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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박태균의 이슈 한국사(2)

by Diligejy 2015. 11. 28.

p.39~41

6.3 사태는 단순히 한일협정에 독도가 포함됐느냐 안 됐느냐 하는 것 때문에 발생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시위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김-오히라 메모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중앙정보부장은 김종필이었고, 일본의 외상은 오히라 마사요시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 1962년 11월 일본에서 비밀 회담을 갖습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한 합의를 하려는 목적이었죠.

 

물론 1945년 이후에 한일 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조약 직후부터 한국과 일본은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다만 이러한 협상이 우리나라에서 4.19혁명과 5.16쿠데타를 거치면서 10년 넘게 합의점을 찾지 못했던 거죠.

 

우리보다 미국이 한일관계에 더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당시 한국과 일본의 관계 정상화가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동북아시아에서 중국과 북한을 봉쇄하기 위해서는 자유진영인 한국과 일본이 관계를 정상화하고 협력하는 것이 필요했고, 이것이 미국의 중요한 정책 방향이었습니다. 미국은 1950년대부터 일본의 군사적 역할을 강화하고 한국과 일본 사이의 군사적 협력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단지 한국의 반일감정, 일본 시민사회의 군대 보유 반대로 인해서 이러한 노력이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던 거죠. 이미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조약에 집단적 자위권이라는 내용이 포함될 정도로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화를 지지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일본 내에서 극우 세력들이 정권을 잡자 미국은 본격적으로 일본의 군사적 역할 강화를 지지하기 시작한 거죠. 미국이 2014년 말 한국 시민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미일 군사정보협약을 밀어붙였던 것도 일본의 군사적 역할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전세계에는 미국이 돈을 써야 할 곳이 너무 많은데 동북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어느 정도 그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한국에 돈을 너무 많이 지출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미국은 일본에 한일협정을 빨리 맺어서 한국을 좀 도와주라고 강하게 요구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해방된 지 얼마 안 됐고 일본에 대한 감정도 매우 나빴습니다. 또 일본도 완전히 경제부흥에 성공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한일협정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양국 모두 이런 상태였지만 미국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로가 자기에게 유리하게 협정을 맺으려고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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