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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

by Diligejy 2015. 12. 27.

[p.22

<사랑은 경작되는 것>

 

사랑이란 생활의 결과로서 경작되는 것이지 결코 갑자기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한 번도 보지 않은 부모를 만나는 것과 같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까닭도 바로 사랑은 생활을 통하여 익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또 형제를 선택하여 출생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사랑도 그것을 선택할 수는 b다. 사랑은 선택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사후(事後)에 서서히 경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처럼 쓸데없는 말은 없다. 사랑이 경작되기 이전이라면 그 말은 거짓말이며, 그 이후라면 아무 소용없는 말이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이 평범한 능력이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이다. 따라서 문화는 이러한 능력을 계발하여야 하며, 문명은 이를 손상함이 없어야 한다.

 

Das bete sollte das liebste sein

가장 선한 것은 무릇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

 

[p.31

나는 어린이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중요한 것은 '첫 대화'를 무사히 마치는 일이다.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은 서로의 거리를 때에 따라서는 몇 년씩이나 당겨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꼬마들에게 던지는 첫 마디는 반드시 대답을 구하는, 그리고 대답이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만일 '얘, 너 이름이 뭐냐'라는 첫마디를 던진다면 그들로서는 우선 대답해줄 필요를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는 불쾌감으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빙글뱅글 돌아가기만 할 뿐 결코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반드시 대답을 필요로 하는 질문을 그리고 어린이들이 가장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놀림이 전혀 없는 질문을 궁리하여 말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p.49

세상의 벼랑 끝에 서서 이처럼 허황된 낙관을 갖는다는 것이 무슨 사고(思考)의 장난 같은 것이지만 생명을 지키는 일은 그만큼 강렬한 힘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것이다. 개인의 생명이든, 집단의 생명이든 스스로를 지키고 지탱하는 힘은 자신의 내부에, 여러 가지의 형태로 곳곳에 있으며 때때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내가 지금부터 짊어지고 갈 슬픔의 무게가 얼마만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감당해낼 힘이 나의 내부에, 그리고 나와 함께 있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풍부하게, 충분하게 묻혀 있다고 믿는다.

 

슬픔이나 비극을 인내하고 위로해주는 기쁨, 작은 기쁨에 대한 확신을 갖는 까닭도, 진정한 기쁨은 대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약 물(物)에서 오는 것이라면 작은 기쁨에 대한 믿음을 갖기가 어렵겠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라면 믿어도 좋다. 수 많은 사람을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p.59~60

나는 나의 내부에 한 그루 나무를 키우려 합니다. 숲이 아님은 물론이고 정정한 상록수가 못됨도 사실입니다. 비옥한 토양도 못되고 거두어줄 손길도 창백합니다. 염천과 폭우, 엄동한설을 어떻게 견뎌나갈지 아직은 걱정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 이 나무는 나의 내부에서 심은 나무이건만 언젠가는 나의 가슴을 헤치고 외부를 향하여 가지 뻗어야 할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과거에다 심은 나무이지만 미래를 향하여 뻗어가야 할 나무입니다. 더구나 나는 이 나무에 많은 약속을 해두고 있으며 그 약속을 지킬 열매를 키워야 하기 때문에 당장은 마음 아프더라도 자위보다는 엄한 자기 성찰로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p.164

숱한 사연과 곡절로 점철된 내밀한 인생을 모른 채, 단 하나의 상처에만 렌즈를 고정하여 줄곧 국부(局部)만을 확대하고 춘화적(春畵的) 발상이 어안(魚眼)처럼 우리를 왜곡하지만 수많은 봉별(逢別)을 담담히 겪어오는 동안,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파낸 한 덩이 묵직함을 함께 나누는 견실함을 신뢰하며, 우리 시대의 아픔을 일찍 깨닫게 해주는 지혜로운 곳에 사는 행복감을 감사하며, '세상의 슬픔에 자기의 슬픔 하나를 더 보태기'보다는 자기의 슬픔을 타인들의 수많은 비참함의 한 조각으로 생각하는 겸허함을 배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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