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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국제정세론

문제지적은 좋았으나 - 정치적 부족주의

by Diligejy 2023. 12. 1.

 

이 책을 보다보면 '왜' 그랬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모든 책이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 마치 퍼즐조각에서 없어진 퍼즐조각을 발견하는 것처럼 앞과 뒤가 맞춰진다. 

 

저자는 미국의 외교정책을 강하게 비판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ABC도 모른 상태로 외교를 했고, 눈감고 외교를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는 거다. 왜? 실체적 현실인 부족주의를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대로 봤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고 동감했다.

 

한국에서 살다보면 부족주의를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아니 느낄 수가 없다. 저자가 말하는 부족주의라는 건 말 그대로 다양한 부족이 살아야 하는데 한국은 지역주의나 다른 분열되는 기준이 있긴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사례만큼 극단적인 형태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에서 경험할 수 없는 부족주의는 세계 곳곳에 실재하고 있으며, 그런 요인을 무시하고 그저 선의로만 접근할 때 우리는 그 선의에 대해 배신당하고 세계는 더 화약고가 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조금 더 단순하게 해석해보자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과 독일의 사례가 특이 케이스이지, 그들을 일반적인 케이스로 놓고 접근해선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차라리 유고연방이나 베트남을 사례연구의 표본으로 쓸 것을 저자는 권하고 있다. 

 

세계사 지식이 더 있다면 더 깊이 즐길 수 있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굳이 깊은 세계사 지식이 없더라도 저자가 친절히 설명해주면서 이끌어주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 없이 저자의 손을 잡고 따라가보면 된다.

 

다만, 마지막에 도착한 결론이 허약한 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거대담론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이상 결론이 허약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귀결이라고 해야할까. 

 

세상을 조금 더 정밀하게 묘사한 것만으로도 이 책은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p.9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집단 정체성은 '국가'가 아니라 인종, 지역, 종교, 분파, 부족에 기반을 둔 것들이다. 미국의 안보에 매우 큰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곳들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미국은 이런 류의 집단 정체성에 대해 너무나도 아는 것이 없다. 적어도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의 외교정책은 부족적 동학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을 놀라울 정도로 간과했다. 미국은 세계를 상호배타적인 영토를 가진 국민국가들이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자유세계 대 악의 축'과 같은 거대 이데올로기에 따라 대립하는 장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덧씌운 렌즈로 세상을 보면서, 미국은 세계 수십억 명의 사람에게 매우 강력하고 가장 유의미하며 모든 곳에서 정치적 격동의 주요인인, 더 원초적인 집단 정체성들을 번번이 간과했다. 이런 사각지대는 미국 외교정책의 아킬레스건이었다.

 

p.14-15

부족 정치는 집단을 드러내는 표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엘리트 계층과 나머지 사람들 사이에서 차이를 드러내 주는 표식은 늘 미학적인 요소와 관련이 있었다. 오늘날 미국의 엘리트, 특히 진보 쪽 엘리트는 자신이 얼마나 다른 이들에 대해 가치 판단을 내리려 하는지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조잡하고 싸구려 같은 것을 질색한다. 그런데 그 조잡하고 싸구려 같은 것들(가짜 선탠, 화려한 머리, 프로레슬링, 큰 트럭 뒤에 매달린 크롬으로 만든 황소 성기 등)은 대개 저소득층과 관련이 있고, 이는 우연이 아니다.

 

많은 엘리트 계층이 보기에 '애국심'도 그런 조잡한 취향이다. 적어도 'USA'를 연호하고 버드와이저를 마시면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고 외치는 데서 드러나는 애국심이 그렇다. 미국 엘리트 계층은 자신이 '부족적'인 것과는 정반대라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이 보편 인류를 찬양하고 전 지구적, 코즈모폴리턴적 가치를 받아들인 '세계 시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로 그 코즈모폴리턴주의가 얼마나 부족적인 것인지를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고학력이고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볼 수 있었던 사람들의 코즈모폴리턴주의는 사실 매우 배타적인 부족적 표식이다. 이 표식은 부족의 외부인을 매우 분명하게 가려낼 수 있게 해주는데, 여기에서 외부인은 성조기를 흔드는 촌뜨기들이다. 전 하원의장(공화당) 뉴트 깅그리치는 2009년 '나는 세계의 시민이 아니다'라고 말해서 즉각 비난의 대상이 됐다. <허핑턴포스트>에 올라온 어느 글은 그가 '우월주의자'이고 '퇴행적'이며 '엘리트주의자'에다 '인종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이렇게 글을 맺었다. '깅그리치 씨, 당신이 이 세계의 시민이 아니라면, 젠장, 여기서 꺼저 버려요.' 결코 포용적인 태도라고는 보기 어려운 말이다.

 

p.18

위기감을 느끼는 집단은 부족주의로 후퇴하기 마련이다.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고, 더 폐쇄적, 방어적, 징벌적이 되며, 더욱더 '우리 대 저들'의 관점으로 생각하게 된다. 오늘날 미국의 모든 집단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이런 느낌을 갖고 있다. 백인도 흑인도, 라틴계도 아시아계도, 남성도 여성도, 기독교도도 유대교도도 무슬림도,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진보도 보수도, 다들 자기 집단이 공격받고 괴롭힘을 당하고 학대받고 차별받고 있다고 느낀다. 물론 어느 집단이 자기가 위협에 처해 있고 억압 때문에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은 종종 다른 집단의 비웃음을 산다. 너희보다 우리가 받는 박해와 차별과 억울함이 훨씬 큰데 무슨 소리냐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게 정치적 부족주의다.

