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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공정하다는 착각

by Diligejy 2022.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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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COUP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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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13

샌댈 교수는 이런 맥락에서 "현대 자유주의를 규정하는 능력주의적 정치기획에 대한 재검토"를 요청한다. 자유주의의 능력주의적 정치기획은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오늘과 같은 글로벌한 기술 시대에는 고등교육이 신분상승과 물질적 성공 및 사회적 존중을 얻는 길이다.

둘째,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신분상승을 위한 고른 기회를 통해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재능과 노력의 결실을 향유할 자격이 있다. 샌델 교수는 이런 가치관과 관점이 국가 정책의 중심이 된 것은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일 뿐이라고 한다. 이런 능력주의 관점은 아메리칸 드림과 잘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아주 어두운 이면이 존재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도 이런 생각을 공정하고 타당한 관점이라고 여긴다.

 

능력주의적 이상은 미국의 경우 대학 학위 소지 여부와 관련된 학력주의 문제로 직결된다(물론 우리는 학력주의보다 더 중증인 학벌주의에 감염되어 있다). 그런데 만일 대학 학위가 좋은 직장과 사회적 평가의 전제조건이 된다면, 이는 민주주의를 부패시킨다. 이것이 능력주의의 어두운 이면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학위를 갖지 않은 이들의 사회적 기여는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또 교육을 적게 받은 이들이 선출직 공무원으로 진입하는 문을 좁혀놓아 결국 포퓰리즘과 같은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그동안 미국 민주당이 가졌던 입장은 현재의 글로벌 경제질서 유지였다. 물가를 저렴하게 유지하려고 많은 일들을 저임금 국가로 아웃소싱했다. 그래서 민주당은 이를 변화시키기보다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받는 타격을 줄이고 악화된 직업 전망을 개선하는 데에만 초점을 두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학위 상황을 개선하여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도록 정책 기조를 잡아왔던 것이다. 고등교육을 통해 신분상승을 독려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힐러리 클린턴까지 이어져온 이러한 정책 기조를 유지한 정치가들이 한 가지 놓친 점은 능력주의 중심 사회에 내재한 모욕의 감정이다.

 

능력주의에 따르면, 만일 당신이 대학에 가지 않아 이런 새로운 경제 환경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그 실패는 바로 당신의 잘못이 된다. 사회의 상층부에 속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 잘못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자괴감을 갖게 된다. 그들이 성공한 자들로부터 받는 모욕은 정당한 것인 반면 자신은 모멸을 당해 마땅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 정말로 학위가 없고 성공하지 못한 자는 업신여김을 받아 마땅한가?

 

p.33

입시 부정 스캔들을 일반적 입시 과정에서의 일탈로 보는 사람들과 이미 대학 입시에 만연해 있던 현상의 극단적 예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람들의 추론에는 공통된 전제가 있다. 능력과 재능으로 대입이 이뤄져야지, 학생 스스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다른 요인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그들 모두 '대입은 실력에 따라야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적어도 암묵적으로) 노력한 사람은 대입 관문을 통과해야 하고, 그에 따르는 혜택을 누릴 자격을 갖는다고도 보고 있다.

 

이 당연하다시피 한 견해가 옳다면, 능력주의의 문제는 원칙 자체보다 그 원칙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보수와 진보 사이의 정치 갈등이 그 점을 나타내준다. 우리 사회의 논쟁은 능력주의 자체를 따지지는 않고, 어떻게 그 원칙을 실현하느냐를 놓고 이뤄진다. 가령 보수주의자들은 인종이나 민족을 입학 고려 요소로 보는 소수집단 우대정책이 능력주의적 입학제도에 역행한다고 주장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이러한 소수집단 우대정책이 계속되고 있는 불공정을 시정하는 방법이며, 참된 능력주의는 특권층과 취약계층 사이의 출발선을 고르게 하는 조치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p.46

