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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만한글

정성일 인터뷰

by Diligejy 2017. 9. 7.

1부


밑줄그은 부분


원칙이 하나 있다. 내가 군대에서 맹세한 건데,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하루에 한 페이지 이상은 반드시 읽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하고의 약속이다. 두 번째 약속은 아무리 짧은 문장이라도 하루에 한 가지 이상 글을 쓴다는 것이다. 때로는 단상일 수도 있고 때로는 긴 글일 수도 있다. 세 번째는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세편이상 영화를 본다는 것이다.


고전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의 사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때, 그 배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한다.. 내가 명석하다면 그 답을 혼자 생각했겠지만 그 정도 지혜는 가지고 있지 못하니 자꾸 다른 사람 견해를 구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동시대의 철학자와 미학자, 소설가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서로 접속을 하는 거다. 정윤철 감독도 고전영화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동시대를 사고하기 위해 현대영화도 보고 동시대 철학책도 읽지 않나. 그렇게 하는 까닭은 이 시대에 살아가기 위한 ‘좌표’를 얻기 위함이다. 칸트와 헤겔과 스피노자는 위대하다. 그러나 그들을 읽으면서 2007년 남한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좌표를 얻기란 쉽지 않다.


 아도르노를 인용하고 싶다. ‘자본주의는 지식을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지식을 간단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점점 사고를 마비시키고 논리 자체를 무시한다. 결정적으로 말하자면 철학은 점점 광고 카피가 되어가고 있다.‘


당신의 애티튜드는 무엇이냐고 묻고 싶은 거다. 나는 한쪽을 지지하는 비평가에 대해선 반감이 없다. 가끔 보면 모든 영화에 별 네 개나 세 개를 주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취향을 가진 비평가인가. 나는 그럴 때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 글은 읽지 않아도 알아, 그 사람이 누구 좋아하는지 알고 있지, 이것이 매너리즘에 빠지면 문제가 되겠지만 취향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사람의 취향 자체를 알 수 없을 만큼 공정함을 내세우는 것은 더욱 의심스럽지 않은가.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의 차이는 무엇인지. 차이밍량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나쁜 영화는 지구의 종말을 걱정하는 영화고 좋은 영화는 나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다. 나는 거기에 진리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40&aid=0000007578


2부


밑줄그은 부분


당신이 자주 인용하는 발터 벤야민의 말이 생각난다. 정치적인 것을 미학적으로 다루는 것은 파시즘이고 미학적인 것을 정치적으로 다루는 것은 자본주의라고.


창조를 다룰 때는 미학과 정치, 혹은 삶과 사회, 혹은 과거와 미래 말하자면 지나간 시간과 도래해야하는 시간, 그 둘 사이의 중재의 문제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는 영화에서의 대중성이라는 문제를 다른 판본으로 말하자면 상품성이라고 생각한다. 둘은 같은 말의 말장난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영화가 대중성을 껴안는 한편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위해서 나아가던 시대는 영화의 고전주의시대였다(3,40년대). 예를 들면 우리는 고전주의 회화를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상주의를 통과하며 그림에서 형상이 부서졌고, 그림은 보는 이에게 교양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소통을 하고 싶다고 고전주의 그림을 그린다면 그것은 퇴행이다. 영화는 계속 앞으로 가고 있는 거다. 그 100년이라는 역사를 왜 무효화시키려고 하는가. 영화도 관객에게 교양과 역사에 대한 이해와 시네마테크적인 경험과 영화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관객은 게으르게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즉각적으로 자기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영화를 원시적인 상태로 돌려보내는 거다. 영화는 고전주의 시대를 통과했고, 이제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가능성의 길을 가고 있다. 그것을 왜 퇴행적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심지어 감독들이 왜 자꾸 고개를 뒤로 돌려 그런 퇴행을 바라보는가. 나는 거기에 대해서 분개하는 쪽이다.


영화에서 현대라는 문제를 다루기가 굉장히 까다로운 까닭은 영화가 이미 근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회화의 결론 중의 하나가 인상주의에서 나왔다. 그래서 대상을 그리는 대신에 대상과 그림 사이에 있는 공기를 가지고 오고 싶어한 거다. 공기를 그릴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공기에 떨어지는 빛의 스펙트럼을 그리는 것뿐이다. 문제는 거기서 한걸음 나가는 순간 형상이 부서진다는 것이다. 그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그러니까 세잔 다음으로 도착하는 인물은, 피카소와 뒤샹과 베이컨이다. 그렇게 형상이 부서지기 시작하다보면 그다음부터 세상은 정확하게 몬드리안의 그림이 된다. 선과 면만 남는 거다.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끊임없이 반성적 성찰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같은 것을 반복하거나 뭔가 머뭇거리고 있거나 심지어 퇴행하고 있을 때, 그것을 지켜보는 일은 괴롭다. 무언가 앞으로 나아간 감독의 영화를 볼 때, 그리고 그것을 쫓아가려고 할 때, 비평가도 한걸음 나아간다. 같이 성장하는 것이다. 나쁜 감독의 영화를 계속 쓰면 비평가도 퇴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겐 그 세 명의 감독이 매우 소중하다.


 내가 노무현 시대에 가장 납득할 수 없었던 스타는 문근영이었다. 문근영은 개인으로서는 착한 소녀지만, 저 소녀에게 스타라고 불릴 만한 힘이 있는지 의아했다. 흥미로웠던 것은 문근영에게 붙은 국민 여동생이라는 수식어였다. 왜 스타가 여동생이어야 하는가. 말하자면 가족주의인 것이다. 가족이 되어야만 스타를 사랑할 수 있다.


정확하게는 윤리적이고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질문을 견딜 수 있는 엔딩을 좋아한다.


영화 쪽에서 에필로그를 볼 것인가, 에필로그 쪽에서 영화를 볼 것인가, 에 따라 영화가 달라진다.


 나는 정치가 너무 싫다고 하면서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 놀러가는 것도 결국 정치적 행위인 것이다.


어떤 인간에게도 생명을 포기할 권리는 없다. 그것은 비윤리적이다. 사회적으로 자살하겠다고 하는 순간 사람은 훨씬 곤란한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자기를 진짜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40&aid=0000007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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