 

p.22-23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유례없는 일로 보일지 모르지만, 놀랍도록 유사한 사례가 개발도상국에 이미 존재한 바 있다. 트럼프는 세계 최초의 '트위통령tweetter-in-chief'도 아니고 리얼리티 TV쇼를 해 본 세계 최초의 국가수반도 아니다. 따지자면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가 원조다. 1998년 선거에서 차베스도 트럼프처럼 반기득권 성향의 지지층을 바탕으로 엘리트 계층을 충격과 경악에 빠뜨리며 당선됐다. 차베스도 선거 과정에서 주류 언론과 이런저런 '민중의 적들'을 공격했다. 백악관발 140글자에 자신을 열심히 쏟아 놓는 트럼프처럼, 차베스도 대중과 직접 소통하는 데 달인이었다. 엘리트 계층이 보기에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저속하고 분노를 돋우며 어처구니없고 때로는 완전히 틀리기까지 한 말들을 각본 없이 구사하면서, 차베스는 수백만 빈민의 마음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트럼프처럼 차베스의 호소력도 인종적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차베스의 인종 기반이 인구 다수를 차지하면서도 오래도록 배제를 겪어 온 유색인종이었다면 트럼프의 인종 기반은 백인이었다는 데서 차이는 있다.)

 

흥미롭게도, 워싱턴은 베네수엘라의 상황도 완전히 잘못 파악했다. 1998년 당시 미국의 외교정책 결정자들은 예의 반공주의 구도로 차베스를 본 나머지 베네수엘라 사회의 깊은 인종 갈등을 보지 못했고 표면 바로 아래서 맹렬히 끓고 있던 엘리트 계층에 대한 부족적 분노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은 엉뚱한 외교정책을 반복했고(가령 2002년에 차베스에 저항하는 쿠데타가 일어나자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찬양한 것), 그 바람에 베네수엘라에서 미국의 정당성이 훼손됐으며,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를 정말로 공격하는 것들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미국의 역량도 약화됐다.

 

p.48~49

'미국 예외주의'는 가장 추악한 측면에서도 또 가장 고귀한 측면에서도 미국이 해외의 많은 사람에게 몹시도 중요한 부족적 정체성을 간과하게 만드는 근원이다. 때로는 인종주의가 미국의 눈을 가린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미국은 다른 나라들도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다양성을 잘 다룰 수 있고, 집단 간의 원초적인 분열을 강력한 국가 정체성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런 전제는 두 가지의 치명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다. 첫째, 이것은 너무 순진한 세계관이다. 미국이 이끄는 다국적군이 2011년에 카다피를 무너뜨렸을 때 오바마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 하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리비아의 미래는 이제 리비아 국민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바로 리비아 국민 자신일 것입니다." 하지만 '리비아 국민'은 140개의 부족으로 되어 있고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하나로 통합됮 ㅣ않았다. 오히려 국가가 분열주의로 내리막을 탔고 잔혹한 내전이 벌어졌다. 나중에 오바마가 말했듯이 '리비아에 존재하는 부족적 분열의 정도는 우리 분석가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2016년에 아프리카에 주둔한 미 육군 지휘관은 리비아가 '파탄 국가' 상태라고 선언했다. 현재 리비아는 급진주의자들의 온상이다. 오바마 자신도 리비아에서 "그 뒤의 일을 계획하는 데 실패한 것"이 아마도 재임 기간 중 '최악의 실수'였다고 말했다. 미국이 외교정책을 바로잡으려면 다른 나라들에서 부족적 본능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더 잘 파악해야 한다.

 

둘째, 원초적인 집단 간 분열을 강력한 국가 정체성이 자동적으로 극복하게 해 주리라는 기대는 미국이 스스로에 대해서도 너무 순진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이 미국처럼 다양성을 잘 다룰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미국이 다양성을 잘 다루고 있다는 가정을 깔고 있다. 하지만 미국도 파괴적인 정치적 부족주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다른 여러 나라를 반복적으로 갈기갈기 찢어 놓는, 그리고 미국의 대외 개입을 재앙으로 만들어 온 요인들에서 미국이라고 예외란 법은 없는 것이다.

 

p.57

아마도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하버드 '집단 간 신경과학 연구소' 소장 미나 시카라의 최근 연구 결과일 것이다. 시카라의 연구에 따르면, 특정 조건하에서 우리 뇌의 '보상 센터'는 외집단 사람이 실패나 불운을 겪을 때 활성화되는 경향이 있다. 시카라는 대개의 경우 "실제로 나가서 외집단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할 때(가령 오랜 경쟁 관계였거나 반목이 있었던 경우), 샤덴프로이데를 느끼는 것은 뇌 신경의 생물학적 작용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라이벌 집단에 속한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고통에 "사디스트적인 쾌감"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그저 조금 부족적인 게 아니라 아주 많이 부족적이며, 부족 본능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왜곡한다.

 

p.61-62

그것이 신화든 실제든 모든 베트남 아이들은 조상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듣는데, 이들의 조상이 맞서 싸운 적은 늘 동일하다. 바로 중국이다. 실제로 중국의 지배에 맞서 싸워온 오래고 오랜 투쟁은 베트남 사람들의 혈통 감수성과 민족주의의 핵심 요인이다. 베트남 역사학자 트랜 칸이 언급했듯이, "비엣족 사람들이 중구에 맞서 벌인 생존 투쟁은 비엣족의 공동체 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들은 자신이 공통의 조상을 가진 형제자매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문화와 종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

 

그런데 냉전 시기에 미국의 외교정책 결정자들은 베트남의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몰라서, 베트남을 중국의 졸개라고 생각했다. 베트남이 중국의 남아시아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집단 간 차이(베트남과 중국의 차이)를 엄청나게 간과한, 막대한 실수였다.

 

베트남전쟁 때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1995년에 전쟁 당시 그의 상대였던 전 북베트남 외무장관을 만났다. 훗날 그는 과거의 적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회상했다. "맥나마라 씨, 당신은 역사책을 안 읽어 봤던 게 틀림없어요. 읽었다면 우리가 중국의 졸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우리가 중국과 1000년이나 싸워 왔다는 것을 몰랐나요? 우리는 우리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웠을 겁니다. 아무리 폭탄을 터뜨려도, 미국이 어떤 압력을 가해도, 우리를 멈출 수는 없었을 겁니다."

