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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국소설

재수사

by Diligejy 2023. 3. 11.

1권

 

p.25

팀장님 말씀이, 아니라는 거야. 범인은 경찰 조직 전체가 함께 잡는 거지, 형사 하나가 잡는 게 아니라고. 사건이 나면 신고를 받는 사람이 있고, 현장에 나가서 증거를 수집하는 사람이 있고, 그 증거를 분석하는 사람도 있고, 목격자 찾아다니면서 진술 받는 사람도 있고, 용의자 몽타주를 그리는 사람도 있고, 수배 전단을 전국 곳곳에 붙이는 사람도 있다, 그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범인을 잡는 거다, 그러시더라고.

 

뭐 말하자면 이게 하나의 시스템이라는 거지, 수사시스템. 그리고 그 시스템은 더 큰 시스템의 한 부분인 거야. 경찰은 수사를 하고, 검찰은 기소를 하고, 법원은 재판을 하고, 교도소에서 범인을 가두고 벌을 주지. 뭐, 이건 형사사법시스템이라고 불러야하나? 그 큰 시스템을 생각해보라고. 형사는 결코 범인을 잡아 응징하고 정의를 세우는 사람이 아니야.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일을 하는 건 커다란 시스템이고, 사람들은 거기서 자기가 맡은 역할만 할 뿐이지. 형사도 그 중 한 사람이고.

 

p.26

그런데 어느 형사가 증거를 조작했다거나 증인을 협박했다면? 그러면 관련 증거를 전부 못 쓰게 돼. 최악의 경우에는 진범을 잡아놓고도 풀어줘야 할 수도 있어. 볼트 조각이 부러져서 다른 톱니 사이에 끼면 기계장치 전체가 멈춰버릴 수도 있는 거지. 다른 부품들도 못 쓰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겠고. 바꿔 말하면, 우리 형사사법시스템은 나쁜 형사에 취약해. 그러니까 이 시스템에 몸담은 사람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나쁜 부품이 되면 안 된다는 거야. 차라리 헐렁하고 게으른 게 나아.

 

p.77

중요한 것은 자세다. 인생에는 노상강도를 당할 가능성, 교통사고를 당할 가능성, 벼락에 맞을 가능성, 뇌졸중이나 혈액암에 걸릴 가능성, 슈퍼박테리아에 감염될 가능성이 늘 있다.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피하려 하면서도 결국 없애지 못하며, 어느 수준에서 감수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생존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기쁨과 감동을 모두 희생하는 나날을 과연 '삶'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삶을 산다는 것은 곧 삶에 맞선다는 것이며,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의 마지막 몇 방울을 어디까지 마시고 어디서부터 포기할지 내가 정한다는 것이다.

 

p.100-101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2차세계대전 직후 거대한 유행이 되지만, 투르니에는 핵심을 찔렀다. 실존이 어쩌고 본질이 어쩌고 해봐야 계몽주의를 다시 옹호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계몽주의는 처음부터 공허라는 위험을 내장하고 있다. 계몽사상에 바탕을 둔 현대문명의 논리적 귀결은 영적 허무주의다. 이것이 쾌락주의와 물신주의의 토양이 된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런 미래를 감지했다. 그래서 서유럽의 자유사상에 물든 러시아 청년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말대로라면, 신이 없고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면, 그렇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지 않나? 규범이 없는 삶을 살게 되지 않나?

 

p.110~111

오늘날 우리는 아기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DNA에 새겨진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본능은 우리가 믿는 거서만큼 강하지 않다. 실은 강력하고 반복적인 사회화의 결과인 측면이 더 크다. 곤충에 대한 혐오감과 비슷하다.

 

역사적으로 모든 문화권에서 영아살해가 만연했다. 바구니에 담겨진 채 강에서 떠내려온 아기에 대한 전승은 세계적으로 흔하다.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학살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여아 살해가 광범위했다.

