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한국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by Diligejy 2023. 2. 5.

p.17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징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반쯤 넘어진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아, 당신처럼.

 

살고 싶어서 너를 떠나는 거야.

사는 것같이 살고 싶어서.

 

p.26~27

그때 알았다.

 

파도가 휩쓸어가버린 저 아래의 뼈들을 등지고 가야 한다. 무릎까지 퍼렇게 차오른 물을 가르며 걸어서, 더 늦기 전에 능선으로. 아무것도 기다리지 말고, 누구의 도움도 믿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등성이 끝까지. 거기, 가장 높은 곳에 박힌 나무들 위로 부스러지는 흰 결정들이 보일때까지.

 

시간이 없으니까.

단지 그것밖엔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

 

p.44-45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떄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이를테면 고통. 유서를 완성하겠다는 모순된 의지로 지난 몇 달을 버텨왔다는 것. 자신의 삶이라는 지옥에서 잠시 빠져나와 친구를 병문안하고 있는 이 순간이 기이하게 낯설고 선명하게 느껴진다는 것.

 

p.75

누군가를 오래 만나다보면 어떤 순간에 말을 아껴야 하는지 어렴풋이 배우게 된다. 두 사람 모두 젓가락을 내려놓고도 한참 시간이 흘렀을 때에야 그녀는 입을 열어, 열여덟 살에 자신이 가출한 적이 있다고. 그때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겼었다고 말했다. 나는 내심 놀랐다. 인선이 아홉 살일 때 홀로되어 딸을 대학까지 보낸 연로한 어머니에게 그녀가 평소 얼마나 각별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p.105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문학 > 한국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구 끝의 온실  (0) 2023.03.05
작별인사  (0) 2023.02.25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  (0) 2023.01.16
하얼빈  (0) 2022.10.07
만다라  (0) 2022.10.0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