 

냉전 시기에 미국은 북베트남 혁명 지도자 호찌민을 '중국의 꼭두각시'라고 생각했다. 막대한 실수였다. 호찌민도 어린 시절에 증오해 마지않는 중국 압제자를 물리친 베트남 영웅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그리고 최소 13개월을 중국 감옥에 갇혀 있었다. 때로는 독방에 수감됐고 종종 족쇄를 찬 채 40~50킬로미터를 걸어야 했다. 흔히 그는 '부드럽게 말하는' 사람이라고 묘사되고 간디와 비견되기도 하지만, 호찌민이 반중국적 증오를 초월했다는 생각은 가당치 않다. 다음의 에피소드 하나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그의 부하 중 한 명이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에 유화 정책을 펴자는 의견을 내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이런 멍청이들! 우리의 역사를 잊었단 말인가? 지난번에 중국이 우리를 침략했을 때 그들은 1000년이나 우리 땅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중국의 똥을 평생 먹느니 프랑스의 똥 냄새를 5년 동안 맡겠다."

 

p.69-71

베트남 '자본가' 대부분은 베트남 사람이 아니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자본주의는 화교를 연상시켰다. 자본주의에서 주로 이득을 얻는 이들이 화교로 보였기 때문이다. 북베트남은 이 점을 반복적으로 프로파간다에 활용했다. 베트남 사람 중에도 경제, 상업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 있었지만 북베트남은 화교의 지배력을 과장해서 말했다. '화교가 남베트남 도매 거래를 100% 장악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한번은 화교 지역인 쩔런을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의 몸 안에서 뛰고 있는 자본주의의 심장"이라고까지 말했다. 

 

전쟁 시기 미국의 정책은 가뜩이나 호찌민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화교의 부와 권력을 한층 더 증가시켰다. 미국은 이 전쟁에 1000억 달러를 쏟아부었는데, 그 중 현지인에게 들어가는 돈의 상당 부분이 화교에게 들어갔다. 미군은 막대한 군수 물자와 군수 서비스를 필요로 했고 화교는 이런 것들을 제공하기에 아주 좋은 위치에 있었다. 화교는 '미국의 원조를 통해 남베트남에 들어오는 수입 물품의 60%를 거래했고' 많은 화교가 중간 상인으로 큰 수익을 얻었다. 1971년에 베트남의 직간접 수입상 중 84%가 화교였다. 그뿐 아니라 번성하는 암시장도 거의 전적으로 화교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미군 병사에게 '금시계, 다이아몬드, 자동차, 밍크, 마리화나, 아편, 헤로인' 등 각종 물품과 매매춘을 공급했다. (1966년에 쩔런 홍등가에 고용된 '전쟁 고아 매춘부'는 거의 3만 명이나 됐으며, 미군 병사 넷 중 한 명은 성병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서 들어오는 돈만 베트남 화교를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자체가 화교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금융 분야를 보면 1972년에 남베트남 은행 32개 중 28개를 사실상 화교가 소유하고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많은 수가 베트남인의 소유였지만 말이다.) 경제력과 더불어 돈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살 수 있는 여지도 커지면서, 사이공의 화교들은 남베트남의 정치인과 군 고위층에 뇌물로 뒷돈을 대준 것으로도 악명이 높다. 전쟁 시기 남베트남에는 "부패의 끈끈한 점액이 모든 틈새로 스며들었다."

 

화교는 미국의 개입에 업혀 이익을 얻은 데서만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주위에서 베트남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 보였다. 한번은 쌀 시장 거물인 화교들이 가격을 올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쌀 공급 부족을 일으켰다. 이는 안 그래도 전쟁으로 인한 기아와 영양실조가 만연한 상황을 크게 악화시켰다. 화교들은 쌀을 사재기하고 심지어는 정부의 수색에서 걸리지 않기 위해 강에 버리려고까지 했다. 한술 더 떠 화교들은 뇌물을 써서 체계적으로 징병을 피했다. 쩔런 경찰서장 자리는 베트남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자리가 됐다. 쩔런의 화교 10만 명 이상이 징병을 회피했다. 요컨대,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의 정권은 남베트남 사람들더러 화교를 부유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북부의 형제들을 죽이라고 요구하는 셈이었다.

 

미국은 이런 민족 간의 동학을 전혀 보지 못했다. 베트남 현지에 있었던 미군 인력은 중국인과 베트남인을 구별할 수 있었다. 아마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모든 아시아인은 '딩크Dinks, 국, 슬랜트Slants, 슬로프Slope'였다. 당시에 베트남에 있었떤 한 미국인은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그들이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국'들은 피도 안 흘리고 고통도 못 느끼고 충성심이나 사랑 같은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p.75~76

베트남 당국은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 전문가들은 "중국이 제기한 의혹과 주장이 대체로 사실로 밝혀졌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1978년 말에는 25만 명이 넘는 화교가 베트남에서 쫓겨나고 3~4만 명 가량이 바다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인들은 1970년대 말에 '베트남 보트피플'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이 베트남 난민의 상당수가 사실은 화교라는 사실은 거의 혹은 전혀 듣지 못했다. 예컨대 1978년에 탈출한 베트남 난민 중 85%가 화교였다. 

