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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by Diligejy 2021.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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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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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

기본적으로 인간의 수명이 과거에 비해 놀라울 만큼 늘어났다. 의사로서 참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지연된 죽음과 늘어난 삶의 시간들을 지켜보며 좀처럼 한 가지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이렇게 삶의 시간은 더 주어지는데 이 늘어난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쓰고 있을까? 인생에 주어진 시간을 잘 사용하고 있는 걸까?

 

p.7

한동일 선생의 저서 <라틴어 수업>에 언급되는 라틴어 명구 중에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Hodie Mihi, Cras Tibi)"라는 말이 있다. 오늘 누군가의 죽음은 내일의 내가 닿을 시간이고, 어떤 죽음들을 분명히 아직 남아 있는 이들에게 뭔가를 이야기한다.

 

p.24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평온하게 떠났을지, 가족들의 외면 속에서 쓸쓸히 떠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켜봐왔던 그의 삶을 생각해보면 후자였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죽은 뒤에 혹시라도 그를 다시 만난다면 꼭 묻고 싶어졌다.

 

"당신은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열심히 살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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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5~56

암에 걸리는 것은 허허벌판을 지나다 예고 없이 쏟아 붓는 지독한 폭우를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 우산도 없고 피할 곳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고스란히 쏟아지는 비를 맞는 것뿐이다. 그러나 가만히 서 있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움직이는 체온만 떨어지고 그런 채로 죽어간다면 '뭐든 해볼 걸 그랬나?' 하고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어차피 맞을 비라면 맞으면서 걸어가는 것이 낫다. 물론 걷다가 돌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가시덤불에 긁힐 수도 있다. 그러나 비를 피할 만한 장소를 마주칠지도 모른다. 혹은 비를 가려줄 뭔가를 발견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갑자기 내린 비와 그 길에서 부딪치는 모든 것들을 여정의 일부로 받아들이면 내공이라는 게 생긴다.

 

삶에서 고난은 불가피하다고 부처는 말했다. 그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암도 마찬가지다. 암에 걸린 뒤에 부딪치게 되는 어려움들은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다. 하나를 피하면 결국 둘, 셋이 되어 돌아오는 것까지도 지독하게 인생을 닮았다. 그러니 고통이나 힘든 일이 없기를 바라기보다 마땅히 있을 것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암 진단을 받아도 눈앞에 놓인 상황을 회피하지 않는다. 현실을 직시하고 힘든 항암치료여도 필요하다면 기꺼이 받는다. 치료 과정에서 겪게 될 고통도 감수한다. 그리고 그 지난한 과정을 견뎌내면서 생명 연장과 증상 완화라는 결과를 얻어낸다.

 

p.62~63

평범하고 건강한 사람도 자신이 뭘 원하는지, 무엇에 기쁘고 슬픈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잘 모르고 산다. 게다가 죽음을 코앞에 둔 노년의 환자가 자신의 상황에 절망하는 대신 이성적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꾸려갈지를 계획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모든 점을 생각해본다 하더라도 남은 날을 '더 살고 싶다'는 바람만 되뇌며 보내기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하며 사는 건 의외로 쉽지 않다. 사회에 발들이고 나면 먹고사는 일에 힘쓰느라, 눈앞의 현실에 치여서 스스로에 대해 물을 여력이 없다. 물어서 답을 안다고 한들 훌훌 털고 내 멋대로 살 수도 없는 일이다. 당장 오늘 뭘 먹을지, 뭘 할지 고민하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러나 어쨌든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기 마련이고,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면 그 같은 태도가 습관이 되어버린다. 습관은 관성이라는 가속도를 얹고 삶의 내용과 방향을 바꿔버리기도 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옛말이 그저 옛말이 아님을 살면 살수록 깨닫는다.

 

p.64

"자, 당신의 남은 날은 ~~입니다. 이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시겠습니까?"

 

물론 이 문제를 다 풀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빈 칸으로 남겨두기에는 아쉬운 일이다.

