) 나 역시 타인의 의견에 뒤이어 내 의견을 말할 적에 우리의 입장이 같다면 '옳지'에 가깝게 운을 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보다는 '그렇죠, 제가 보기에도'나 '맞네, 내 생각에도'라고 말하는 쪽이 낫겠다고. 혹여 상대에게 반대하는 말을 하더라도 '네, 그 말도 일리가 있지만'이라고 운을 떼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이다.

 

반복적으로 쓰는 말은 그 사람만의 말머리가 되어 이미지를 만든다. 나는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옳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p.296

배려야말로 진정한 능력이다. 처해진 상황을 정확히 읽고 나뿐 아니라 남의 마음까지 헤아려 수많은 경우의 수를 더듬은 끝에 피아를 위한 최선의 판단을 하는 것이야말로 고등한 행동이다. 그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다른 사람을 물건으로 다루는 건 응석이나 생떼에 지나지 않는다. 다들 그걸 못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다. 빌런이 아닌 대부분의 시민은 다른 쪽에 힘을 기울인다. 타인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며 사회가 정해둔 범위 안에서 움직인다. 거기에는 인지력과 절제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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