(베트남 전쟁 이후 베트남 난민이 대거 발생한 경우가 세 차례 있었다. 첫 번째는 1975년에 사이공이 함락되자마자 베트남을 떠난 이들이었고, 두 번째는 1978~1979년 베트남과 중국이 전쟁을 할 때 떠난 사람들이었다. 이 두 차례의 난민 중 70%가 화교였다. 이들 대부분은 나중에 서구에 정착했다. 세 번째는 1988~1989년에 떠난 사람들인데, 이들은 주로 베트남족 사람들이다.) 1979년에는 베트남 외무부의 한 당국자가 외신 기자들에게 베트남이 "화교를 베트남에서 모조리 없애려 했다"고 사실상 인정했다.

 

p.78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개인을 개인으로만 봐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누구든, 누군가의 아들, 형, 사촌으로 , 누군가의 삼촌으로 이해해야 한다. 누구든 그 자신보다 큰 무언가의 일부다

 

- 할레드 호세이니

 

p.96-97

냉전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미국의 아프간 정책은 계속해서 막대한 실패였고, 이는 상당 부분 아프간의 복잡한 부족 정치를 몰랐거나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2009년에 스탠리 매크리스털 장군은 NATO가 이끈 안보유지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는데, 이것은 미국에 대해서도 맞는 말이다. "우리는 아프간 사람들에 대해 충분히 연구하지 않았다. 그들의 필요와 정체성, 비통함은 지역별로, 또 마을별로 매우 다르다." 그 때문에 베트남에서도 그랬듯이, 미국이 아프간에서 취한 거의 모든 조치는 아프간 인구 대다수가 미국에 대해 적대적이 되게 만들었을 뿐이다.

 

특히 미국은 '파슈툰 문제'를 보지 못했고 해결하지 못했다. (해결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파슈툰 사람들은 아프간을 자신의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프간을 세웠고 200년 넘게 지속적으로 통치했다. 그들은 두 개의 세계 초강대국(영국과 러시아)을 무찔렀다. 파슈툰 사람들은 설령 탈레반을 싫어한다 해도 자신이 깊은 분노를 느끼는 라이벌 부족에 자신을 복속시키려 하는 정권은 결코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p.102-104

문제는 여기에서 전후의 일본과 독일이 잘못된 비교 대상이었다는 점이었다. 부족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독일과 일본은 이라크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독일과 일본 모두 민족적으로 매우 동질적이다. 일본은 늘 그랬고 독일은 1945년이면 비아리아인 대부분을 절멸시킨 뒤였기 때문에 그랬다. 즉 전후에 독일과 일본에서의 민주화는 민족적, 종교적 분열이 비교적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불행히도 훨씬 더 적절한 비교 대상이 미국에 정면으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바로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다. 이라크처럼 유고슬라비아는 다민족(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등) 국가였고 민족 간 오랜 반목의 역사가 있었다. 하나만 예로 들면, 제2차 세계대전 때 크로아티아인은 나치의 지원을 받아 세르비아인을 집단수용소에서 수천 명이나 학살했다. 유고슬라비아는 종교적 분열도 깊었고(가톨릭, 동방정교, 무슬림), 시장 지배적 소수 민족도 있었다(크로아티아인과 슬로베니아인이 인구 중 다수인 세르비아인보다 훨씬 부유했다). 국가 정체성은 상대적으로 약했고(이라크처럼 유고슬라비아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만들어진 나라다) 온갖 분열적인 요소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결합시키고 있었던 것은 카리스마적인 군부 독재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강철 주먹이었다. 티토 통치하의 수십 년 동안, 민족적인 긴장이 표면 바로 아래에서 늘 들끓고 있긴 했지만, 유고슬라비아의 다양한 집단은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했고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결혼하는 경우도 꽤 잦았다.

 

그러나 1990년대 초에 민주화가 되자 유고슬라비아에 도래한 것은 평화와 번영이 아니었다. 민주화의 결과로 유고슬라비아가 갖게 된 것은 민족주의적인 선전 선동, 인종 전쟁, 인종 청소였다. 홀로코스트 이래로 유럽에서 본 적이 없는 종류의 극심한 폭력이 벌어졌다. 집단수용소가 다시 나타났다. 세르비아인은 크로아티아인을 죽였고 크로아티아인은 세르비아인을 죽였고 세르비아인은 보스니아 무슬림을 죽였다. 오랫동안 크로아티아인과 이웃으로 살아온 세르비아인은 자신의 지도자가 "우리는 녹슨 수저로 그들을 죽일 것이다. 그것이 더 고통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자 갑자기 그 말에 동조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일본과 독일이 아니라 유고슬라비아를 비교 대상으로 삼았더라면 훨씬 도움이 됐을 것이다. 2003년에 이라크도 다민족 국가였고 수니파 아랍인, 시아파 아랍인, 쿠르드인, 기독교인 등 인종과 종교에 따른 분열이 심했다. (이라크 내 쿠르드인도 대부분 수니파이지만 여기에서 '수니파'는 수니파 아랍인을 말한다.) 또한 이라크도 국가 정체성이 비교적 약했고 수십 년간 하나로 통합될 수 있었던 것은 독재자의 강철 주먹 아래서였다. 또한 유고슬라비아처럼 이라크에도 '시장 지배적 소수 민족'이 있었다.

 