시장친화적이고 기술관료적인 세계화의 개념은 좌우 주요 정당들에게 고스란히 수용되었다. 특히 중도 좌파 정당이 시장 중심적 사고와 시장적 가치를 수용한 일은 무엇보다 의미심장했다. 이는 세계화 프로젝트의 진행에, 그리고 뒤따른 포퓰리즘의 반격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트럼프가 당선될 즈음 민주당은 기술관료적 자유주의 정당으로서 한 때 그 지지기반이었던 노동자와 중산층 유권자 대신 전문직업인들에게 한껏 기울어져 있었다. 브렉시트 당시의 영국 노동당, 유럽의 사회민주당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변화는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는 "정부는 문제이고 시장이 해답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들이 정치 무대에서 물러나자, 미국 빌 클린턴, 영국 토니 블레어,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의 중도 좌파 정치인들이 뒤를 이었다. 그들이 시장에 대해 갖는 믿음은 이전의 리더들보다 엷었지만 각자의 사회에서 그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 한 몫했다. 그들은 통제받지 않는 시장의 날선 이빨을 어느 정도 무디게 만들었으나, 레이건-대처 시대의 핵심 전제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시장 메커니즘이야말로 공공선을 달성하는 기본 수단이라는 전제였다. 이러한 믿음에 발맞춰 그들은 시장 중심적 세계화를 수용했고 경제가 갈수록 금융화되는 경향을 환영했다.

 

p.54

오늘날 미국 정치를 나누는 가장 깊은 균열 중 하나는 '대학 나온 사람 vs 안 나온 사람'이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는 비대졸자 표의 삼분의 이를 얻었다. 반면 힐러리 클린턴은 고등교육 이수자들 사이에서 압승했다.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비대졸자는 브렉시트에 압도적 지지를 보냈고, 대학원까지 마친 사람은 상당수가 반대표를 던졌다.

 

p.58~59

중요한 정책상 결정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대중의 눈과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즉 산업 분야에 휘둘리곤 하는 행정기구, 중앙은행, 주식시장, 선출직 관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기업 로비스트들 등등이 그런 결정의 주체인 것이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공적 담론이 공허해지는 차원을 넘어서 기술관료적 능력주의는 '사회적 인정'이라는 말의 의미를 뒤틀어놓았다. 그리하여 자격증이 있거나 전문직업인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의 명예는 높아지고, 대부분의 노동자는 그 사회적 지위와 명망이 추락하여 그들의 사회적 기여 또한 과소평가되는 상황에 부딪친다. 기술관료적 능력주의의 이러한 면은 분노와 양극화에 찌든 오늘날 우리의 정치 양상과 대부분 맞아 들어간다.

 

p.68

욥이 잃어버린 가족을 위해 통곡하고 있을 때, 그의 친구들은(과연 친구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가 뭔가 말도 못할 죄를 지었음이 틀림없다고 하면서 그에게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떠올리라"고 윽박질렀다. 이것을 초기적인 능력의 폭정 사례라 볼 수 있겠다. 고난은 곧 죄의 표시라는 가설로 무장한 욥의 친구들은 그의 고통이 뭔가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며, 따라서 욥이야말로 그의 자녀들의 살해자라고 잔혹하게 을러댔다. 비록 욥 자신은 스스로가 무죄임을 알았지만 그 역시 친구들처럼 능력의 신학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는 신께 부르짖었다. 대체 왜 내가, 의로운 사람인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느냐고.

 

p.70

신은 욥의 의로움을 인정한다. 그러나 신의 질서를 인간의 도덕 논리로 이해하려 했던 점에 대해서는 비난한다. 이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나타난 능력주의의 신학에서 급격히 이탈하는 것이다. 자신은 우주적 능력주의의 주재자가 아니라 하면서, 신은 스스로의 무한한 권력을 강조한다. 그리고 욥에게 굴욕 속에서 교훈을 얻으라고 가르친다. 신에 대한 믿음은 창조의 위대함과 신비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이 각 개인의 능력이나 성과에 따라 합당한 상이나 벌을 내리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p.70~71

능력주의 논쟁은 구원을 논의할 때 다시 기독교에서 등장한다. 신앙이 독실한 사람은 교리를 따르고 선행을 함으로써 구원을 얻어낼 수 있는가, 아니면 오직 신이 각자의 생활 태도와 상관없이 구원받을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하는가? 첫 번째가 더 정당해 보인다. 권선징악의 틀에 맞기 때문이다. 구원이라는 게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며 따라서 받아 마땅한 것이라면 신은 거기에 얽매이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의 능력을 인정해야만 하게 된다. 구원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구제한다'는 의미가 되며, 따라서 신의 무한한 힘에는 한계가 생기게 된다.

