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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플라톤 국가 강의

by Diligejy 2022. 10. 30.

p.13

대학생 때 왜 철학에는 철학용어사전같이 정리된 책이 없냐고 불평했다. 심오하고 복잡한 철학 개념들을 하나로 잘 정리해놓은 사전이 있으면 얼마나 공부하기 편할까 생각하곤 했다. 개념을 규정해가는 과정 자체가 철학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이다.

 

p.16

<국가>는 플라톤이 '철학자가 마음대로 하는 독재정치'를 주장하기 위해 쓴 책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 책을 읽은 학자들이 해석한 것이지 플라톤이 실제로 주장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다. 플라톤은 전문가들의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고, 철학자 또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 철학자가 마음대로 다스리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제안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철인통치'가 여러 학자들에 의해 해석된 내용이지 플라톤 자신의 생각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입문서를 통해서는 플라톤의 책을 열심히 읽은 학자가 이해한 만큼의 내용이 전달될 뿐이다. 그렇게 전달된 플라톤 철학은 언제나 실제로 플라톤이 생각했던 것과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p.17

우리는 정답이 무엇인지 찾는 일에 훨씬 익숙하다. 그런데 <국가>를 읽으면서 플라톤의 마음속 생각, 즉 정답을 정확히 맞추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플라톤이 염두에 두고 있는 정답보다 플라톤이 답하고자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p.24-25

우리에게 전해지는 플라톤의 희랍어 텍스트는 플라톤이 직접 썼던 원고가 아니다. 이후 여러 제자들과 후학에 의해, 그리고 전문적으로 글을 옮기는 필사자에 의해 원본에서 옮겨진 내용이다. 대부분의 사본들은 서로 차이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류나 해석에 의해 텍스트가 달라진 경우들이 있었다. 여기에서 플라톤의 '원본'이 무엇이었는지를 재구성하는 작업이 다시 필요하다. 그런데 플라톤의 원전을 규정하는 작업에서도 텍스트에 대한 문헌학자의 해석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어떤 단어 하나가 바뀜으로써 이데아가 초월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내재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는데, 하필이면 그 단어가 사본들마다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면 이 중 어떤 것이 '원본'에서 사용된 단어일지를 추정하는 것은 철저하게 해석의 문제가 된다. 플라톤 철학에서 초월적인 이데아가 중요하다고 해석하는 사람은 초월 쪽의 단어를 선택하겠지만,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는 개별 사물에 내재하므로 본질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사람은 내재 쪽의 단어를 선택할 것이다. 현재의 문헌학자들은 이 중 어떤 해석을 선택할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처럼 문헌학과 관련한 전문적인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플라톤의 철학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일이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플라톤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는 책의 원본조차도 우리는 알 수 없다. 희랍어 정본이라는 것도 필사본들 중에서 문헌학자들의 작업을 통해 정본이라고 여겨지는 내용을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희랍어로 된 플라톤의 <국가>마저 실제로 플라톤이 쓴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재구성된 정본마저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곤 한다. 박종현 선생이 번역하신 <국가 정체>만 하더라도 19000년에 나왔던 희랍어판으로 번역을 하셨다가, 2000년에 옥스퍼드 희랍어판이 새로 나오자 추가로 번역을 해야만 했다. 요약본뿐 아니라 희랍어 정본에도 플라톤이 아닌 누군가의 의견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플라톤의 생각은 어떻게 분명히 알 수 있을까?

 

p.47

가장 끔찍하고도 잔인한 헬라스인들끼리의 전쟁이 시작되려는 시점에, 그런 긴장관계를 이용하여 돈을 벌고 있는 케팔로스라는 노인장의 집에 사람들이 모여서 '정의'가 무엇인지 논하는 그림은 아이러니하다.

 

케팔로스의 아들인 폴레마르코스와 뤼시아스는 아테네 격변을 겪은 비극적인 주인공들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나고, 아테네는 크리티아스를 비롯한 30인의 참주들에게 통치 받게 된다. 이들은 스파르타를 등에 업고 그동안 아테네를 이끌어오던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다. 이들이 첫 번째 타깃으로 삼은 것은 거주외인들이었다. 친민주정 입장을 가졌던 이들은 기존 아테네 정부로부터 여러 가지 특권을 받아 누려왔기 때문에 당연히 새 정부에 불만이 많았다. <국가>의 첫 부분에서 폴레마르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자신의 집에 머물러달라고 강권하면서 자신들이 다수이니 소크라테스는 말을 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은 다수결에 의지하는 민주정의 지지자였던 폴레마르코스를 플라톤이 우회적으로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p.48~49

30인 참주정의 지도자들, 특히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 등은 소크라테스와 원래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30인 참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참주정에 오히려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소크라테스는 참주들로부터 받은, 살라미스 사람 라온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할 정도로 참주정을 돕지 않았다. 기원전 403년 민주파가 저항 세력을 모아 피레우스 항을 점령하고 이후 여러 번의 전투를 통해 30인의 참주들을 물리쳤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국력을 많이 잃은 스파르타는 30인의 참주들을 지원할 여력이 없었기에 결국 아테네에서 철수하게 되고, 아테네에는 다시 민주정이 세워진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과정에서 아테네 몰락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던 알키비아데스와, 30인 참주정을 이끌었던 크리티아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재건된 민주정에 의해 사형을 당한다. 

