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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곽재구의 포구기행(1)

by Diligejy 2016. 8. 1.

p.17

외로움이 찾아올 때,

사실은 그 순간이 인생에 있어 사랑이 찾아올 때보다 더 귀한 시간이다.

쓴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의 깊이,

삶의 우아한 형상들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p.82

연륜은 사물의 핵심에 가장 빠르게 도달하는 길의 이름이다.


p.89

나는 필경 고질병이 도지고 말았답니다. 그중의 한 파도에게 말했지요.

안녕, 나는 시 쓰는 사람이야. 짧은 여행 중에 있지. 시가 뭐냐고?

맑은 거지. 수평선 끝에서 빛나는 햇살 같은 거.

영원히 바닷물을 푸르게 하는 신비한 염료 같은 거.

파도들이 내 발등을 다시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고통이나 싸움, 상처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것을 탓하지 마시길.

그 맑은 파도의 눈빛을 대하면서 그런 쓸쓸한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답니다.


p.113

한 없이 고요했던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세상속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웠다.

나의 시들이 천천히 날개짓 하는 것을 보았고 가능한 그 날개짓이 더욱 격렬해지기를,

세상에 대한 더 깊은 연민과 지혜와 열정을 지니기를 나는 바랐다.

그 무렵의 내게 침묵은 날개의 다른 이름이었다.


p.119

과거를 회상하는 버릇은 가슴 안에 깊은 말뚝을 지닌 모든 슬픈 짐승들의 운명 같은 것이다. 줄에 매달린 염소처럼 그들은 말뚝에 매인 밧줄 바깥의 세상으로는 나갈 수 없다.


p.121

아무것도 볼 수 없음으로써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

침묵함으로써 모든 욕망과 영혼의 본질 속으로 여행할 수 있는 시간들.


p.126

몇 십 년이, 혹은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이 어쩌면 우리들의 삶을 영속시키는 힘인지도 모른다.

보리피리를 불며 아이들은 돌아갈 그리움의 시간이 있다.

그 그리움이 쌓이고 쌓여 아이들은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어떤 힘들고 추한 시간들과 부딪쳤을 때 스스로 그것들을 훌훌 털고 일어설 힘을 

지니게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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