p.112-114

우선 맥매스터는 자신의 부대원에게 현지 집단의 관습, 습관, 태도에 대한 상세한 특강을 집중적으로 듣도록 했다. 조지 패커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 부대는 미국인들이 '남자용 드레스'라고 부르는 아랍 디슈다샤 수십 벌을 구매했다. 그리고 군인과 아랍계 미국인들이 이라크인 역을 맡아 역할극을 하면서 다양한 현실적 시나리오에 대해 대처법을 연습했다. 군인들은 벽면에 온통 시아파 성인과 정치인의 사진이 걸려 있는 집을 보고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결론을 도출해 보는 훈련을 받았다. 군인들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과 서너 번 함께 앉아, 차를 마시면서,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를 하고 난 뒤에야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맥매스터는 자신의 부대원들에게 아랍인을 '하지 놈들 hajiis'이라고 부르는 식의 멸칭을 사용 금지했고, "이라크 사람을 존중하지 않고 대하는 것은 적을 위해 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부대원 중 일부에게 아랍어를 배우게 했고 피비 마르가 쓴 <이라크 현대사>를 수백 권 주문했다. 또한 저지선을 단단히 치고 출입을 통제하는 대신 군 부대원들을 밖으로 내보내 지역 사람들과 소통하게 했다. 신뢰를 쌓고 탈아파르 지역의 복잡한 집단 동학과 권력 구조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맥매스터가 이끄는 부대의 장교 중 한 명은 1주일에 40~50시간을 들여서 탈아파르 내에 있는 수십 개의 부족 지도자들을 한 명씩 만났다. "먼저 시아파 부족장들을 만나서 미국을 신뢰해도 되며 미군이 그들의 동네를 안전하게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에 수니파 부족장들을 만났다. 이들 중 상당수가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반란 세력을 지원하고 있었다."

 

맥매스터는 주요 부족 지도자들과 연합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반란 세력을 무찌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수니파와 시아파가 극단주의자에 맞서 협력하게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극단주의자들의 잔혹함과 무차별적인 살육으로 머리 없는 시신들이 도처에 나뒹굴던 탈아파르는 경악과 공포에 빠져 있었다. 그렇더라도 극단주의에 맞서 수니파와 시아파의 협력을 구축한다는 맥매스터의 계획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수니파는 반란 세력이었고 현지의 수니파 부족들은 경찰을 장악하고 있는 시아파를 증오하고 두려워했다. 하지만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맥매스터는 부족 지도자들을 한 명씩 한 명씩 어렵게 설득해 결국 성공했다. 온건 수니파와 극단 수니파 사이에 쐐기를 박아 이들을 분리하고 수니파와 시아파 부족장들이 협력하도록 함으로써 맥매스터의 부대는 탈아파르에서 반란 세력을 한 골목씩 제거해 나갔다. 맥매스터가 온 지 6개월 만에 탈아파르는 안정을 되찾았고 분파적 폭력은 급격히 감소했다. 

 

탈아파르는 이라크에서 미군이 처음으로 성공한 대규모 반란 진압 작전이었다. 1년 동안 반복되던 실패의 행렬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지점이었다. 맥매스터의 성공을 본보기 삼아 미군은 비슷한 전술을 이라크 중부 알안바르주의 주도인 라마디에서도 시행했다.

 

p.121-123

아마 미국은 과거의 박해자를 용서하고 화해 정책을 편 넬슨 만델라를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1초만 생각해 봐도, 일단 권력을 갖고 나자 알말리키가 수니파를 배제하고 감금하고 박해하고 처형하기 시작한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서고 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알말리키는 모든 화해의 제스처를 내던지고 점점 더 대담하게 분파적인 의제를 밀어붙였다. 그는 수니파를 정치 과정에서 강제로 배제했고 수니파의 평화 집회를 무자비하게 진압했으며 수천 명의 수니파 사람을 분명히 재판도 하지 않고서 수감했다.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알말리키가 "강하고 번성하고 포용적이고 민주적인 이라크"를 만들고 있다고 칭송했지만, 시아파 무장 세력들을 수니파를 상대로 테러를 자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수천 명을 집에서 내쫓았으며 디얄라주에서 재판 없이 72명의 민간인을 처형했다. 점차 모든 배경의 수니파 사람들이 알말리키가 수니파에 대해 인종 청소를 벌이려 하는 이란 정부(시아파)의 꼭두각시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ISIS가 탄생했다. 'ISIL', '다에시', '이슬람 국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ISIS는 무엇이라 정확히 규정하기 어렵다. 국민 국가를 거부하는, 칼리프가 지배하는 판타지 세계? 부모를 밀어낸 알카에다의 자식? 강간, 노예, 희생 제물 의례 등을 자행하는 종말론적 사이비 종교? 하지만 핵심적으로 ISIS는 '시아파가 지배하는 이라크 정부에 의해 배제당하고 학대당하고 박해받는다고 생각한 수니파가 만들고 이끄는 운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ISIS와 알카에다의 차이는(이제 그 둘은 경쟁 관계다) ISIS가 명시적으로 시아파를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는 데 있다. ISIS의 칼리프는 공공연하게 수니파임을 내세우며 '시아파 변절자'를 서구의 비이슬람교도를 죽이듯이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ISIS를 세웠다고 알려져 있는 알자르카위는 미군의 공습으로 숨지기 전에 "모든 시아파는 처형당해야 한다"고 말해 오사마 빈 라덴으로부터 혐오를 샀다. 빈 라덴의 어머니는 시파아다.

 

ISIS의 깜짝 놀랄 만한 성공은 전후 이라크의 민족 정치적인 동학을 모르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이라크의 수니파 아랍인들은 민주주의가 그들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미국이 초안을 잡은 '민족 불문'의 헌법이 무엇이라 이야기하든 간에) 그들의 운명이 다수 민족인 시아파의 손에 좌우되게 만드리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미국이 이라크의 시아파가 수 세기 동안 수니파의 압제와 잔혹함을 모두 뒤로하고 미래를 향해 나가리라고 기대한 것은 순진함의 극치였다. 