 

두 번째는 구원을 노력과 무관한 선물로 보며, 따라서 신의 전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신이 세상 모든 것의 주재자라면 악의 존재 역시 주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이 정의롭다면 그의 힘으로 방지할 수 있는 고통과 악이 왜 발생하도록 두는 것인가? 신이 전능함에도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정의롭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견해가 병립하기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매우 어렵다. '신은 정의롭다', '신은 전능하다', '악은 존재한다'

 

이 난제를 푸는 방법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진다. 만약 신이 어떤 규범을 세웠을 뿐 아니라 개인에게 그것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자유를 부여했다면, 우리는 옳은 것 대신 잘못된 것을 선택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나쁜 일을 한 자는 현세 또는 내세에서 신의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그의 고통은 악이 아니라 위반에 대한 징벌이다.

 

p.72~73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능력에 대한 반론에서 피어났다. 당시 가톨릭 교회에 대한 마르틴 루터의 저항은 부분적으로는 교회의 일탈에 대한 것이었다. 부자들이 구원을 돈으로 사는(엄격하게 보면 이는 구원을 산다기보다는 참회 기간을 감면하는 일, 다시 말해서 연옥에서 보내야 할 시간을 줄여주는 일이었지만) 부패한 관핸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의 보다 폭넓은 관점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비슷했다. 구원이란 오직 신의 은총일 뿐이며, 선행이든 계율 준수든 신의 마음에 들기 위한 개인의 노력과는 상관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천국으로 가기 위해 기도할 뿐이며 그 이상의 일을 할 수는 없다. 루터에게 있어 구원받을 자의 선택은 오로지 주어지는 것, 개인의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성도들과의 교우나 미사 참석, 그 밖의 일들로 신을 설득해서 우리의 구원받을 자격을 인정하도록 하는 일, 그것은 신성모독이라는 것이었다.

 

루터의 엄격한 은총론은 분명 반능력주의적이었다. 그것은 선행에 따른 구원의 여지를 없애고,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자유를 일체 부정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청교도들 그리고 그들의 후계자들이 가져오게 될 치열한 능력주의적 직업(노동)윤리들로 이어졌다.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막스 베버는 그렇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p.85~87

번영 복음적 사고의 거친면은 건강보험 논쟁에서 드러난다. 트럼프와 공화당 상원의원들이 오바마케어를 반대하고 폐기하려 했을 때, 그 대부분은 그들의 시장친화적인 대안이 경쟁을 늘리고 비용은 줄일 것이며 사람들을 기존 방식으로(조건들로) 보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앨라바마 출신의 보수적인 공화당 하원의원인 모 브룩스는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공화당의 계획이 더 건강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하는 것이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이는 악덕이 아닌 미덕만을 계산한 것이다. 삶을 잘 살아간 사람에게 응분의 보상을 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더 높은 보험 요건을 가진 사람에게 더 많은 보험료를 부담시키는 보험회사의 시스템은 다만 비용-편익 분석상 타당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정당하다. 환자에게 보험료를 더 받는 것은 '좋은 삶(선한 삶)을 산 사람, 건강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일을 한 사람들'의 비용을 경감시키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정도만 걸어온 사람이 치솟는 비용을 감당하게 되었다.

 

브룩스의 주장은 청교도에서 번영 복음으로 이어지는 혹독한 능력주의 논리를 재조명하는 것이다. 만약 번영이 구원의 증표라면 고난은 죄의 증표일 것이다. 이런 논리는 꼭 종교하고만 관련되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를 거침없는 의지로 설정하고, 인간이 기본적으로 자기 운명의 책임을 지는 주체라고 보는 모든 윤리 의식에 해당된다.

