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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일본소설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by Diligejy 2017. 7. 22.

p.53

시간은 사정없다. 사정없이 흘러가고 사정없이 슬픔을 지워낸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딸의 죽음을 신문에 실린 생판 모르는 타인의 부음과 마찬가지로 무덤덤한 사실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미치도록 무서워졌다.


p.56

슬픔을 억누르고 현실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런데 자신이 계속 도피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녀를 지켜주어야 한다. 아니, 지키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힘을 모아 슬픔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것이 부부가 아닌가. 히라타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p.95

팔다 남은 음식이다. 히라타는 곧잘 저녁식사분을 처분하는 할인가로 아주 싸게 사온다. 딸을 잃은 뒤, 그런 가난하고 쓸쓸한 식탁이 몇 번이나 계속됐다.


p.131~132

아내가 터무니없는 행동으로 주변에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신경쓰면서, 생계를 위해 만원전철에 시달리며 출근하고, 틈틈이 에리코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집에 전화를 하고, 야근도 출장도 부하 직원에게 죄다 떠맡겨 불만을 사고, 세탁기를 돌려놓고는 데우기만 하면 되는 초라한 식사를 준비하고, 간신히 한숨 돌리면서 잠자리에 들면 헤드폰을 낀 채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하며 한 손으로 자전거를 타는 하루카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히라타는 심신의 균형이 지금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역설적이지만, 그걸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무거운 짐이었던 에리코의 존재였다. 자신이 여기서 쓰러지면 남겨진 아내는 어떻게 되겠는가. 지켜준다는 것이 곧 의지하는 것이란 걸 깨달았다.

p.154
에리코의 자살은 히라타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충격의 정도는 하루카 때보다 훨씬 컸다.

그러나 슬픔은 없었다. 후회, 안타까움, 상실감, 원통함, 아픔, 절망......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유일하게 남은 감정이라면 허무였다. 히라타의 마음은 어둡고, 깊고, 무겁고, 빛이 닿지 않는 짙은 안개로 뒤덮였다.

p.167
너, 그놈이 네게 의지하는 걸 기쁘게 생각하는 거 아냐? 내가 빨래해주지 않으면, 이 사람은 입은 옷 그대로 살 것이다. 내가 밥해주지 않으면 굶어죽을 것이다. 내가 돈을 마련해주지 않으면 이 사람은 강도가 될 것이다. 그놈이 네게 기대는 것처럼 너 역시 그놈에게 기대는 거야.

p.174
손해와 이익은 내일이 있는 인간이 생각할 일이야. 내일이 없으면 백억 엔이 있어도 의미가 없어.

p.191
저세상에서 두 사람을 만난다. 지금 희망은 그것뿐이야.

p.200~201
어른에게 일 년은 바람처럼 지나간다. 지난번 상경 때는 코트깃을 세웠는데 지금은 셔츠 한 장으로 거뜬하다. 미래는 확실히 찾아오고 현재는 확실히 과거가 된다. 그걸 아는 것이 어른이 된다는 것이리라.

p.287
인간사란 애초에 모순으로 차 있다. 히라타 마코토와 스에나가 마스미에 한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인생이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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