 

르네상스 이전까지 유럽인들도 어린 자녀를 쉽게 포기했다. 부주의하게 다루다 바닥에 떨어뜨린다든가, 껴안고 자다가 질식시키거나, 필요한 치료를 미루는 식으로 부모의 죄책감을 더는 방법들이 있었다. 18세기까지도 아이를 잘 죽인다는 소문이 난 유모를 찾는 어머니들이 있었다. 

 

이런 문화가 사라지고 영아살해가 최악의 범죄 취급을 받게 된 것은 계몽주의가 퍼진 다음부터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인간이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고,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며, 이 권리들은 정부보다 앞선다고 규정한다. 이 규범은 일단 태어난 인간 모두에게 적용된다.

 

한번 태어난 인간은 생명을 보호받고 자유와 행복 추구에 있어서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거의 도덕적 직관이 되었다. 사람들은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할 줄 아는 성체 침팬지들이 고문과 같은 동물실험을 당하는 데 대해 그저 불편함을 느끼는 정도다. 그러나 가만히 놔두면 분명히 죽을, 아직 의식 없는 상태인 미숙아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p.139

형사분들이 잘 모르시던데...... 제가 경찰에서 강의할 때마다 하는 얘기예요. 강제로 삽입해도 피해자 몸에서 체액이 나와서 상처가 남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피해자가 어떻게 느꼈느냐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데서 많이 연구가 됐죠. 성폭행 뒤 여성생식기에 손상 흔적이 남지 않는 비율이 40퍼센트예요. 그러니까 상처가 없다고 성폭행이 아니라고 하면 인격 살인이 되는 겁니다. 성폭행 피해자 분들 중에서도 이걸 모르시는 분이 많으세요. 몸에 상처가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정신과에 가시는 분도 있다고 들었어요. 전혀 그럴 일이 아니에요.

 

p.180~181

계몽주의 사회의 정책 입안자들은 숫제 고통이 따르는 장기적 행복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런 가치는 평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신 효용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는 결국 쾌락을 가리키는 말이다.

 

계몽주의 사회에서 국가, 기업, 대학의 목표 : 더 많은 효용

 

계몽주의 사회에서 어느 정도 규모에 이른 집단은 모두 이 방법론을 사용하며, 그 결과 공동체들은 점점 더 납작해진다. 경제적 효용 이외의 가치를 집단적으로 추구하자고 제안하는 사람은 몽상가 취급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 욕구는 인간 본성 깊숙한 곳에 남아 있다. 수치를 당하느니 죽음을 택하는 사람도 여전히 있다.

 

명예를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이런 우리의 깊은 욕구를 공동체나 예술, 진리 탐구에 대한 헌신으로 유도할 수 있다. 그러나 행복에 몰두하는 사회에서는 그런 욕망 자체를 부정적으로 취급하거나, 인기라든가 인지도 같은 잘못된 길을 제시한다.

 

p.204~206

도덕적 가치의 우선순위는, 한 사람이 그걸 추구하느라 얼마나 고생하는지와는 관련이 없어야 한다.

 

앞서 나는 의미와 고통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적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의미 없는 고통도, 고통 없는 의미도 있다. 내가 고통을 느낀다고 반드시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불행히도 인간의 본능 - 우리가 '도덕적 직관'이라고 부르는 것- 은 이런 분명한 사실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들의 고통이 클수록 값진 희생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가장 젊고 아름다운 젊은이들을 산 제물로 바친다. 가난한 사람이 빵 한 조각을 다른 이와 나누는 것이 부자가 재해 현장에 수천만 원을 내놓는 것보다 더 훌륭하다고 여긴다. 자원봉사를 금전 기부보다 높이 평가한다.

 

계몽사상 이전의 모든 종교가 이런 잣대로 도덕적 가치의 순위를 매겼다. 종교와 거대 담론이 힘을 잃으면서 부상한 현대의 캠페인들에도 이런 종교적 태도들이 반영되어 있다. 사실 이런 사회운동들은 종종 새로운 종교 역할을 한다.

