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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감옥으로부터 사색(2)

by Diligejy 2016. 1. 27.

p.238~239

벽의 기능은 우선 그 속의 것을 한정하는 데 있습니다. 시야를 한정하고, 수족을 한정하고 사고를 한정합니다. 한정한다는 것은 작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넓이는 좁아지고 길이는 짧아져서 공간이든 시간이든 사람이든 결국 한 개의 점으로 수렴케 하여 지극히 단편적이고 충동적이고 비논리적인 편향을 띠게 합니다. 징역 사는 사람들의 첨예한 감정은 이러한 편향성이 축적 강화됨으로써 망가진 상태의 감정입니다. 망가져버린 상태의 감정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것이 관계되어야 할 대립물로서의 이성과의 연동성이 파괴되고 오로지 감정이라는 외바퀴로 굴러가는 지극히 불안한 분거(奔車)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 짝을 얻지 못한 불구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망가진 상태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더욱 복잡하다는 사실입니다. 우연히 시계를 떨어뜨려 복잡한 부속이 망가져버렸다면 시계의 망가진 상태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복잡하다는 명제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벽으로 인하여 망가진 감정을 너무나 단순하게 처리하려 드는 것을 봅니다. 감정을 이성과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이성에 의하여 감정을 억제하도록 하는, 이를테면 이성이라는 포승으로 감정을 묶어버리려는 시도를 종종 목격합니다.

 

이것은 대립물로서의 이성을 대립적인 것으로 잘못 파악함으로써 야기된 오류입니다. 감정과 이성은 수레의 두 바퀴입니다. 크기가 같아야 하는 두 개의 바퀴입니다. 낮은 이성에는 낮은 감정이, 높은 이성에는 높은 감정이 관계되는 것입니다. 일견 이성에 의하여 감정이 극복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경우도 실은 이성으로써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높이에 상응하는 높은 단계의 감정에 의하여 낮은 단계의 감정이 극복되고 있을 따름이라 합니다.

 

감정을 극복하는 것은 최종적으로는 역시 감정이라는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뜻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감정의 억압이 아니라 이성의 계발(啓發)입니다. 그리고 이성은 감정에 기초하고, 감정에 의존하여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노력은 벽의 속박과 한정과 단절로부터 감정을 해방하는 과제와 직결됩니다.

 

p.311~312

우리가 인식하거나 서술하려는 대상이 비교적 간단한 한 개의 사물이나 일개인인 경우와는 달리 사회나 민족이나 한 시대를 대상으로 삼을 경우 그 어려움은 실로 막중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상이 이처럼 거대한 총체인 경우에는 필자의 관찰력이나 부지런함 따위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필자의 문장력이나 감각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회 역사의식이나 철학적 세계관에 기초한 과학적 사상체계가 갖추어져 있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자료를 동원하고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구사한다 해도 결국은 코끼리를 더듬는 장님 꼴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사고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바로 대상과 필자의 '관계'라 생각합니다. 대상과 필자가 어떠한 관계로 연결되는가에 따라서 얼마만큼의 깊이 있는 인식이, 또 어떠한 측면이 파악되는가가 결정됩니다. 이를테면 대상을 바라보기만 하는 관계, 즉 구경하는 관계 그것은 한마디로 '관계 없음'입니다. 구경이란 말 대신 '관조'라는 좀더 운치 있는 어휘로 대치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관조만으로 시작되고 관조만으로서 완결되는 인식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p.334

왜냐하면 작은 실패가 있는 쪽이 없는 쪽보다 길게 보아 나은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작은 실패가 있음으로 해서 전체의 국면은 '완결'이 아니라 '미완'에 머물고 이 미완은 더 높은 단계를 향한 새로운 출발이 되어줍니다. 더구나 작은 실패는 사람을 더 겸손하게 하고 자신과 사물을 돌이켜 보게 해줍니다. 괘사에도 완결을 의미하는 '기제(旣濟)'는 "형통함이 적고 처음은 길하지만 마침내 어지러워진다"고 하여 그것을 미제의 하위에 놓고 있습니다.

 

도대체 역(易)의 오의(奧義)를 숙지하기도 쉽지 않고 또 그것을 곧기곧대로 믿지도 않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소위(所爲) 가운데 필연적으로 존재하기 마련인 '작은 실패'를 간과하지 않는 자기 비판의 자세입니다. 실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패의 발견이 필요한 것이며, 실패가 값진 것이 아니라 실패의 교훈이 값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패와 그 실패의 발견, 그것은 산에 나무가 있고 땅 속에 바위가 있듯이 우리의 삶에 튼튼한 뼈대를 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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