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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2)

by Diligejy 2015. 11. 21.

p.80

고대에는 심지어 사람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까지 그 사람의 '무엇', 곧 본질을 나타내주는 식으로 지었지요. 예를 들어 구약성서의 아브라함은 그 이름에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 있고, 그의 아내 사라는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 밖에도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 나다니엘은 '하나님이 주심'이라는 의미고요. 이사야는 '야훼의 구원', 예레미야는 '야훼가 세우다'라는 뜻이지요.

이처럼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 이름이 그 사람의 신분이나 특징 또는 삶의 목적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곧 새로운 신분이나 새로운 삶의 목적을 얻었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신이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람을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준 것이 대표적이지요(창세기 17:5).

 

p.87~88

우리가 무규정자, 무한정자라고 부른 것을 그는 아페이론(apeiron), 곧 '무한자'라고 불렀고, 그것이 만물의 궁극적 근거이자 신이라고 했습니다.

 

탈레스의 동료이자 최초의 지도(地圖) 제작자이기도 했던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하는 아페이론은 우선 시간적으로 "변화를 통해 형성된 것도 아니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죽음도 쇠퇴도 모르고",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것이지요. 동시에 공간적으로는 너무나 광대무변하여 크기를 측정할 수 없으며, "만물을 자신 안에 포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페이론은 "신적인 것으로서 만물을 포괄하고 횡단하며 보호하고 조종"하지요.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 개념을 통해 신의 무한성을 처음으로 규정한 철학자인 것입니다.

 

하지만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하는 아페이론은 그것이 아무리 광대무변한 신적인 것이라 할지라도-마치 오늘날 양자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소립자의 장'이 그렇듯이-형태만 없을 뿐 어디까지나 '존재물'이며, 다분히 자연학적 개념이었어요. 그런데 이것을 형이상학적으로 끌어올려 '존재'라고 이름 붙인 사람이 바로 파르메니데스였습니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존재'는 비물질적 무한자이자 유일자였지요. 그의 잠언에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 교설을 되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존재는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일자(oulon mounoqenes)이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미래에 있게 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있으며,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을, 이후 자신의 존재론 체계 안에서 모든 이데아의 근거인 '일자(一者, en)' 또는 '선자체(善自體)'로 정립한 사람이 플라톤이였고요, 그 체계를 종교화한 사람이 플로티노스(Plotinos, 205~270)였습니다.

 

플로티노스도 '일자'를 신이라고 불렀는데, 그가 말하는 일자는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규정할 수 있는 것들의 바닥에 깔린 심연이며, 한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한정할 수 있는 것의 바탕이지요. 당연히 일자는 어떤 존재물이 아니고 그 일자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p.92~93

히브리어 '모세(Mosheh)'는 '물에서 이끌어낸 이'라는 뜻이에요(출애굽기 2:10). 이 아이가 자라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옵니다.

 

모세는 이집트 왕궁에서 다른 왕자들과 함께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랐어요. 그러나 마흔 살이 되었을 때 자기 동족을 괴롭히는 이집트인을 죽이고 이집트를 떠나 미디안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그러고는 그곳의 한 제사장 딸과 결혼해 그 후 40년을 양치기로 살지요. 그러던 중 모세는 호렙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난 신을 만나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라는 명을 받습니다(출애굽기 3:1~10).

 

하지만 모세는 그 일이 도통 내키지 않았고, 그래서 굳이 자기를 이집트로 보내려는 신에게 다소 불손한 의도를 감춘 채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까"(출애굽기 3:13). 신이 자기에게 맡기려는 사역을 빌미로 신의 이름을 물은 것입니다.

 

모세는 신이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는 속으로, 신은 어쨋든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더는 이집트로 가라는 소리도 못할 것이라는 약삭빠른 계산을 했던 겁니다. 요컨대 그의 이 질문은 신에게 이름을 밝히든지 아니면 자기를 이집트로 보내는 명을 거두든지 간에 양자택일 하라는 뜻이었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신이 선뜻 자기 이름을 밝힌 겁니다.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ehyeh asher ehyeh)"라고 말이지요(출애굽기 3:14).

 

알고 보면 참으로 놀라운 뜻이 담긴 신의 대답은 그리스어로 된 최초의 구약성서 <70인 역>에서 "나는 있는 자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탁월한 번역이지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때 존재와 존재물이 혼동될 수 있는-즉 존재가 실체라는- 그리스 철학적 요소가 본의 아니게 스며들어 히브리어 표현의 근본적 의미를 변질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자신의 있음'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에흐예'가 '있는 자'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p.93

그리스 철학에서는 존재(to on, einai)가 곧 실체(ousia)다. 예컨대 플라톤의 존재인 이데아(idea)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인 형상(eidos)은 개개의 사물들에게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그것의 '본질'을 부여함으로써 실제로 '존재'하게 하는 실체다. 그래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그리스 철학에서 존재라는 개념에는 항상 본질이 붙어 다니며, 그 결과 본질과 존재가 함께 있는 존재물과 혼동될 여지가 생겼다. 그러나 신은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존재물과 같지만, 본질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와 다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을 단순히 존재라고 하지 않고 '존재자체(ipsum esse)'라고 구분해서 부른 것은 그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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