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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일본소설

렉싱턴의 유령

by Diligejy 2016. 10. 15.

p.60~61

"내가 권투를 좋아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거기에 깊이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 깊이가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때리는 거나 맞는 것 따위는 그야말로 아무래도 좋은 것입니다. 그런 건 단지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깊이를 이해하고 있으면, 설사 진다고 하더라도 상처 받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모든 일에 이길 수만은 없는 법이지요. 사람이란 언젠가는 반드시 지게 마련입니다. 중요한 건 그 깊이를 이해하는 것이지요. 권투는-적어도 나한테 있어서는- 그러한 행위였습니다. 글러브를 끼고 링 위에 오르면 때때로 나 자신이 깊은 구덩이의 밑바닥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끔찍하게도 깊은 구덩이입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누구도 나를 볼 수 없을 만큼 깊습니다. 그 속에서 나는 어둠을 상대로 싸우고 있습니다. 고독합니다. 하지만 슬프진 않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한마디로 고독이라고 말했지만 고독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신경이 갈기갈기 찢기듯 쓰리고 아픈 고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고독도 있습니다. 그런 고독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육신을 깎지 않으면 안 됩니다. 노력하면 그만큼 돌아옵니다. 그것이 내가 권투에서 배운 것 중 하나였습니다."


p.88

어떤 종류의 인간에게는 깊음이라는 게 결정적으로 결여돼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한테 그 깊음이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에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깊음이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오키에겐 그런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공허하고, 변화가 없고 단조롭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아무리 집중시킨다고 한들, 아무리 겉으로 으스댄다고 한들, 거기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p.93

내가 정말 무섭다고 생각하는 건, 아오키 같은 인간이 내세우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믿어버리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입맛에 맞고 받아들이기 쉬운 다른 사람의 의견에 놀아나 집단으로 행동하는 무리들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한 무의미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결정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다고는 짐작도 하지 못하는 무리들이지요.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정말 무서운 건 그런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p.159

기억은 바람에 흔들리는 안개처럼 서서히 그 모습을 바꾸어감, 모습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 그것은 그림자의 그림자의, 또 그림자의 그림자가 되었다. 그리고 손에 만져지듯 느껴지는 것이라곤 예전에 존재했던 것이 뒤에 남기고 간 상실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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