 

우리는 특정 상품의 소비가 얼마나 탄소를 많이 발생시키는지 측정할 수 있다. 종이컵 한 개를 만들고 폐기하는 데 이산화탄소가 11그램 발생한다. 한 사람이 60년 동안 매일 종이컵을 다섯 개씩 쓴다면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를 1.2톤 가량 늘리게 된다. 

 

그런데 항공기는 1킬로미터를 이동할 때 승객 한 사람당 이산화탄소를 285그램 배출한다. 한국인이 인천공항에서 1만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뉴욕을 갔다가 돌아오면 혼자서 이산화탄소를 6.3톤 이상 내게 된다. 비행기 안의 모든 승객들이 종이컵을 각자 1초에 다섯 개씩 내내 바다로 버리면서 목적지로 날아간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귀여운 북극곰들을 살리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종이컵이 아니라 해외여행을 막아야 한다. 관광 목적의 출국은 5년에 1회 정도로 제한해야 한다. 유명 해외 관광지의 사진을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람들을 비난해야 한다. 

 

그러나 탄소 줄이기 캠페인은 종이컵 쪽에 더 초점을 맞춘다. 해외여행보다는 종이컵이 종교적 금지 대상에 좀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종이컵 쪽이 보다 일상적이고, 현시적이며, 고통스럽다(보통 사람들은 해외여행을 그리 자주 가지 않으며, 해외여행을 가지 않는 상태는 티가 나지 않지만 텀블러는 눈에 잘 띈다). 

 

채식주의도 비슷하다. 육식이라는 유혹을 참는 일은 일상적이고, 현시적이며, 고통스럽다. 그리고 자주 논리적 모순에 부딪힌다. 동물 복지를 위해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고양이를 키워도 될까? 고양이는 동물성 단백질을 먹어야 하고, 고양이 사료는 닭이나 연어로 만든다. 먹히는 닭이나 연어 입장에서는 자신이 사람의 식사가 되건 고양이 사료가 되건 아무 차이가 없다. 벌들을 착취하지 않겠다며 꿀을 섭취하지 않는 사람은 모기 살충제에 대해서도 역시 반대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많은 채식주의자들은 그런 복잡성을 탐구하기보다는 거기에서 눈을 돌린다. 상당수는 희생의 결과보다는 희생이 그들에게 주는 도덕적 충족감을 추구하는 듯 보인다. 어떤 이들은 타협과 확장을 거부하고 고행의 순수함에 집착한다. 이는 정확히 종교인의 태도와 일치한다. 

 

사실, 국 한 그릇을 먹을 때 거기에 들어가는 한 스푼 양념에 소고기 분말이 조금 포함돼 있거나 말거나 그렇게 호들갑 떨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 정도는 소들도 괜찮다고 할 것이다.

 

p.215

감정이입은 무척 선택적이기도 하다.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에게는 잘 발휘되지 않는다. 인간이 같은 편에 대해 한없이 공감하면서 적을 향해 무한히 잔인해질 수 있다는 것은 역사가 입증하는 바다. 물론 지금도 인터넷에서 그런 현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심리적 고통의 영역에는 별 합리적인 근거나 일관성이 없다. 어떤 사람은 외로움을, 어떤 사람은 투자 실패를,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응원하는 축구팀의 패배를 가장 고통스럽게 여긴다. 주변에서 모두 아름답다고 흠모하는 사람이 외모 콤플렉스에 빠져 있기도 하다. 반면 약물 금단증상처럼 누구도 그 필요나 의미를 부정하지 못할 고통도 있다.

 

공감 능력을 확대하는 것만으로는 이런 딜레마를 해결할 수 없다. 그 아래 윤리의 논리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은 호소력 있는 무기다. 종교와 거대 이데올로기처럼 체계적인 담론이 무너진 시대에 더 그렇다.

 

모든 정치단체, 사회단체들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려 애쓴다. 구호 단체의 포스터에는 늘 아주 예쁘게 생긴, 그리고 매우 불쌍한 처지의 아이나 동물의 사진이 찍힌다. 그 이미지들은 공감이라는 도구로 당신의 도덕적 의무감을 자극한다. 

