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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철학적 산책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by Diligejy 2023.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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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철학이 우리 인생에 스며드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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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산책을 나선다. 

 

조용한 거리를 걸으며 주변을 관찰한다. 관찰하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누군가는 시장조사의 관점으로 바라볼 것이고, 누군가는 범인의 이동경로를 추측하며 관찰할 거고, 누군가는 막막한 하루를 위로하기 위해 관찰할 것이다.

 

이 책은 14명의 인물을 통해 각기 다른 각도로 산책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어떤 날은 아우렐리우스처럼 산책할 수 있고, 어떤 날은 니체처럼 산책할 수도 있다. 또 어느 날은 쇼펜하우어처럼 산책할 수 있고 또 어떤 날은 에픽테토스처럼 산책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굳이 모든 챕터를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다. 마음가는대로 읽으면 된다. 자유롭다. 보통 14명이나 되는 인물을 한 권의 책에 다룬다면 넓고 얕은 알맹이가 빈 책이 되기 십상이지만, 이 책은 어떤 요술을 부린건지 넓으면서도 그리 얕진 않다. 철학을 가르치기 위해 쓴 책이 아니라 산책을 위해 철학을 집어넣은 책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이 책은 빠르지 않다. 많이 다루지만 조급하지 않고, 넓게 다루지만 허둥대지 않는다. 마치 친구와 산책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듯 천천히 흘러간다. 이것이 핵심이다. 고난이 와도, 노화가 와도, 죽음이 와도, 음악이 들려도 천천히 기다리며 음미하는 것. 다른 각도로도 관찰해보는 것. 저자 말대로 '철학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닌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줄 수 있는 가치다. 

 

산책을 다녀온 후에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는 없다. 하지만 서서히 쌓인 생각과 에너지는 변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런 변화를 우리는 지혜라고 부를 수 있다. 산책은 결국 지혜를 위한 행동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다는 건 지식을 쌓는다기보다는 지혜를 발견하기 위한 산책에 가깝다. 

 

밑줄긋기

p.15

내게 아직 삶은 골칫거리가 아니다. 하지만 턱밑에서 시간이 내뱉는 뜨거운 숨이 느껴진다. 매일 조금 더 강하게. 나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알고 싶다. 아니, 알아야 한다. 그것도 너무 늦기 전에.

 

"결국 인생은 우리 모두를 철학자로 만든다." 프랑스 사상가 모리스 리즐링이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보고 생각한다. "왜 기다려야 하지?" 왜 삶이 골칫거리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오늘, 바로 지금,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인생이 이끄는 대로 나도 철학자가 되면 안 되나?

 

p.22

태양이 훈련 교관같은 다정함으로 내게 침대에서 나오라고 지시한다. 악마는 밤에 나타나지 않는다. 아침에 공격한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가장 취약하다. 바로 그 때가 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여기 있는지에 대한 기억이 돌아오는 때이기 때문이다. 

 

p.24-25

아침은 강렬하고 모순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편으로 아침은 희망의 냄새를 풍긴다. 모든 새벽은 곧 재탄생이다. 로널드 레이건은 '미국의 늦은 오후'라는 슬로건으로 캠페인을 벌이지 않았다. 레이건을 백악관에 앉힌 것은 '미국의 아침'을 불러오겠다는 약속이었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생각은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지, 내려앉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 아침은 뭉근한 절망의 냄새를 풍긴다. 자기 삶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침을 싫어할 가능성이 크다. 불행한 삶에 아침은 영화 <행오버3>의 오프닝 장면과도 같다. 다가올 끔찍함의 맛보기랄까.

 

p.28

로마 시대 이후 엄청난 발전이 이루어졌지만 이 중요한 침대 문제는 본질적으로 변함없이 남아 있다. 그 누구도 이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대통령이든 농민이든, 스타 셰프든 스타벅스의 바리스타든, 로마제국 황제든 노이로제에 걸린 작가든, 우리 모두 똑같은 관성의 법칙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 모두 외부의 힘이 작용하길 기다리며 가만히 멈춰 있는 물체다.