 

2009년 오바마케어 논쟁이 한창일 때, 홀푸드 설립자인 존 매키는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건강보험의 정당성에 대해 비판했다. 그의 주장은 종교와는 무관한 자유방임주의 논리에 기대고 있었다. 그러나 번영 복음 전도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개인의 책임을 꾸준히 강조하면서 건강을 지키는 일은 각자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건강보험의 문제들 대부분은 자체적으로 비롯된 것이다. 미국인의 삼분의 이가 과체중이며 삼분의 일이 비만인 것이 현재 상황이다.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질병의 대부분, 가령 심장병, 암, 뇌졸중, 당뇨병, 비만 등에 들어가는 비용이 건보료 지출액의 70퍼센트에 이른다. 이는 또한 적절한 식습관, 금연, 적정량의 음주를 비롯한 건강한 생활 습관으로 예방할 수 있는 질병이기도 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건강을 해치는 사람들 다수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탓을 해야 한다. 신앙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다만 과학과 의학의 증거들, 예를 들면 채소와 저지방 위주의 식단이 '고치려면 거액이 드는 치명적인 질병을 예방하고 종종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려고만 하면 90대까지, 심지어 100세까지 병치레 없이 살 수 있다." 그는 병자가 병에 걸려도 싸다고 노골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동료 시민들에게 기대려 해서는 안 된다고는 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삶과 건강에 책임을 진다."

 

매키에게는 (번영 복음 전도사들이나 마찬가지로) 건강이 곧 미덕의 증표다. 그 미덕이라는 것이 대형 교회에 꼬박꼬박 나가는 것이든 홀푸드의 유기농 식품을 꼬박꼬박 먹는 것이든 말이다.

 

p.93~94

역사가 되기도 전에 역사를 들먹이는 일,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 일이 이렇게 저렇게 흘러갈 거라고 하는 예측은 고약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었지만 중동에 자유민주주의가 자리 잡지는 않았다. 아랍의 봄에 품었던 희망조차 얼마 있지 않아 새로운 독재와 탄압의 거울로 바뀌어버렸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다스리는 러시아를 보면, 옐친 치하에서 민주주의가 꽃피리라 믿었던 희망이 참으로 덧없이 느껴진다.

 

둘째, 역사가 예측한 대로 흘러갈지라도 그것이 곧 도덕적 정당화의 기반이 될 수는 없다. 결국 옐친이 아닌 푸틴이 역사의 옳은 편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음이 드러났다. 적어도 그가 러시아를 독재적으로 통치하면서 권력을 계속 유지했다는 점을 보자면 말이다. 시리아에서는 폭압적 통치자인 바샤르 알 아사드가 치열한 내전을 거치고도 건재했으며, 그런 점에서 역사의 옳은 편에 서 있던 셈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의 정권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p.108

내가 대학생들 사이에서 능력주의 정서를 느낀 것은 미국에서만이 아니다. 2012년 나는 중국의 남동쪽 해안 지역에 있는 샤먼대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 주제는 '시장경제에 대한 도덕적 제한'이었다. 최근의 신문에서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사느라 자기 신장을 판 중국 10대 학생기사를 읽었던 나는 학생들에게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다. 뒤이은 토론에서 많은 학생들은 자유지상주의적 견해를 나타냈다. 그 10대 학생이 강압이나 협박에 의하지 않고 자유의사에 따라 자기 신장을 팔기로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입장에 반대한 일부 학생들은 가난한 사람의 신장을 사서 부자가 생명을 연장하는 일은 불공평하다고 주장했다. 강연이 끝난 뒤 한 학생은 내게 비공식적으로 답을 주었다. 부를 이룩한 사람은 그만한 능력을 입증한 것이며, 따라서 생명을 연장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p.113

모든 개인 책임론이 그렇듯 여기에도 역시 가혹한 면이 있다. 상황에 따른 희생자이기에 우리의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그런 곤경을 초래한 자기 책임이 있는 사람은? 논란이 있지만 도와주지 않아도 될 것이다. 대통령 가운데 "그 자신의 실수가 아닌 일로"라는 표현을 처음 쓴 사람은 캘빈 쿨리지, 그리고 허버트 후버였다. 이는 철저히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내용이었다. 누군가가 가난하거나 병들었다면 그것은 그들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며, 정부 도움을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 도중에 사용된 표현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이 표현을 가끔 썼다. 하지만 그의 경우 대공황으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에게 '스스로의 잘못으로 그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 도중에 언급된 것이었다.