 

p.216~217

스타브로긴은 그보다는 우리가 서구의 1960년대와 같은 시기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1960년대에도 하나의 비전으로 모일 듯 말 듯한 커다란 에너지는 있었다. 그러나 기득권에 대한 막연한 불신과 세부 사항이 없는 낭만적인 이상주의는 끝내 일관되고 구체적인 사상체계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 에너지는 저항문화, 반전운동, 히피즘, 성 혁명, 로큰롤, 마약 등에 뿔뿔히 흩어졌다.

 

그것은 방향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였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살롱에서 논쟁을 벌이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1960년대 서구 젊은이들은 우드스톡에서 자아에 도취됐다.

 

서구의 1960년대는 사상을 낳지 못한 대신 문화적 유산이 되었다. 그 유산에 페미니즘과 소수자 운동처럼 긍정적인 것도 있고 가정의 해체와 허무주의, 마약 확산처럼 부정적인 것도 있다.

 

내 안의 스타브로긴은 금기로 가득찬 시대가 올지 모른다고 냉소적으로 내다본다. '감수성 운동'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을 중요시한다. 인간은 비윤리적인 행위로도 고통받지만 무례함으로도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감수성 운동은 윤리와 예의를 거의 구분하지 않는다. 한 부족에서 어떤 단어가 대단히 무례한 것으로 지정된다면, 별다른 윤리적 근거가 없더라도 주변 부족이 그 금기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이 전체 공동체로 확산된다.

 

각 부족들이 지닌 금기의 합집합이 다음 세상의 새로운 윤리가 될 가능성에 스타브로긴은 전율한다. 그곳에서는 상대에게 전날 축구 경기의 결과를 묻는 것도 손가락질받을 일일지 모른다. 

 

p.283

<데미안>과 헤세의 유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우상의 자리에 있는 것은 아브락사스가 아니라 '진정성'이라는 신화다. 일상이 공허하다고 느낀 현대인들은 '진정한 것'을 찾아 헤맨다.

 

인간이 자신이 좇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면서 '추구' 자체에 무게를 둘 때, 그 행위는 종교를 피상적으로 닮아간다.

 

p.328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일과 고통을 없애는 일은 분명히 다른 거 같아요. 앞의 것은 좋은 일이고, 뒤의 것은 옳은 일이에요. 저는 옳은 일을 하고 싶었어요. 제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야 몸과 마음을 바칠 수 있을 거 같았어요. 그러지 않으면 시간을 허비하면서 인생을 보낼 거 같았고요. 

 

p.384

 "배트맨 싫어하세요?"

 

"싫어해. 그게 돈지랄이지 뭐야. 정말로 어느 재벌이 도시 범죄율을 낮추는 데 관심이 있다면 그런 장난질 하지 말고 그 돈으로 거리 골목골목에 CCTV 달아주는 게 훨씬 낫지. 자기 돈으로 설치하고 기부채납할 수 있잖아."

 

2권

 

p.22

계몽주의 시대가 되면서 세상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고, 각종 원거리 통신 기술도 발전했다. 개인은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지리적 위치가 중요하지 않은 많은 상상의 공동체에 소속되었다. 떠맡은 역할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동시에 자유라는 막막한 힘을 갑자기 움켜쥐면서 많은 사람들이 분열의 압박을 받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이제 농담이 아니었다. 

 

하필 그 시기에 신도 죽어버렸다. 창조주가 없는 우주, 가치의 원천이 사라진 세계에서 모든 사람이 길을 잃은 듯한 기분에 잠겼다. "누군가 삶의 의미를 묻는 순간, 그는 병든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했다. 현대ㅐ인은 모두 병이 들었다. 

 

세상은 점점 심연과 비슷한 장소가 되어갔다. 내면에 대해서도, 외부에 대해서도 통제력을 발휘하기 어려워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상상의 공동체가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외롭다. 깊은 소속감을 제공하는 공동체가 전보다 더 드물어졌기 때문이다.