 

p.92~93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인데 죽은 사람이 귀신처럼 다니는 거다 생각하니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더라고요. 예전에는 택시를 몰다가 갑자기 끼어드는 사람을 보면 지랄지랄 욕을 한 바가지 했었는데, 요즘에는 그냥 그러려니 내버려둬요. 갑자기 껴들든 말든 그래봐야 한 5분 지나면 어차피 잊어버리고 신경도 안 쓰게 되거든요.

 

택시 몰면서도 매일 소풍 나오는 것 같아요. 날씨 좋은 날은 손님이 없어도 그냥 드라이브 여행 다닌다고 생각해요. 손님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혼자 드라이브 다니는 거고, 그러다가 배고프면 기사 식당 맛있는 데 찾아가서 밥 먹고요.

 

p.117

아버지라는 보호막 없이 홀로 선다는 것은 내게 그런 일이었다.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하고 눈이 오면 눈을 맞아야 한다. 남들은 비 같은 것 맞지 않고 잘만 사는데 왜 나만 비를 맞아야 하느냐고 불평을 늘어놓는 것조차 사치다. 생존의 문제가 걸리면 그런 것은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비를 맞으면서도 비가 그치고 나면 해야 할 일들을, 눈앞의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하는가, 같은 것들을 머릿속으로 곱씹어야 한다. 아버지라는 그늘 아래에 머물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던 나이에 정신 차리고 보니 순식간에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내 잘못은 아니었으나 온전히 내가 견뎌내야 하는 내 몫이었다.

 

p.128~129

나와 만난 젊은 환자들이 암을 극복한 뒤에 살아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성직자의 길로 들어선 친구도 있고, 눈을 돌려 해외에 있는 기업에 취직한 친구도 있다. 운 좋게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는 경우도 더러 있고 일찌감치 자영업을 모색하는 친구들도 있다. 대개는 부모의 지원이 가능한 경우였다. 그러나 가장 많은 경우 여전히 백수이거나 혹은 취준생으로 지내고 있다. 그들 가까이에서 지켜본 현실은 훨씬 비정했다. 취업을 위한 소견서에 암은 이제 깨끗이 완치가 되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써 주지만, 그 다음 외래에 찾아와 다시 소견서를 부탁하는 걸 보면 취직의 문턱은 여전히 높은 것 같았다.

 

의사로서 말하지만 그들은 단지 암을 겪었을 뿐이다. 심지어 그 젊은 친구들이 엄청 큰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아니다. 덜 평범하게 살아도 좋으니 그저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살아보곘다는 정도이다. 그저 생계를 위해 취직하는 일조차 암환자였기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이, 그 문턱을 넘기 어렵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사회가 젊은 암 생존자에게 최소한의 꿈과 희망도 제시해줄 수 없는 걸까? '노오력'하면 된다거나, 공무원이 최고라는 식의 말들은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나 역시 내 젊은 환자들에게 완치 이후의 삶에 대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의사 이전에 이 사회의 어른으로서 제시해줄 수 있는 비전이 없기에 때때로 미안해진다. 우리 사회가 힘겹게 죽을 고비를 넘긴 젊은이들에게 절망이 아닌 뭔가를 보여줄 수는 없는 걸까?

 

암 생존자가 160만 명이 넘어섰다. 이 중 상당수는 젊은이들이다.

 

p.134~135

대부분의 사람들이 긍정을 늘 조건으로 삼는다. 좋은 직장을 구하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부자가 되려면 긍정적이어야 한다라는 식이다. 물론 긍정적인 사고는 중요하다. 매사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보다 밝고 긍정적으로 임하는 것이 살아가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암에 걸렸다고 해서 우울해하기만 하는 것보다야 밝게 지내는 것이 환자 자신에게도 훨씬 좋다. 암 진행 상황이 아무리 나쁘다고 하더라도 희망, 인내, 용기를 잃지 않게 되기 때문이고, 삶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결과에 대한 긍정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과정과 태도에 대한 긍정이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내가 잘해낼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그 자체가 긍정이어야 한다. 이점을 오해하면 결과에 대한 기대가 과도하게 커져 크게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좋은 결과를 보장해주면 내가 열심히 치료받겠다는 조건부 긍정이 되기도 한다.