 

정부의 역할을 줄이려고 했던 로널드 레이건은 이 문구를 그의 어떤 선임 대통령들보다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그 후임인 두 사람의 민주당 대통령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는 레이건보다 두 배나 많이 사용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레이건처럼 은연중에 도움 받을 자격이 있는 가난한 사람과 그런 자격이 없는 가난한 사람을 구분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힘에 맞서 싸우는 사람은 정부 보조를 받을 만했다. 다만 불우해서 가난해진 사람은 자격이 없었다.

 

p.129

노력과 근성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미국적 믿음은 더 이상 현실과 맞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수십 년간 미국인들은 자기 자녀들이 자신들보다 경제적으로 나은 삶을 살기를 기대할 수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1940년대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 거의 전부(90퍼센트)는 부모보다 많은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1980년대 생은 겨우 절반이 부모보다 많이 벌어들인다.

 

사회적 상승에 대한 흔한 믿음에 반해, 가난뱅이가 부자 되기도 훨씬 어렵다. 미국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상류층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거의 없다. 사실 대부분이 중산층조차 되지 못한다. 사회적 상승에 대한 연구에선 보통 소득 수준을 다섯 단계로 구분한다. 그 가운데 가장 하층에서 태어난 사람은 겨우 4~7퍼센트만 최상위층에 도달한다. 그리고 삼분의 일 정도만이 중간층이나 그 이상까지 간다. 정확한 숫자는 연구 결과마다 다르지만, 아메리칸 드림에서 찬미 받는 '자수성가한 부자'의 삶을 실현하는 미국인은 매우 드물다.

 

사실 다른 많은 나라들보다 미국에서 사회적 이동성이 떨어지고 있다. 부나 가난의 대물림 현상은 독일, 스페인,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스웨덴, 캐나다,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보다 미국에서 더 자주 일어난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부모의 부가 자녀에게 고스란히 이어지는 일이 거의 절반에 이르지만, 캐나다,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이동성이 가장 크다)에서는 그 절반 정도일 뿐이다.

 

p.149~151

프랭크는 이 모든 교육 운운하는 이야기가 불평등을 직접 초래한 정책에서 민주당의 주의를 돌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생산성은 1980~1990년에 증가했으나 임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과연 교육 실패가 불평등의 주원인일까? 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진짜 문제는 노동자의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과 상관없으며, 노동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한 데 있다.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생산한 것에서 자기 몫을 요구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이 생산한 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사람들은 더, 더 많이 챙겨가고 있다.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민주당 사람들은 경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 현실이란 독점산업에서 경제의 금융화, 그리고 노동 관리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들은 대신 그런 현실 모두를 방치하게 만드는 도덕적 환상에 젖어 있을 뿐이다.

 

"스스로의 성공에 취한 승자들이 내린 도덕적 판단"이라는 프랭크의 표현은 뭔가 중요한 점을 꿰뚫고 있다. 더 많은 사람이 대학에 가도록 권하는 일은 좋다. 못사는 집 사람도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은 더욱 좋다. 그러나 불평등과 수십 년 동안의 세계화로 노동자가 떠안게 된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오직 교육에만 집중하는 일은 심각한 역효과를 낳는다.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사회적 명망이 추락하는 것이다.

 

그런 역효과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어느 것이나 노동과 노동계급의 사회적 지위에 악영향을 준다.