 

(대부분까지는 아니라 해도) 많은 수니파 이라크인이 ISIS를 혐오하지만, 시아파가 지배할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그것보다 더 끔찍하고 두려운 일로 여긴다.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수니파 의사나 교수도 ISIS를 알말리키보다 선호하곤 한다. 알말리키는 2014년에 결국 축출됐다. 중동 전문 기자 패트릭 콕번은 이렇게 설명했다. "알말리키가 이라크에서 잘못한 모든 것이 다 그의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수니파 공동체들이 ISIS의 품으로 들어가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니파는 계속해서 권리를 박탈당했다고 느끼고 있으며 알말리키의 뒤를 이은 하이더 알아바디 치하에서도 주변화되고 있다고 느낀다. 카네기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에도 이라크의 수니파 사람들 중 25%가 "여전히 이슬람 국가를 지지하며, 이라크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모술에서는 인구 다수가 이슬람 국가를 지지하거나 이 주제에 대해 무관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미국이 ISIS를 격퇴하는 것에만 초점을 두고 있는 사이 이 모든 상황에서 진짜 수혜를 입은 곳은 시아파가 지배하는 이란이었다. 미국은 이라크전쟁에 1조 달러 이상을 썼고 4500명 가량의 미국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사담 후세인을 축출하고서 14년이 지난 뒤에도 이란의 권력은 더 강해지고 있고, 이제는 워싱턴보다 테헤란이 바그다드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p.135

19세기 프랑스의 사회심리학자로, 군중 심리학을 창시한 귀스타브 르 봉의 말을 빌리면, 집단의 일부일 때 개인은 "문명의 계단에서 몇 단계를 내려간다." 혼자 있으면 "교양 있는 개인일지 모르지만" 집단으로 있으면 "즉흥성, 폭력성, 맹렬함, 그리고 열정과 영웅주의 같은 원초적 존재의 특성을 갖게 된다." 다른 이들과 함께 집단으로 행동하는 개인은 '혼자 있었더라면 억제했을 본능이 굳이 억제되지 않고 표출되도록 허용하는 막강한 권력의 느낌'을 얻게 된다.

 

p.146-147

빈 라덴은 글로벌 차원의 '우리 대 저들' 구도를 만들었고, 무슬림에게 고조된 역사적 전투에서 반란자들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요구했다.

 

한편 ISIS는 여기에 복원된 칼리프의 꿈을 보탬으로써 현재의 운동을 영광스러웠던 이슬람 제국의 과거와 직접적으로 연결시켰다. 또한 이슬람 집단들 내부의 중층적인 분열을 한층 더 강도 높게 활용했다. 우선 ISIS는 자신을 알카에다의 적수로 놓았다. 알카에다 지도자들이 ISIS 일원들은 "칼리프의 제국을 선포하면서 자신을 기망하는 단순무지한 자들"이라고 비웃자 ISIS 대변인은 이렇게 반박했다. "낮은 계층을 잘라 내려 하는 자는 모두 자신의 머리가 잘릴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ISIS는 시아파는 다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오랜 분열을 재점화했다.

 

그렇더라도 ISIS의 핵심 메시지는 무슬림의 '치욕'을 이야기하면서 전 세계 무슬림에게 수 세기 동안의 압제를 딛고 이슬람의 영예로운 재탄생에 참여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빈 라덴이 죽고 3년이 지난 뒤 2004년에 이슬람 국가의 '칼리프'인 아부 바르크 알바그다디는 이렇게 선언했다.

 

불명예의 대양에 빠진 채 치욕의 우유를 먹고 자라면서 가장 사악한 자들에게 지배받았던 수 세대가 지난 뒤, 무지의 어둠 속에서 기나긴 잠에 빠졌던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이제 일어설 때가 왔다.

 

비슷하게 ISIS가 인터넷에서 퍼뜨리는 프로파간다(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번역되어 전파되고 있다)도 수니파 무슬림에게 "너의 칼리포 주위로 모여서 오랫동안 너의 것이었던 자리, 전사들과 왕들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의기양양하게 촉구한다.

 

막대한 집단 불평등을 배경으로, 극단주의 집단은 일원들에게 정확하게 기존의 사회 제도가 제공하지 않았던 것을 제공한다. 부족, 소속감, 목적의식, 증오하고 죽여도 되는 적, 기존의 양극화를 뒤집을 기회, 치욕을 우월함과 승리로 바꿀 기회 등, 이것이 알카에다와 ISIS가 사용한 공식이다.

 

그들은 단순히 종교적 이데올로기만 설파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집단 정체성을 통해 일원들에게 지위와 권력을 제공한다. 영웅적 임무(거대한 사탄을 무찌르는 것이든 이슬람 칼리프 제국을 재건하는 것이든 간에)를 가진 알라의 전사가 되게 해 주는 것이다. 테러리즘 전문가인 스콧 아트란은 "그들을 복돋우는 것은 코란이나 종교적인 가르침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단지 대의만을 위해 죽거나 죽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 그들의 집단을 위해 죽거나 죽인다. 집단의 대의는 생물학적 타인들 사이에 가상의 가족을 만든다. 즉 그들은 형제애, 부성애, 모성애, 조국애, 토템, 부족을 위해 죽거나 죽인다."

 

p.157-159

남미에는 '인종주의가 없다'고들 한다. 지위가 높든 낮든 모두가 '혼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미 사람들은 백인이거나 흑인이거나 한것이 아니라 '모두가 메스티소'라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남미 사회는 기본적으로 '피부색 지배 정치'사회다. 사회 계층의 구성을 보면 신장이 크고 피부색이 하얗고 유럽 혈통인 지배층이 맨 위에, 신장이 작고 피부색이 짙고 토착민 혈통인 대중이 맨 아래에 있고, 그 사이에 수많은 단계가 있다.

 

피부색 지배 정치의 뿌리는 식민지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나 말레이시아와 달리 스페인 식민지에서는 본토 사람들이 토착민 여성들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손을 낳았다. 처음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연대기 기록자들은 아메리카 인디언 여성들의 매력을 열정적으로 묘사했다. 한 기록은 인디언 여성들이 "아름답고 약간 음탕하며, 스페인 정복자들을 좋아한다"고 언급했고, 또 다른 기록에는 인디언 여성들이 "매우 수려하고 굉장한 사랑꾼이며 애정이 많고 열정적인 몸을 가지고 있다"고 되어 있다. 한 가지 중요한 의미에서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은 여성에 대한 정복이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인디언 여성을 강제로 얻기도 하고 평화적인 수단으로 얻기도 했다." 때로는 인디언 지도자들이 우정의 징표로 여성을 넘겨주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타인종 간 결혼, 축첩, 일처다부제가 매우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인종적 혼합'이 이뤄진 것을 보고 남미의 식민주의자들이 인종에 따른 피부색의 장벽을 기꺼이 초월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카스타casta'라고 불리는 신분 제도가 생겨났다. 여기세어 사람들은 인종적 '순수성'에 따라 계급이 지워지며 맨 위는 백인이다.