 

요구르트 아저씨를 볼 때마다 진정한 긍정은 결과물이 아니라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며 천천히 스며드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태도 안에 있는 것임을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나의 요구르트 아저씨에게서 진짜 긍정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있다.

 

p.162~163

항암치료나 진통제 처방에 대한 부분도 다르지 않다. 항암주사를 놓는 사람이기는 해도 내가 항암주사를 맞아본 적은 없다. 당연히 항암제를 맞으면 어떤 느낌이고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지 직접 경험해 볼 수 없다. 암성통증이 심한 환자들은 마약성 진통제를 피할 수 없고, 나는 환자들에게 아프면 참지 말고 진통제를 아끼지 말고 먹으라고 처방하지만 정작 나는 암성통증을 겪어보지 않았고 마약성 진통제를 먹어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환자들의 고통을 겪어보겠다며 마약성 진통제를 내 몸에 투여하면 나는 곧장 마약류관리법 위반으로 잡혀갈 것이다. 결국 내가 인지하는 항암제 부작용이나 암성통증, 마약성 진통제 후유증 같은 것들도 환자들의 말과 책으로 얻어진 간접경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를 치료해야 하기에 암을 겪어본 적도 독한 항암제를 맞아본 적도 없는 의사가 환자에게 독한 항암주사와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한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양내과 의사들이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환자와 의사를 떠나 서로 다른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 자체가 본디 불가능한 일이다. 어디까지나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너의 상황을 짐작해보건대 너는 아마도 이럴 것이라고 짐작한다'는 선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고, 완벽히 같은 상황과 처지에서의 똑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아무것도 모르던 햇병아리 의사 시절에는 내가 환자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갈수록 그것이 순전히 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는 일이 많았다. 그런 착각은 상대를 이해했으니 더는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더는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다 안다는 오만으로 이어지기 쉬웠다. 환자 이야기를 다 들어줄 만큼 충분한 진료 시간을 갖고 있지도 못한 상황에서 귀를 충분히 열지조차 않은 내가 환자를 다 이해했다는 착각에 빠지니 결과는 뻔했다. 이해하기는 커녕 겉돌기만 했다. 그나마 겉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다행이지만 겉돈다는 것조차 모른 채 이해했다 치고 넘어가는 순간이 더 많았을 것이다.

 

이제야, 어느 정도 살아보니 세상에는 정말 겪어봐야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안다. 이제는 진료하면서 환자에게 '당신을 이해한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세상에는 겪어보지 않고는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나는 눈앞의 환자의 환자와 같은 경험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므로 완벽히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p.176~178

사실 이런 버티기 전략을 가르쳐주는 스승은 별로 없다. 이런 전략은 아주 오랜 시간 아주 많은 환자를 보고 수많은 실패를 겪으면서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소위 명의니 대가니 하는 사람들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환자에게 큰 도움이 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지만 후배들에게 잘 가르쳐주지 않는다. 자칫 의사로서 비굴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의료의 행위별 수가 제도는 뭔가를 해야만 보상이 뒤따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학저널도 뭔가를 해야만 논문을 실어준다. 뭔가 했다고 칭찬하는 사람은 있어도 하지 않았다고 칭찬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승리에 환호하지만 지지 않음에는 환호하지 않는다. 결과가 예정된 죽음일 때에는 특히 더 그렇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같은 전략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종양의 크기를 떠나 최대한 증상을 완화하며 시간을 버는, 완화 의료라고 불리는 이 전략을 좋아하지 않는다. 최신 표적항암제가 두 달의 시간을 벌어들일 때는 열광하지만 완화 의료로 동일한 두 달의 시간을 버는 것에는 놀랍도록 냉담하다. 하지만 의사로서 그 선택이 환자에게 최선이라고 판단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환자의 냉담한 태도나 비난, 내 선택이 비굴하게 비춰질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과시할만한 승리는 아니라고 해도 이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지지않는 것도 패배는 아니니까. 암치료에 있어서 해야 할 것을 하는 것 못지 않게 때로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p.239~241