 

p.33

[명상록]을 읽는 것은 곧 철학하는 행위를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것과 같다. 마르쿠스는 자신의 생각을 검열 없이 실시간으로 내보냈다. 고대 철학 연구자인 피에르 아도의 말처럼, 지금 나는 "인간이 되고자 단련 중인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

 

p.36

이러한 깨달음이 마르쿠스를 움직이게 한다. 마르쿠스에게는 침대 밖으로 나갈 사명이 있다. '사명'이지, '의무'가 아니다. 두 개는 서로 다르다. 사명은 내부에서, 의무는 외부에서 온다. 사명감에서 나온 행동은 자신과 타인을 드높이기 위한 자발적 행동이다. 의무감에서 나온 행동은 부정적인 결과에서 스스로를, 오로지 스스로만을 보호하려는 행동이다.

 

p.51-52

학자들은 변증법, 엘렌쿠스(elenchus), 귀납적 추론 등 여러 멋진 용어를 이용해서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을 설명한다. 나는 더 단순한 용어를 선호한다. 바로 대화다. 이 단어가 그리 고급스럽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 내게 노벨상을 낚아채주지도 않으리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이건 맞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현대 철학자 로버트 솔로몬은 이를 "현명한 훈수질"이라고 부른다. 마음에 든다. 이 표현은 철학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동시에 더 높은 수준으로 올려놓는다. 

 

삶을 성찰하려면 거리를 둬야 한다. 자기 자신을 더 명확하게 들여댜보려면 자신에게서 몇 발짝 물러나야 한다. 이렇게 거리를 둘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과 대화는 사실상 동의어였다.

 

소크라테스는 온갖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정치인과 장군, 공예가뿐만 아니라 여성과 노예, 어린아이들에게도 말을 걸었다. 온갖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지만 주제는 반드시 중요한 것이어야 했다. 소크라테스는 잡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인생이 짧다는 것, 자신에게 주어진 단 1초의 시간도 사소한 문제에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라는 소피스트에게 격분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최선의 삶을 살 수 있을지를 고찰하고 있는 거라네. 제정신인 사람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어디 있단 말인가?"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사랑하긴 했지만 그는 대화를 그저 자신이 가진 도구 중 하나로 본 것 같다. 현명한 훈수질에는 하나의 목표가 있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법을 배웠다. 

 

p.57

좋은 철학은 느린 철학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일을 "느린 해결책"이라고 칭했으며 모든 철학자는 서로 "느긋해지세요!"라는 말로 인사를 건네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게 철학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나 이와 비슷한 무의미한 표현 대신, 우리 서로에게 "느긋해지세요"나 "천천히 하세요"라는 말로 인사해보자. 이런 명령식의 표현을 자주 말하다 보면 정말로 속도를 줄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한편으로 나는 우리가 속도를 줄이는 데서 오는 인지적 혜택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뭔가가 우리를 막고 생각하게 만들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멈춰 세웠다"고 말한다. 멈춤은 실수나 결함이 아니다. 멈춤은 말을 더듬는 것도, 말을 가로막는 것도 아니다. 멈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잠시 유예된 상황이다. 생각의 씨앗이다. 모든 멈춤은 인식의 가능성, 그리고 궁금해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p.76~77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그게 철학의 본성이다.

 

p.80

"걷기는 자극과 휴식, 노력과 게으름 사이의 정확한 균형을 제공한다."

 

p.87

걷는 방식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걸음걸이는 지문이나 서명처럼 개개인이 다 다르며, 최근 국방부에서는 95퍼센트의 정확도로 걸음걸이를 식별할 수 있는 첨단 레이더를 개발했다. 모두에겐 자기만의 걷는 스타일이 있다.

