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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국소설

작별인사

by Diligejy 2023. 2. 25.

오랜만에 김영하의 소설을 읽었다.

오랜만에 읽은 이유는 그가 오랜만에 책을 발간했기 때문이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었다. 

 

예전에 만났던 김영하의 소설이 그랬듯 김영하는 자신의 색채를 잃지 않았다.

깊은 몰입감 그리고 빠른 전개를 통해 소설로 영화를 보는 느낌을 전달하는 특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약간 지식 전달에 촛점을 많이 맞춘 나머지 설명이 이전 작품 대비해서도 더 많아진 것 같다. 약간 강의록처럼 느껴진달까. 그런 점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김영하 개인의 색채가 남아있다는 게 그 단점들을 상쇄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예전에 봤던 [인류멸망보고서]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이 소설은 어쩌면 이 영화의 개정판 버전의 소설인 느낌을 주었다. 문제의식도, 전개방식도, 대화내용도 비슷했다. 다만 김영하 소설이라는 틀로 다시한번 출시된 느낌. 그런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봤을 때처럼, 소설을 읽고나서 침묵을 해야 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해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소설을 읽고 확실하게 답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 사람이 자만(Hubris)심에 가득찬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소설에서 나온 '아빠'인 최진수 박사처럼 말이다. 

 

아빠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최진수 박사는 소설의 초반부터 중반부까지 온화한 모습, 그리고 휴머노이드를 이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빠'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들'인 휴머노이드 '철이'가 자신의 의사를 거부할 수 있다는 말을 하자 이렇게 말한다.

 

"나는 원격으로 너의 모든 기능을 정지시킬 수 있어. 분실이나 도난을 대비해서 만들어둔 기능이지만, 네가 내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기능을 써서 데려올 수도 있어. 너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잊지 않는 게 좋아. 너를 만든 건 나고. 나는 너에 대해서 너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216p

 

철이를 아들로서 생각하고, 진심을 다해 챙긴다고 했던 '아빠' 최진수 박사였지만, 결정적인 순간 그는 자신의 속내를 이 말을 통해 내비쳤다. 나는 '아빠'라는 이름의 너의 '주인'이라는 것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자만했고, 많은 것을 놓쳤다는 걸 알게 된다.

 

최진수 박사의 모습을 보다보니 자만은 위선이라는 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이 소설은 인공지능이 주된 소재로 다뤄지고 있지만, 핵심 주제는 인공지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인공지능이 감정을 가질 수 있냐 없냐의 논쟁이 주된 게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가 핵심 주제라고 생각했다.

 

사실 인류의 오랜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이 질문이 계속해서 등장했고 대답 또한 등장했다.

하지만 점점 더 이 질문에 답하기는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듯 하다. 왜냐하면 기술이 발전하고, 그만큼 관계망이 커지면서 경계를 설정한다는 게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어려워하기 때문에 내가 기계가 아닌 인간인거 같기도 하고 말이다.

 

 

 

밑줄긋기

 

p.5

머지않아 너는 모든 거서을 잊게 될 것이고,

머지않아 모두가 너를 잊게 될 것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p.18

중국인들은 낮의 하늘이 아니라 밤의 하늘이 본질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낮의 하늘은 자꾸만 변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었던 거야. 아침엔 붉었다가 낮에는 파랬다가 저녁엔 다시 붉어지잖아? 흐린 날에는 회색이고. 하지만 밤은 늘 검지. 그리고 중국인들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점을 쳤기 때문에 밤하늘이 더 의미가 있었을 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중국인들이 옳았어. 검고 어두운 하늘이 진실에 가깝지. 낮에는 태양의 강렬한 빛 때문에 오히려 우주의 본모습이 가려진 거고. 

 

p.82

아빠도 언젠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휴머노이드를 개발할 때에도 선택을 해야 한다고, 인간과 같이 살아가야만 하는 휴머노이드에게 무한정의 능력치를 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따라서 설계자는 휴머노이드에게 어떤 능력을 어디까지 부여하고 어떤 기능은 제한해야 하는지, 그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p.83

자기가 누구인지 잘못 알고 있다가 그 착각이 깨지는 것, 그게 성장이라고 하던데?

 

p.100

우주는 생명을 만들고 생명은 의식을 창조하고 의식은 영속하는 거야. 그걸 믿어야 해. 그래야 다음 생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거야.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p.112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꼭 좋았던 무언가를 향한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저 익숙한 무언가를 되찾고 싶은 마음일 수 있다.

 

p.162

이야기는 인간의 공감 능력을 이용해 인간들을 끼리끼리 결속시킵니다. 같은 이야기를 믿는 인간들은 그 이야기를 믿지 않는 다른 인간들에게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굽니다. 전쟁이 벌어지고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모두 어떤 이야기를 믿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이 음모를 꾸민다는 얘기, 조선인이 대지진을 틈타 우물에 독을 탄다는 얘기, 마녀들이 밤마다 끔찍한 저주를 행한다는 얘기. 그 결과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들이 말하는 자아니, 존재니, 의식이니, 이야기니 하는 것들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p.164~165

마음이라. 마음이 뭘 말하는지를 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마음은 기억일까요, 어떤 데이터 뭉치일까요? 또는 외부 자극에 대응하는 감정의 집합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뇌나 그것을 닮은 연산 장치들이 만들어내는 어떤 어지러운 호나상들일까요?

 

p.187

모든 과학자가 그러하듯이 그저 더 나은 것을 만들려는 마음뿐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저는 감정과 윤리를 가진, 진짜 마음이 있는 휴머노이드가 이 냉혹한 세계에서 파멸하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저는 가끔 생각해요. 인간을 창조한 신이 저어말 있다면 이런 고통을 겪었겠구나. 아니 겪고 있겠구나.

 

p.225

생물체는 미토콘드리아의 먹이인 산소와 포도당을 제공해주고 미토콘드리아는 열과 에너지로 만들어 되돌려주는 시스템입니다. 그렇게 하나가 되어 인간과 미토콘드리아는 함께 진화를 거듭해온 것입니다. 인간과 기계도 이런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머지 않아 소멸하겠지만 철이 당신과 같은 중간적 존재를 통해 미토콘드리아처럼 기계 안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불멸을 꿈꾸었지만 그것은 오직 우리와 결합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이제는 기계의 시간입니다.

 

p.216

"나는 원격으로 너의 모든 기능을 정지시킬 수 있어. 분실이나 도난을 대비해서 만들어둔 기능이지만, 네가 내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기능을 써서 데려올 수도 있어. 너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잊지 않는 게 좋아. 너를 만든 건 나고. 나는 너에 대해서 너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p.228

당신은 무엇이고 무엇이 되고자 합니까?

 

p.268

싱가포르 시절, 최 박사에게 뇌를 백업하고 영생하지 않겠느냐고 권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이미 많은 인간이 그렇게 하고 있을 때였지만,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여전히 육신이 없는 영생을 바라지 않는다고, 인간의 존엄성은 죽음을 직시하는 데에서 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육신 없는 삶이란 끝없는 지루함이며 참된 고통일 거라고도.

 

p.305

봄꽃이 피는 것을 보고 벌써 작별을 염려할 때, 다정한 것들이 더이상 오지 않을 날을 떠올릴 때, 내가 기계가 아니라 필멸의 존재임을 자각한다. 그럴 때 나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에 가 있지 않고 바로 여기, 현재에 있다. 그렇게 나를 현재로 이끄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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