나는 살인을 한 것인가? 일부 종교인들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나를 당장 몰아세우지 않을까? 내가 산소 공급을 멈추고 승압제 주사를 중단했으므로 그들은 내가 살인자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2018년 2월에 '연명의료 결정법'이 시행되었다. 이 법에 의하면 회생 가능성이 없는, 사망에 임박한 말기 암 환자는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자신의 의지로, 환자가 의식이 없을 경우에는 가족들의 선택으로 유보 혹은 중단할 수 있다. 법에 의하면 이미 달고 있는 인공호흡기를 떼는 일도 가능하며, 환자 본인의 뜻에 반해 연명의료를 지속하면 그것이 오히려 불법이 된다.

 

언론에서는 법이 만들어졌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존엄한 임종을 맞을 수 있을 것처럼 떠들었다. 그러나 법 조항 몇 줄이 오래된 관습을 쉽게 바꿀 수는 없다. 언론에서 비추지 않는 현장에서는 여전히 어려움이 많고 부담이 크다. 연명의료 결정법은 합법적으로 인공호흡기에 주입되는 산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했지만 누가 어떻게 산소 주입을 중단할지에 대해서는 고민해주지 않았다. 의료진도 보호자도 고민을 거듭한 끝에 선택을 하지만 어쨌든 아직 붙어 있는 숨을 '내가' 끊어냈다는 일말의 부담과 죄책감을 털어내기는 쉽지 않다. 그 이전에 연명의료를 언제 어떻게 누가 논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주지 않았다. 비용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해주지 않았고, 의사들이 처벌 조항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주지 않았다.

 

나는 가족들의 동의를 받아 환자의 산소 공급과 승압제 주입을 중단했고 그는 사망했다. 2018년 2월 이전이었다면 나는 살인자가 됐을 것이고, 2018년 2월 이후라면 합법적으로 연명의료를 중단한 의료진이 된다. 행위는 같으나 불법과 합법의 경계는 애매하고 인간의 판단은 인위적이다. 불법과 합법의 경계가 애매할수록 현장은 혼란스럽다. 법의 모호성은 권력을 낳고 법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법을 논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진정 환자를 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법을 따지려는 이들은 현장에 발들이지 않고 나중에 문제가 되면 법이라는 이름으로 심판하려고만 ㅎ나다. 그러나 책상머리에서는 알 수 없는 일들이 현장에서는 늘 일어난다.

 

죽은 이는 말이 없다. 현실적으로 일을 개선해나갈 수 있는 사람들은 현장에는 오지 않으므로 같은 일은 늘 반복된다. 그러다 언젠가는 내 차례가 되지 않겠는가. 나 또한 현장을 방관한 대가로 같은 차례를 맞이하게 될지 모른다. 그런 답 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결국 남는 물음은 이것뿐이다. 존엄한 죽음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마지막 순간에 의사로서 진정 환자를 위하는 일은 무엇인가.

 

p.254~255

오래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생명은 고귀한 것이라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행복하다고 이야기하기는 쉽다. 입으로 도덕을 외치고 윤리를 말하는 일도 참 쉽다. 똥 치우며 병수발하고 비용 부담하긴 어려워도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만 있을 뿐 인간다움을 완전히 잃는다면 그때에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혹 당신이 그런 상황이 된다면, 혹은 인지 기능 없이 단순히 숨만 쉬는 상태가 된다면 그런 상태로 몇 년 더 사는 것을 간절히 원하게 될까?

 

물론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고 내가 판단해서도 안 되는 영역이다. 내게는 의미 없어 보이는 삶도 당사자에게는 의미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흔이 넘은 망자의 장례식장에서 마주하는 가벼움을 생각해볼 때, 죽지 않은 세월이 산 세월을 좀먹어버린다는 생각이 지나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기억을 잃고 스스로를 잃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채 단지 '살아만' 있는 환자들을 마주할 때, 내가 그 같은 시간을 늘려온 것은 아닌지 책임과 죄스러움을 느끼곤 한다. 의사로서 최선을 다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인지는 이번에도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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