 

첫째, 미국인 대부분은 대학 학위가 없다. 관리자 또는 직업전문인으로서 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에겐 이 사실이 뜻밖일 수 있다. 비록 최근에 대학 졸업자 비율이 늘어났지만, 아직도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미국의 성인 세 명 중 한 명 꼴이다. 능력주의 엘리트들은 성공과 실패의 문제를 대학 학력과 긴밀하게 엮음으로써,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이 글로벌 경제에서 힘든 상황을 겪는 것이 자업자득이라며 은연중 멸시하게 된다. 그들은 또한 대졸자의 임금 수준을 한껏 높이는 정책으로 초래된 문제에서 스스로의 책임을 면제해준다.

 

둘째,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의 학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꼴이 된 것이다"라고 말해줌으로써 능력주의자들은 사람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는 일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부지불식간에 학력주의를 조장한다.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에게 고약한 편견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학력주의 편견은 능력주의적 오만의 한 증상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능력주의에 더욱 물들게 되면서, 엘리트들은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을 깔보는 버릇마저 들었다. 대학에 가서 자신의 조건을 항상 시키라고 노동자들에게 골백번 되풀이하는 말은 아무리 의도가 좋을 지라도 결국 학력주의를 조장하고 학력 떨어지는 사람들의 사회적 인식과 명망을 훼손한다.

 

p.162~163

2000년대 미국과 서유럽에서 비대졸자 시민은 단지 업신여겨질 뿐이 아니다. 선출 공직에 전혀 참여할 수가 없다. 미 의회에서는 하원의원95퍼센트와 상원의원 100퍼센트가 대졸자다. 이는 소수의 대졸자가 다수의 비대졸자를 통치하고 있다는 뜻이다. 미국 성인의 삼분의 이가 비대졸자이지만, 그 가운데 연방의회에 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의회에 고학력자가 많기는 했지만 1960년대만 해도 상원의원 사분의 일과 하원의원 사분의 일이 비대졸자였다. 그리고 지난 50년 동안 의회는 인종, 민족, 성별에 있어서는 더 다원화 되었다. 그러나 학력과 출신계층에서는 훨씬 일원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의 한 가지 결과는 '노동계에서는 아주 극소수만 선출직에 몸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노동자의 약 절반은 육체노동, 서비스직, 사무직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선출 전 그런 직업을 갖고 있던 연방의회 의원은 2퍼센트에 못 미친다. 주의회의 경우, 노동계급 출신자는 3퍼센트에 불과하다.

 

학력주의는 영국과 유럽의 대의정부도 바꿔놓았다. 영국에서는 미국과 같이 대졸자가 비대졸자를 통치하고 있다. 영국 전체를 통틀어 70퍼센트는 비대졸자다. 국회의원의 경우에는 12퍼센트만 그렇다. 하원의원은 열 중 아홉이 대졸자이며 넷 중 하나가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를 나왔다.

 

지난 40년 동안 영국 노동당은 하원의원들의 교육과 출신계층에서 크나큰 변화를 겪었다. 1979년에는 노동당 소속 하원의원의 41퍼센트가 비대졸자였다. 2017년에는 16퍼센트만이 그렇다.

 

이러한 학력주의 밀물은 노동계 출신 하원의원의 급썰물과 함께 했다. 이제 그들은 하원의 4퍼센트만 차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노동계급을 대변해온 노동당의 계급 구성은 가장 급격히 바뀌었다. 1959년에는 노동당 하원의원의 37퍼센트가 육체노동자 출신이었다. 2015년에는 7펏겐트만이 그랬다. 영국 정치학자 올리버 히스의 말처럼, "하원의원 출신 구성의 그러한 변화는 의회가 영국 국민을 대표하는 범위를 좁혔다. 노동당은 전통적인 노동계급 대변 역할을 훨씬 덜 하게 되었다."

 

보다 학력이 낮은 사회 구성원들은 서유럽 전체적으로 의회에서 밀려나고 있다. 미국, 영국과 비슷한 패턴이다.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에서 대의정부는 고학력자들에게 점령되었다. 이처럼 부유한 나라들에서조차 성인의 70퍼센트 가량은 비대졸자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국회에 들어간 사람은 극소수다.

