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제/흐름이해

금리의 역습

by Diligejy 2023. 8. 20.

 

p.17-18

바스티아가 죽던 해에 그의 마지막 책자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발간되었다. 여기서 바스티아는 상인 자크 본옴므에 관한 우화를 들려준다. 이 상인의 부주의한 아들이 아버지 상점의 유리창을 깨뜨리자 이웃들은 그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창문이 깨졌으니 동네 유리 장수에게 일이 생겼고, 그는 유리를 판 돈으로 음식과 생필품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바스티아는 자크 본옴므에게는 쓸 수 있는 돈이 줄어들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핵심은 경제 행위가 특정 수혜자에게 미치는 영향뿐 아니라 광범위한 효과를 고려하라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습관, 제도 또는 법은 하나의 결과뿐 아니라 여러 결과를 연쇄적으로 발생시킨다. 이러한 결과 가운데 즉시성이 있는 것은 첫 번째 결과뿐이다. 다시 말해 첫 번째 결과는 원인과 동시에 드러난다. 눈으로도 볼 수 있다. 나머지 결과는 순차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결과를 예견할 수 있다면 운이 좋은 셈이다.

이 대목에서 나쁜 경제학자와 좋은 경제학자를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나쁜 경제학자는 눈에 보이는 효과에만 의존하지만, 좋은 경제학자는 볼 수 있는 효과는 물론, 예견해야 하는 효과까지 고려한다.

 

 

p.20

2008년 9월 리먼브라더스 파산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무정부주의자 프루동의 혁명적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각국 중앙은행은 금리를 5,000년 역사상 유례없는 최저 수준까지 끌어내렸다. 유럽과 일본에서는 금리가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그러나 결과는 프루동의 예상과는 달랐다. 오히려 무상 대출에 대한 바스티아의 암울한 예측이 더 진실에 가까웠다.

 

중앙은행 총재들은 월가가 평온을 되찾았다며 자축했다. 디플레이션이라는 하찮은 두려움은 무시해버려도 좋은 듯했다. 실업률은 급격히 떨어졌다. 모두 제로금리의 '눈에 보이는' 효과였다. 제로금리의 이차적 결과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며 도외시되었다. 그러나 정말 보려고 했다면 충분히 볼 수도 있었다.

 

p.28

바스티아는 프루동과의 논쟁에서 시간에는 가치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자라는 주제를 파고든 주요 학자인 뵘바베르크와 피셔는 이자란 인간 본성에 내재되어 있다고 믿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참을성이 모자라므로, 이자율은 이러한 시간 선호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p.38

이자를 계산하려면 시간과 가치를 표준화해야 한다. 수메르 달력은 한 달 30일, 한 해 12개월로 이루어졌다. 시간, 거리, 무게, 그리고 돈과 이자는 모두 60을 기준으로 측정헀다. 이 60이라는 숫자는 1, 2, 3, 4, 5, 6이라는 정수로 나눌 수 있는 가장 낮은 숫자로, 간단한 계산에 적합했다. 하지만 이자 계산은 여전히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학생들은 원금과 이자를 모두 합친 대출 이자율을 계산하는 방법을 공부해야 했다. 구 바빌로니아 시대 학생이 풀었던 문제를 하나 보자. "이자가 1구르라면 자본과 이자가 같아지는 때는 몇년 후인가?" 이 '골치 아픈 계산'이야말로 '바빌로니아 수학의 특징 중 하나'다.

 

p.40

"금융은 신성의 그늘에서 태어났다"라는 말이 있다. 사원은 처음에 고대 근동지역에서 주요 대출자였다. 왕궁 역시 신용을 제공했다. 이 기관대출자들은 대출 이자를 받아 이를 미망인과 고아 등에게 식량을 배급하는 식으로 자원 재분배에 사용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금 징수나 대출 같은 업무는 중간 상인들의 일이 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기원전 제1000년기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이기비 가문은 예금을 받고 대출을 제공하며 고객 부채를 청산하고 상품에 투자하는 등 일련의 상업 은행 서비스를 제공헀다. 이들은 넓은 영지를 차지하고 고위 관직을 부여받았다. 

 

p.48-49

 

고대 금리의 역사는 금리의 형성을 설명하는 어떤 특정한 입장도 딱히 편들어주지 않는다. 법과 관습은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때로는 화폐의 유통량과 시장의 힘도 영향을 미쳤다. 이는 다양한 이자율과 특정 대출에 부과되었던 리스크 프리밍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요한 대부업체였던 사원 및 왕궁 역시 신용 공급과 이자에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역할은 오늘날 중앙은행의 역할과 비견된다. 차이가 있다면, 고대 대출에는 은과 같은 상품이 필요했지만, 오늘날 중앙은행에는 아무 준비 없이 뚝딱 법정화폐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21세기 당국은 너무도 쉽게 이자율을 조작할 수 있다. 