 

p.96-99

우리는 사실과 상상의 복합체 속에서 살고 있는 사실과 상상의 복합체다. 

 

우리는 의미 속에서 살고 있는 의미다. 

 

기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알고 있다. 

 

신과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도, 삶의 목저거을 숙고하지 않는 사람도, 자신이 죽음 뒤에 남길 유산에 대해서는 신경을 쓴다. 

 

자식을 남기는 데 집착하는 이도 있다. 생물학적 후손을 통해 가문이라든가 민족, 인류라고 하는 커다란 이야기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위대한 작품이나 업적으로 인류의 기억 속에 남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단순한 유전자 묶음 이상임을, 자신의 본질 일부가 인지 세계의 의미이며, 그 의미가 더 큰 의미와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명예를 얻은 개체가 번식에 유리하기에 우리가 그런 식으로 진화했다는 해석은 운명교향곡의 위대함을 공기의 진동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만큼이나 조잡하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영광을 추구했다. 아킬레우스는 생물학적 후손을 남기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돈이 의미인 것처럼 법도 의미이고, 돈이 현실인 것처럼 법도 현실이다.

 

음악이 의미인 것처럼 영광도 의미이고, 음악이 현실인 것처럼 영광도 현실이다.

 

모든 현실은 사실-상상 복합체이며, 거기서 상상을 빼면 사실이 남는 게 아니라 조각난 비현실이 남는다. 

 

우리는 왜 평판에 신경을 쓸까? 평판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나'는 '나'의 일부다. '살아 숨쉬는 나의 몸뚱이' 역시 '나'의 일부다. 우리는 평판이 더럽혀지는 일을 신체에 대한 공격만큼 아프게 받아들인다. 실제로 인간의 뇌는 그 두 가지 고통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사람에게 진통제가 위안이 될 수 있다.

 

'나'는 과거와 미래에 걸쳐진 사실-상상 복합체다. 그것은 영원하지는 않다. 그러나 '살아 숨 쉬는 나의 몸뚱이'보다는 더 오래 산다.

 

'내가 죽고 난 뒤 남들이 생각할 나' 역시 '나'의 일부를 이룬다. "죽기 전에 꼭 하드디스크를 포맷해야 한다"고 말하는 젊은 남자들은 그런 '나'의 크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셈이다. 하드디스크를 포맷할 때, 그들은 문자 그대로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죽고 난 뒤 남들이 생각할 나'는 '나'의 확장과 성공을 둘러싸고 '살아 숨쉬는 나의 몸뚱이'와 경쟁하기도 한다. 제임스 딘이나 커트 코베인이 불멸의 아이콘이 된 것은 살아 숨쉬는 그들의 몸뚱이가 일찍 사라져서다.

 

'나'는 개체라기보다는 일종의 기업에 가깝다. '나'에게 브랜드는 엄연한 현실이다.

 

인스타그램에 몰두하는 사람들과 명예살인을 저지르는 이들은 모두 인간이 몸뚱이를 넘어선 형이상학적 구조물임을 잘 이해하고 있다. 

 

한데 계몽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인본주의에서 인은 무엇을 말하는가? 몸뚱이인가, 사실-상상 복합체인가? 몸뚱이가 아닌, 사실-상상 복합체에 대한 공격에 대해 계몽주의는 어떤 보호 장치를 제공하나?

 

p.187

내가 등산 갔다가 굴러떨어져서 한쪽 눈이 먼다,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된다, 그러면 아마 한 1년 있으면 그냥저냥 적응해서 한 눈이나 한 다리 없이 잘 살걸요? 그런데 누가 내 다리를 잘랐다, 내 눈을 찔러서 멀게 했다, 그리고 그 놈이 계속 떵떵거리면서 잘 살면? 그러면 나는 절대 잘 살지 못해요. 누가 내 자식을 죽였다, 그리고 버젓이 잘 돌아다닌다?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은 결코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인간은 손해는 잊을 수 있지만 악의는 잊지 못해요. 훌훌 털어버릴 수가 없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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