 

독일 연방의회는 83퍼센트가 대졸자다. 2퍼센트도 안 되는 의원들만이 직업계 중학교(하우프트슐레)가 최고학력이다.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에서는 82~94퍼센트의 국회의원이 대졸자다. 이들 나라의 내각 구성원은 학력 수준이 더 높다. 가령 앙겔라 마르켈의 2013년도 내각은 15명의 장관 중 9명이 박사 학위 소지자였다. 그리고 남은 6명 가운데 1명만 빼고는 석사 학위가 있었다. 독일 정치에서 박사학위는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박사학위 논문의 표절 문제 때문에 여론의 분노에 밀려 장관이 사임한 사례들도 있다.

 

p.167~168

2016년 미국의 비대졸자 백인의 삼분의 이가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힐러리 클린턴은 고학력자 표의 70퍼센트를 쓸었다. 선거학자들은 소득보다 학력이 트럼프 지지 여부에 더 확실한 변수가 되었다고 본다. 비슷한 소득을 가진 사람 가운데 학력이 높은 사람은 힐러리 클린턴에게, 낮은 사람은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학력 간 균열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대졸자 비중이 높은 50개 카운티 가운데 48개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4년 전 버락 오바마가 얻은 표보다 많은 표를 얻었다. 대졸자 비중이 가장 낮은 50개 카운티 가운데 47개에서는 클린턴의 득표가 오바마 때보다 훨씬 나빴다. 프라이머리 초기에 거둔 그의 승리를 자축하며 트럼프가 이렇게 외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난 덜 배운 사람들을 사랑한다!"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좌파 정당들은 저학력자의 지지를 얻고 우파 정당들은 고학력자의 지지를 얻어왔다. 능력주의 시대에 이 패턴은 뒤집혔다. 오늘날 고학력자들은 중도좌파 정당에 투표하며, 저학력자들은 우파 정당에 투표한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이런 패턴 역전이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놀랄 만큼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40~1970년대에 미국에서 대학 학위가 없는 사람들은 꾸준히 민주당에 투표했다. 영국에서는 노동당, 프랑스에서는 여러 중도좌파 정당들이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 1980~1990년대에 학력 간 균열은 크게 좁혀졌다. 그리고 2000~2010년대에 좌파 정당들은 비대졸자의 지지를 잃어버렸다.

 

이런 역전 현상은 보통 부유한 유권자들은 여전히 우파 정당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 그렇지만 고학력 유권자 다수는 중도좌파를 지지한다는 사실과 맞물려 복잡해 보인다. 흑인, 라틴 계열, 아시아 계열 미국 유권자들은 학력 수준에 상관없이 계속 민주당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2010년대가 되자 학력이 가장 결정적인 정치 균열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한때 노동자를 대변했던 정당들은 갈수록 능력주의 엘리트의 정당이 되고 있다.

 

p.178~179

오바마는 '무엇보다 팩트가 먼저'라는 그의 오랜 신념을 뒷받침하고자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한 상원의원의 말을 즐겨 인용했다. 모이니한은 언젠가 고집불통의 논쟁 상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의견에 사로잡혀 있군요. 그러나 당신 자신의 사실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오바마는 이 말을 인용하며 때때로 '모이니한이 아주 스마트했고 그 적수는 그만큼 스마트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정치적 이견을 단지 액면의 사실을 부정하거나 과학을 부정하는 일이라 여긴다면, 그것은 사실과 의견이 정치적 설득 과정에서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치 이전에 '우리 모두는 어떤 기본 사실에 전원 동의해야 하며, 그 이후에 우리 각자의 의견과 신념을 가지고 토론하면 된다'는 생각은 기술관료적 기만이다. 정치 토론은 종종 의제와 연관된 사실을 어떻게 잡아내고 정의할지에 대해 벌어진다. 어느 쪽이든 사실을 프레임화하는 데 일단 성공하면, 그는 장기적으로 그 논쟁에서 이긴 셈이다. 모이니한의 말과는 정반대로 우리의 의견은 우리의 인식을 사로잡는다. 의견이란 것은 사실이 명확히 규명되고 정립된 뒤에 비로소 생겨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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