 

이렇게 역사의 풍랑 속에서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국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플라톤은 의도적으로 이들을 등장시켰다. 

 

p.52-53

아테네의 외항이던 피레우스 항은 아테네의 해군력이 발휘되는 본거지였다. 아테네로부터 4km 정도 떨어진 이 항구를 통해 아테네는 에게해 각지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30인 참주 통치에 대항한 민주파의 첫 본거지이다. 그들은 피레우스를 근거로 해서 아테네를 다시 정복할 수 있었다. 또한 피레우스는 자기 집에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도록 처분받았던 폴레마르코스가 대를 이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들어선 30인의 참주가 민주파를 숙청했지만, 참주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해외로 망명을 떠났던 민주파는 피레우스 항에서 전력을 정비하고 난 뒤 아테네를 공격하여 정권을 되찾아온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플라톤의 첫 독자들은 피레우스라는 장소를 보면 바로 민주정의 본거지라고 떠올렸을 것이다. 마치 한국의 민주화에 광주가 했던 역할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이 피레우스 항에서 <국가>의 주인공들은 민주정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물론 참주정을 가장 가혹하게 비판하기는 한다. 플라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국가는 최소한 아테네에서 운영되는 '민주정'은 아니다. 기원전 430년경,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전, 아테네에서 민주정이 가장 융성하던 시점에, 민주주의의 본거지인 피레우스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하는 이 대화 모임은 일종의 반역이다. 그만큼 <국가>는 도전적이다.

 

바로 이곳에서, 아직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은 시점에, 스스로가 어떻게 죽을지 아직 모르는 주인공들이 모여서 '정의'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운명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독자들이 그 대화를 보게 만든다. 이처럼 <국가>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 그리고 거기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들 등은 플라톤이 의도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p.63-65

<국가>가 두 개의 나누어진 세계를 그리면서 초월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철학자의 철학적인 탐구를 가장 주되게 제시한다는 일반적인 철학 입문서의 해석에 따르면, 이 비유를 '올라감'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읽게 될 것이다.

 

그런데 <국가>에서는 현실로 내려오는 과정도 강조한다. '하나의 국가가 어떻게 하면 정의롭게 될 것인가'가 이 책의 관심사라고 한다면, 정의롭게 만들기 위한 지식을 얻는 과정으로서 올라가는 것보다 현실로 내려와서 국가를 정의롭게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한 주제이다. 그렇다면 동굴의 비유에서도 '내려옴'이 훨씬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10장에서 충분히 다루도록 하자.

 

'내려옴(katabasis)'이라는 모티브는 사실 그리스 문학 작품에서 굉장히 많이 사용된다. 특히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보면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이야기도 나오고,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도 저승에 가는 모티브가 등장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국가>를 시작하는 가장 첫 부분이다. 1권 가장 첫 줄의 우리말 번역은 이 일이 언제 있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이 대화는 '어제'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희랍어 문장은 어순이 다르다. 이 문장은 희랍어로 "kataben chtes eis Peiraia meta Glaukonos tou Aristonos"이다. 이 문장의 첫 번째 단어는 '내려가다'라는 뜻의 katabainein이라는 동사의 1인칭 과거(아오리스트)형이다. 맨 처음에 나오는 이 단어는 책 전체의 주제와 이어진다. 독자가 가장 처음 접하는 단어에 저자는 무게를 실을 수 있다. 특히 희랍어는 한국어나 영어처럼 어순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저자는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단어를 자유롭게 앞에 배치할 수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중 특히 아킬레우스의 개인적인 분노가 전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와 관련된 서사시이다. 그래서인지 <일리아스>의 첫 단어는 '분노'다. 이 책은 아킬레우스의 분노에 대한 책이라는 점을 독자가 기억하도록 호메로스가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서사시 전체의 첫 단어로 배치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국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플라톤은 초월의 세계를 지향하는 첧가자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국가를 정의롭게 만드는 데에 고나심이 있다. 국가가 정의롭게 되기 위해선 철학자가 형상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자신이 살던 공동체로 내려와야 한다. 지식은 획득된 다음 사용되지 않으면 별 가치가 없다. 철학자의 지식은 통치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내려옴'이 더 중요한 주제이다. 이것이 <국가>의 기획이라고 볼 수 있는 여러 복선 중 하나는 첫 단어이다. 철학자가 이데아를 본 다음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을 '내려감'이라고 표현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피레우스로 '내려가서' 정의, 혹은 올바름에 대한 대화를 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 이 대화편이라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국가>가 문학 작품으로서의 특징을 강하게 갖는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대화편의 첫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로 돌아가려 한다. 피레우스보다 '위'인 아테네로 가려는 그는 '내려감'보다는 '올라감'에 마음을 더욱 쓰고 있다. <국가>에서 그려지는 철학자는 이데아의 세계를 지향한다. 하지만 그의 지식은 그가 속한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는 자신이 원하는 바와 달리 동굴에 내려와서 통치를 하도록 강요받는다. 아테네로 올라가고 싶어하는 소크라테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는 올라가고 싶어 하지만 내려와서 피레우스에 머물러야 한다. 마치 동굴의 비유에서 철학자가 동굴 밖에 머물러 있고 싶어 하지만, 결국 동굴로 끌려 내려와야 하는 것과도 같다. 이데아를 관조하면서 사는 삶이 훨씬 좋아 보이지만, 철학자는 강제로 통치를 해야 한다. 이렇게 강제로 피레우스에 남아 정의에 관해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소크라테스의 하룻밤은, 원치 않아도 통치를 해야만 하는 철학자의 운명을 암시한다. 이는 <국가>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또 하나의 주제에 대한 복선이다. 