 

뵘바베르크는 한 나라의 금리가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반영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고대 세계에서 금리는 위대한 문명의 진로를 따라갔다. 바빌로니아, 그리스, 로마에서 금리는 수 세기에 걸쳐 U자형 패턴을 따랐다. 문명이 번창할 때는 떨어졌고, 쇠락하거나 멸망할 때는 급격히 상승했다. 폭풍전야의 고요일 때는 초저금리도 등장했다. 신바빌로니아 시대(기원전 700~630년) 초기 은 대출금리는 최저 8.33%까지 떨어졌다. 기원전 5세기 초 바빌로니아가 페르시아에 함락되자 금리는 40% 이상까지 치솟았다. 18세기 네덜란드 공화국이 혁명 이후 프랑스에 공격당하기 직전에 금리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따라서 21세기 초반 초저금리는 위안이 될 만한 현상은 아니다.

 

p.50-51

이자는 필요와 탐욕이 결합하며 등장헀다. 이자가 문명 초기부터 존재했던 이유는 자본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왕궁과 사원은 늦지 않게 세금과 부과금을 걷어 중요한 지출을 해야 헀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 세무 당국처럼 연체에 이자를 청구했다. 이 공공기관들은 대출이자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원을 분배했다. 보리 대출은 굶주린 사람들과 보리 씨앗이 필요한 농부들이 대상이었다. 부의 불균등 분배로 인해 공적 사적 대부자들은 이자를 청구했고, 이들은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야심 찬 양조장 주인이 원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기꺼이 이자를 낼 수 있는 자원을 통제하고 있었다.

 

금융사학자 괴츠만은 '대출을 장려하는 이자의 출현은 금융 역사상 가장 중요한 혁신'이라고 했다. 중요한 지적이다. 금융은 사람들이 시간을 초월해 거래할 수 있게 해준다. 농부는 보리를 빌려 밭에 파종하지만, 빚을 갚기 위해서는 수확기를 기다려야 한다. 모든 산업 공정에서는 원자재를 완제품으로 만들어 판매하기까지 생산 시간이 필요하다. 기원전 제3000년기 메소포타미아의 한 문서에 따르면 옷감 준비에만 1년이 넘게 걸렸다. 게다가 외국과의 무역에는 긴 시간이 소요된다. 자본이 산업이나 무역에 묶여 있을 때, 이자는 생산에 사용된 시간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물론 사유재산이 보장되는 모든 문명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자원을 빌려주도록 유도하기 위해 이자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자본을 축적하기만 할 것이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여유 자금을 가진 사람은 땅을 사서 경작하거나 제삼자가 농장을 얻도록 돈을 빌려주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자율과 자본의 생산성, 즉 이자율과 농작물의 잉여 생산 사이에는 반드시 어떤 관계가 있어야 한다. 

 

p.52-53

튀르고에게 금융이라는 세계는 세상을 향해 들고 있는 거울로, 실물 자산과 금융 자산은 상호 교환이 가능했다. 따라서 토지, 건물, 공장이 수입을 낳듯이 돈도 이자를 생산해야 했다. 이 중요한 통찰을 현대 경제학자들은 너무도 자주 간과하고 있다. 

 

21세기 정책 입안자들에게 금리는 그저 인플레이션과 경제 생산량을 조정하는 지렛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잠시 바빌로니아에서 비롯된 이자의 역사를 생각해보자. 이자는 항상 우리 곁에 있다. 부족한 자원은 어떻게든 분배되어야 했고, 부는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 불균등하게 분배되어 있으며, 뵘바베르크의 말처럼 '이자는 신용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자는 대출이 생산적이기 때문에 존재하며, 심지어 생산적이지 않을 때조차 가치가 있다. 자본 소유자에게 대출을 유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출에는 리스크가 따르므로 이자가 있어야 한다. 생산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인간은 선천적으로 조급하기에 이자가 존재한다.

 

21세기 경제학자들보다 이자에 관심이 많았던 전 세대 경제학자들은 이자의 중요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뵘바베르크에게 이자란 '삶을 위한 필수품'이었다. 피셔는 이자를 '근절 불가능할 정도로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불렀다. 비슷한 맥락에서 슘페터는 이자가 "모든 경제 체제에 스며들어 있다"라고 말했다. 이자를 반대한다고 공표했던 <자본론>의 저자도 이 점에서는 자본주의의 최고 옹호자와 생각이 같았다. 마르크스는 대출 이자 청구가 처음 기록된 고대 세계를 연상시키는 한 구절에서 "고리대금은 생산의 모든 구멍마다 살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신들이 세계 사이의 공간에 살았던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썼다.