 

스페인 식민 치하의 남미에서 생겨난 각 계급의 명칭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른데, 다음은 18세기 '뉴스페인' 지역에서 쓰이던 명칭이다.

 

1. 스페인 남성과 인디언의 아이는 메스티소다.

2. 메스티소와 스페인 여성의 아이는 카스티소다.

3. 카스티소 여성과 스페인 남성의 남자아이는 스페인 남성이다.

4. 스페인 여성과 니그로의 아이는 물라토다.

5. 스페인 남성과 물라토 여성의 아이는 모리스코다.

6. 모리스코 여성과 스페인 남성의 아이는 알비노다.

7. 스페인 남성과 알비노 여성의 아이는 토르나 아트라스다.

8. 인디언과 토르나 아트라스의 아이는 로보다.

9. 로보와 인디언 여성의 아이는 잠바이고다.

10. 잠바이고와 인디언 여성의 아이는 캄부호다.

11. 캄부호와 물라토 여성의 아이는 알바라사도다.

12. 알바라사도와 물라토 여성의 아이는 바르시노다.

13. 바르시노와 물라토 여성의 아이는 코요테다.

14. 코요테 여성과 인디언의 아이는 샤미소다.

15. 샤미소 여성과 메스티소의 아이는 코요테 메스티소다.

16. 코요테 메스티소와 물라토 여성의 아이는 아히테 에스타스다.

 

스페인 남성이 '순수 혈통'이라고 여겨진 것은 아이러니하다. 중세 무렵이면 이미 이베리아반도에 켈트인, 그리스인,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 로마인, 서고트인, 유대인, 아랍인, 베르베르인, 집시 등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고 이들 사이에 결혼도 흔히 이뤄졌기 때문이다.

 

p.161-162

베네스엘라뿐 아니라 남미 전역에 널리 퍼져 있는 '피부색 불문'의 신화, 모두가 메스티소라는 신화는 부가 백인의 손에 막대하게 집중되어 있고,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가난한 최하층민은 대개 피부색이 짙은 토착민이나 아프리카계라는 사실을 편리하게도 가려 줬다. 그와 동시에 이 신화는 가난한 사람들이 인종이나 민족을 기치로 결집하는 것을 억압했다.

 

그래서 1998년 대선 직전에 베네수엘라 지배층은 자기 나라에 인종주의가 없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지만 사실 극소수의 코즈모폴리턴적 '백인'(스페인 식민주의자의 후손인 옛 백인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들어온 이민자)이 베네수엘라의 경제, 정치,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임을 가장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미인대회였다. 백인이라는 것은 완벽하다는 것과 동의어였다. 금발의 미스 베네수엘라 사에즈(대선에서 차베스에게 패배한 후보)는 언론으로부터 '전 우주의 미인 대회 역사상 가장 완벽한 여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반대로 넓은 코, 큰 입, 펠로 말로(pelo, malo, '나쁜 머리카락'이라는 뜻)와 같은 흑인이나 토착민의 특징을 보이는 외모는 추한 것으로 여겨졌다. (머리카락을 펴 주는 서비스는 베네수엘라에서 또 하나의 매우 수익성 있는 사업이다.) 유럽 중심적인 미의 기준은 흑인, 토착민, 그 밖의 상대적으로 짙은 피부색을 가진 많은 베네수엘라인에게도 내면화 됐다.

 

p.176

그렇다면 인간이란 얼마나 키메라와 같은 존재인가! 인간이란 얼마나 새롭고, 얼마나 괴물 같고, 얼마나 혼돈이고, 얼마나 모순이며, 얼마나 천재인가! 나약한 지상의 벌레, 진리의 저장고이자 불확실성과 오류의 하수구, 우주의 영광이자 우주의 쓰레기.

 

- 블레즈 파스칼

 

그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 로마서 1장 22절

 

p.198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투인 사람들에게 번영 복음은 희망, 방향성, 그리고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과의 공동체 의식을 제공한다. 이것은 전혀 그들을 대표하지 않는 '불평등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 집단들과는 매우 다르다. 동시에 번영 복음은 그들에게 더 존엄하고 위엄 있는 자아 이미지를 갖게 해 준다. 보울러가 설명했듯이, 번영 복음의 가르침은 "신도들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어깨를 쫙 펼 수 있게 해준다." 오스틴은 자신의 회중에게 그들이 '희생자'가 아니라 '승리자'라고 말한다. 크레플로 달러는 가난한 사람도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번영 복음 신도들은 자신을 '사회의 억압받는 사람' '99%' '가진 것 없는 사람'이라고 묘사하지 않고, 축복받았고 희망이 있고 신이 더 사랑하시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p.204-205