 

p.68-69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승리를 추구하는 다수결과 다르다. <국가> 전체에서 소크라테스는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대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비판하는 민주정의 경우 다수의 힘을 이용해서 상대를 누르고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목표이다. 플라톤은 폴레마르코스의 태도를 통해 민주정의 문제를 암시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 패거리에게 져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폴레마르코스 집에 가게 된다. 글라우콘이 횃불 경주와 철야제 구경, 그리고 젊은 사람들과의 대화에 대한 기대 때문에 남자는 주장에 설득당하자, 소크라테스도 거기에 따르기로 한다. 이처럼 다수의 힘이 아니라 이성적인 설득이 생각을 바꾼다. 플라톤은 폴레마르코스의 태도를 통해서도 철학적 대화의 중요성이라는 메시지를 숨겨놓았다. 

 

p.75-76

플라톤의 이상 국가 시스템이 이런 '빚짐'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플라톤 철학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지지 않고 살 수 없기에, 신세를 잘 갚도록 해주는 시스템을 갖춘 사회가 가장 정의롭고 올바르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국가> 전체의 기획이다. 플라톤은 사람의 선한 본성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 공동체를 이루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서로 신세를 지면서 공동체를 이룬다는 점에 주목해서 좋은 국가 체제를 설계한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빚을 잘 갚도록 해주는 이상 국가의 정치체제가 플라톤의 기획이다. 그리고 이상적인 국가에서 필요한 '정의'의 의미는 <국가>에서 처음으로 '정의'의 의미를 제안하는 케팔로스의 말에서부터 제시된다. <국가>에서 다루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내가 진 빚을 잘 갚고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점에 초점을 맞추어 <국가> 전체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 

 

p.79

폴레마르코스가 제안하는 정의 개념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국가>에서 다루는 또 다른 중요한 주제에 대한 암시도 주어진다. 폴레마르코스는 누가 친구인지 묻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해 '자기가 선량하다고 판단하는 사람'을 친구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어떻게 판단하는지보다는 실제로 선량한 사람인지를 고려해서 친구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실제로 선량한 사람을 이롭게 하고 실제로 선량하지 않은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이 정의이지, 자기가 선량하다고 판단하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은 정의가 아닐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는 '실제로 그러한 경우'와 자기가 판단하는 경우 사이에 차이가 생길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주관적인 판단이 무조건 틀리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에게 '보여지는' 세계는 실제 세계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 철학을 설명하는 입문서라면 꼭 다루는, '의견'과 '지식'의 차이를 주목하는 인식론적 문제와 관련한 퍼즐 조각을 플라톤은 폴레마르코스와 소크라테스의 대화 사이에도 남겨둔다. 

 

p.127

최근 미국에서 새롭게 사용되고 있는 속어 중 '눈송이(snowflake)'라는 말이 있다. 진보 성향의 청년들이 자신의 신념과 다른 이야기를 들으면 민감하게 반응하고 불편해하며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겨울에 내리는 눈송이가 땅이나 손에 닿으면 바로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약간의 따스함도 견디지 못하는 것에 비유한 표현이다.

 

p.139

소크라테스는 오르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도 말라고 한다. 자신이 오를 수 있는 나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것, 이것이 정의롭고 행복한 삶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이다.

 

p.140~141

근대 이후의 사람들의 눈에는 관조하거나 천국에서 신과 함께하는 삶은 너무 정적이라고 느껴지고, 그래서 재미가 없어 보인다. 목적인이 배제된 근대적 사유에 따르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움직임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발휘하며, 욕구 채우기를 그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더이상 욕구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장 좋은 상태에 도달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죽어버렸다는 뜻이다. 완벽하게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계속해서 만족시키는 것은 생명이 있다는 증거이고 삶을 살아가는 이유이다. 자본주의는 이런 생각으로부터 발전했다. 개인의 이기적인 욕구와 이를 만족시키기 위한 합리적인 선택이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당신에게 '오르지 못할 나무는 바라지도 말라'고 이야기한다면 바로 반감이 들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근대인에게 더이상 욕구하지 말라는 것은 존재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내가 욕구하는 것을 얻을 가능성이 있든 없든, 이를 바라고 말고는 내가 선택할 문제이다. 아무리 소크라테스라고 해도 나에게 욕구하지 말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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