 

p.55-57

고리대금에 대한 지적 공격은 4세기 아테네에서 시작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돈은 교환에 쓰여야지 이자를 통해 늘어나서는 안 된다"라는 이유로 고리대금이 부도덕하다고 주장했다. 이 철학자는 이자라는 낱말에 생산적인 대출의 결실이라는 어원이 있다는 점에 그다지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새끼'라는 의미의 tokos라는 낱말을 돈이 돈을 낳는다는 번식의 의미로 쓰는 이유는, 자식이 부모를 똑같이 닮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을 버는 옺갖 방법 중 돈이 돈을 낳는 방식이 가장 부자연스럽다. 실제로 돈은 돈을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그리스 문헌에서는 대부업자를 도덕적 광기 또는 분별력 상실 같은 질병을 앓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고리대금은 사회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는 행위로, 형제애라기보다는 '타자성'의 행위로 간주되었따. 플라톤은 부유한 채권자를 가난한 채무자와 적으로 만드는 것이 고리대금이라고 주장했다. 데모스테네스는 이자를 부과하는 대부업자들이 '도움을 주는 데는 전혀 관심 없이 그저 이익만을 위해 거래하기'때문에 혐오스럽다고 말했다.

 

고대 아테네의 전문 대부업자들은 보통 외국인이나 노예 상태에서 막 풀려난 사람 정도의 지위였다. 아테네 은행가들은 현대 은행가들과 비교해 인기가 없었다. 안티파네스는 일부만 전해지는 희극에서 은행가들을 못된 간호사, 아는 척하며 가르치려 드는 사람, 산파, 구걸하는 성직자, 생선 장수보다 더 나쁜 '지독한 집단'이라고 묘사했다.

 

수 세기가 지나도 고리대금업자들의 지위는 올라가지 않았다. 중세에 종교적 금기를 어겼다는 이유로 경멸의 대상이 된 직업 중에는 여관 주인, 제빵사, 제화공, 설거지하는 사람 등이 있었다. 이 모든 부정한 일 중에서도 고리대금업은 유대인이나 기독교 세계에서 추방된 자들이나 하는 가장 천한 일로 여겨졌다.

 

p.58-59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리대금 비판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중세시대에 그를 추종했던 아퀴나스는 돈은 오로지 교환을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대출자는 대출이 이루어지는 순간 자신의 돈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포기한다. 그러나 경제학 교과서들이 예외 없이 지적하듯 돈은 가치의 저장고이기도 하다. 대출자는 화폐의 교환가치는 포기하지만, 저장가치는 부채의 형태로 계속 보유한다. 이런 이유로 이미 바빌로니아 시대부터 채권자들은 대출 기간에 따라 담보를 설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출에 시간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대출한 후 시간이 지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다시 말해 대출은 '시간 간 intertemporal'거래다. 시간의 성격을 다루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에 이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다니 의외다. 

 

p.68~69

스콜라 철학의 고리대금 비판은 주로 소비 목적으로 대출하는 자급자족적인 농경사회에 적합했다. 이 이상적인 세계는 중세시대에 무역과 산업이 활발해지면서 산산조각 났다. 근대 초기에는 소비자 대출과 상업 대출이 구별되었다. 소비 대출에 대한 이자는 여전히 고리대금이라고 비난받았지만, 생산 자본 대출에 대한 이자는 점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16세기 프랑스 법학자 샤를 뒤물랭은 특정 대출에 대해서는 '정당한 이자'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일상적인 상업 관행에 따르면 상당한 양의 돈을 이용하는 효용이 크고, 이는 법률적으로 상품이라고 부른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사업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돈을 쓸 일이 많다. 그런데 무상으로 돈을 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덧붙였다. 심지어 엄격한 아퀴나스조차 법에서 이자를 실질적인 문제로 허용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의 공리를 방해'하게 된다고 인정했다.

 

중세 교회는 여전히 고리대금에 엄격한 태도를 보였지만, 일부 리스크를 수반하는 대출에 대해서는 이자를 요구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이를 라틴어로는 periculum sortis('리스크에 따른 담보 요구권'이라는 의미 - 옮긴이)과 damnum emergens('실손해에 대한 배상금'이라는 의미 - 옮긴이)라고 불렀다. 사업 파트너십과 해상모험대차(해상 항해에 대한 대출)는 리스크가 있었으므로, 이자도 허용되었다. 1390년, 런던 시장은 고리대금을 '리스크 없는' 대출에서 이익을 얻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토지는 돈과 달리 생산적이라고 여겨졌으므로 임대료는 고리대금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또 토지는 원금을 돌려받을 수 없으므로 연부금이 허용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 신자들은 이자를 연체 상환에 국한하지 말고 대출 시작부터 '희생된 이익'의 추정치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제네바에 자리를 잡은 후 칼뱅은 차용자가 낸 이익에서 이자를 지급했을 경우 사취가 아니라고 주장헀다 (하지만 사회나 경제 문제에 있어 그다지 개혁적이라고 할 수 없었던 루터는 고리대금업자를 여전히 '도둑, 강도, 살인자'라며 비난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