트럼프와 WWE의 관계, 그리고 그가 WWE 퍁들에게 가졌던 호소력을 이해하는 것은 2016년 선거의 소우주를 이해하는 것이다. 프로레슬링 대회인 '레슬 마니아'가 그렇듯이 트럼프 지지자에게도 정작 중요한 것은 쇼맨십과 상징이다. 진보주의자들이 트럼프의 성적인 과감함, 연속되는 거짓말, 상대에 대한 악랄한 비방에서 비문명과 야만을 봤다면, 트럼프 지지자들은 익숙하고 유쾌한 장관을 봤다. 또 프로레슬링의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트럼프의 세계에서도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대안적 사실'은 거짓이 아니라 오락적 서사를 한층 더 활성화해 주는 스토리라인이었다. 이런 렌즈로 보면 트럼프는 프로레슬러 헐크 호건이나 '스톤 골드' 스티브 오스틴 같은 영웅이다. 악의 세력을 짓밟고 '정치적 올바름'에 맞서 성스러운 전쟁을 치르며 공격적인 남성성을 다시 한번 유행이 되게 만들겠다고 약속하는, 힘 있는 거인인 것이다. 정치 평론가 살레나 지토는 언론이 트럼프를 "액면 그대로 보면서 진지하게 취급하고 있지는 않은" 반면 트럼프 지지자들은 트럼프를 "액면 그대로 보지 않으면서 진지하게 취급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을 비틀어서, 트럼프 후원자이자 짧은 기간 동안 백악관 소통 담당자였던 앤서니 스카라무치는 이렇게 말했다. "트럼프를 액면 그대로 보지 말고 상징으로 보라."

 

p.224-225

미국은 전례 없이 부족적인 불안감이 만연한 시기에 들어섰다. 200년 동안 미국의 백인은 논란의 여지없이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지배적인 다수였다. 하나의 정치적 부족이 매우 압도적으로 지배적일 떄는 마음대로 남들을 박해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너그러울 수도 있다. 더 보편 지향적이고 더 계몽적이고 더 포용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1960년대에 와스프가 부분적으로는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더 많은 유대인, 흑인, 기타 소수자에게 아이비리그의 문을 열었듯이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에서는 어느 집단도 지배력을 안전하게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모든 집단이 공격받는다고 느끼고 다른 집단의 공격 대상이 됐다고 느낀다. 일자리나 기타 경제적 이득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자격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집단 간의 제로섬 경쟁으로, 순수한 정치적 부족주의로 퇴락한다.

 

p.236

오늘날 정체성 정치가 가고 있는 방향에 모든 좌파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문화적 도용에만 온통 초점이 쏠리고 있는 상황에 힘 빠져 한다. 한 진보적인 멕시코계 미국인 법대 학생은 "만약 우리가 옷차림 문제 가지고도 스스로를 상처받게 둔다면 어떻게 주거퇴거 요구서에 대한 트라우마를 다룰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진보 진영은 '늑대다!'를 너무 많이 외쳤다. 모든 것이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이면 아무것도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진짜 늑대인 트럼프가 나타났을 때 아무도 그들의 외침을 듣지 않았다."

 

p.241

문제의 핵심은 간단하지만 근본적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흑인, 아시아계, 히스패닉, 유대인 등이 미국에서 자신의 인종적, 민족적 정체성에 기반해 자부심과 연대감을 느낄 수 있게 허용된, 아니 독려된 반면, 백인 미국인은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는 경고를 들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부족이 고유하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무언가를 가졌다고 믿고 싶어 한다. 이것이 부족적인 본능의 모든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 비백인 인구는 이런 식으로 부족 본능에 빠져들도록 독려받았다. 하지만 백인 미국인은,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백인 정체성이란 누구도 자랑스러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p.246-247

소수 집단에게 고마워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시혜자가 준 것에 감사하라는 의미고 당신이 빚을 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의 역사에 대한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 기회의 땅을 세웠고 너희를 초대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완벽하게 하지 못했다고 해서 이제 너희가 우리를 악마라고 비난하는 것이냐?

 

많은 미국인이 인종주의적인 과거를 매번 꺼내지는 않는 채로 미국의 역사와 위대함을 찬양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노예제에 대해, '눈물의 길' (인디언 강제 이주)에 대해, 인종 분리 정책에 대해 매번 사과하지 않은 채로 건국의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미국이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는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런데 미국에서 소수자가 다수가 되면 이 이야기가 달라질지 모른다고 두려워한다. 역사책은 미국을 억압의 땅, 인종주의의 땅, 제국주의의 땅이라고 바꿔 묘사할지도 모른다. 사랑받는 고전 <빨간 머리 앤>은 백인우월주의를 퍼뜨리는 책이라고 금지될지도 모른다. 제퍼슨기념관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오스카 작품상은 <노예 12년> 같은 영화쯤 되어야 탈 수 있게 될지 모른다. 타네히시 코츠의 말을 빌리면, 미국은 '다수주의자 돼지들'의 나라로 추락하게 될지 모른다. 

 

소수자가 미국을 이렇게 보고 있다고 믿는 백인은 당연하게도 소수자가 다수가 되리라는 전망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그들의 애국심은 (의식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앞으로도 백인이 계속 미국의 정치, 문화, 정체성을 주도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p.253-254

다른 부족 사람들을 단순히 서로 접촉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점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외집단 구성원에 피상적이거나 최소한도로 노출될 경우에는 집단 간 분열을 오히려 더 악화시킨다. 하버드대학교 교수 라이언 에노스의 연구에 따르면, 기차에서 통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 사람이 단지 스페인어로 대화를 한 것만으로도 (통근하는 사람 대부분은 백인 진보 성향 사람이었다) 통근자들은 이민에 대해 상당히 더 보수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물며 타집단 사람과 '부정적인' 상호작용을 하게 될 때는 당연히 적대가 증가한다. 요컨대, 상이한 집단 사람들을 그저 한 곳에 모이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것이 정치적 부족주의를 악화시킬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개인과 개인이 대면해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 분열이 심각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가치 있는 일 중에 어렵지 않은 일은 없다. 상이한 부족의 사람들이 서로를 같은 인간으로, 결국에는 바라는 바가(친절, 존엄,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전 등)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보게 되면, 태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뉴욕의 한 콥트교회 사제가 말했듯이, "겸손이 중재자다. 언제나 그것이 당신과 타인 사이의 가장 빠른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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