 

p.93

루소는 철학의 가장 큰 통념 중 하나가 거짓임을 보여준다. 바로, 정신 활동은 신체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는 통념이다.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서 유레카를 외친 순간부터 데카르트의 걸출한 펜싱 실력과 사르트르의 성적 모험에 이르기까지, 철학에는 신체와 관련된 조류가 흐른다. 신체와 분리된 철학자, 신체와 분리된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는 "처러학보다 몸에 더 많은 지혜가 있다"고 말했다.

 

p.99

놀랍게도 철학자이자 황제인 마르쿠스가 대답을 해준다. 상상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역경을 만나면 자기 연민이나 절망에 빠지지 말고 그저 다시 시작하라. 이런 식으로 바라보면 삶은 더 이상 실패한 서사나 망쳐버린 결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진실이 아니다. 결말 같은 건 없다. 무한한 시작의 사슬만이 있을 뿐.

 

p.111-112

내가 철학 연구에서 배운 게 있다면, 그건 첫인상은 틀릴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의심은 필수다. 의심은 우리를 하나의 확신에서 또 다른 확신으로 옮겨주는 버스다. 아주 천천히, 모든 정류장에 정차하는 버스.

 

p.119

소로는 지식보다 시력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다. 지식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불오나전하다. 오늘의 확신은 내일의 헛소리다. "그게 무엇인지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그것을 어떻게 보는지뿐이다."

 

p.132-133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이 주변 환경을 훑으며 정보를 뽑아내는 안테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감각은 홍수처럼 밀려드는 감각 정보에 압도되지 않도록 뒤엉켜 있는 온갖 잡다한 것에서 유의미한 신호를 걸러내는 필터에 더 가깝다. 소로의 말처럼 우리는 "무한한 세상에서 자신의 몫"만을,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만 받아들이도록 타고난다.

 

보는 행위는 의도적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때조차 보는 것은 언제나 선택의 행위다. 소로는 제대로 보려면 "눈에 별도의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핵심은 각도다. 소로처럼 온갖 각도를 다 활용한 사람은 없었다. 관점을 바꾸면 어떻게 보느냐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도 바뀐다. "제대로 된 관점에서 보면 모든 폭풍과 그 안에 든 모든 빗방울이 무지개다."

 

p.134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있는 게 아니다.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마음속에 있다. 자기 자신을 향상시키지 않고는 자신의 시력을 향상시킬 수 없다. 보는 것의 역학은 양쪽으로 작용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무엇을 보는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는가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하다. <베다>에서 말하듯, "당신이 보는 것이 곧 당신 자신이다."

 

p.164

예술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다. 예술, 좋은 예술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고, 쇼펜하우어는 생각했다. 예술가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지식을 전달한다. 실재의 진정한 본질을 보여주는 창문. 예술은 "한낱 개념"을 넘어서는 지식이며, 그러머ㅡ로 말의 표현 범위를 넘어선다.

 

또한 좋은 예술은 정념을 초월한다. 욕망을 키우는 모든 것은 고통을 키운다. 욕망을, 쇼펜하우어의 표현에 따르면, 의지를 줄이는 모든 것은 고통을 완화한다. 예술 작품을 바라볼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포르노가 예술이 아닌 것이다. 포르노는 예술의 정반대 지점에 있다. 포르노의 유일한 목적은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다. 욕망을 자극하지 못하면 그 포르노는 실패작으로 여겨진다. 예술에는 더 고귀한 목표가 있다. 채리 한 그릇을 그린 정물화 앞에서 느껴지는 반응이 배고픔뿐이라면 그 작품을 그린 예술가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p.179

우리는 데이터를 정보로 착각하고,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경향을 염려했다. 그가 눈 돌리는 곳마다 사람들은 정보를 통찰로 착각하며 앞 다투어 달려들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정보는 그저 통찰로 향하는 수단일 뿐이며 정보 그 자체에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런 과도한 양의 데이터(사실상 소음)는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이며, 통찰의 가능성을 없앤다. 소음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음악을 듣지 못한다.

 

p.186

"사람들은 해롭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욕망한다."

 

p.197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불안의 부재다.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주의자'였다.

 

p.212-213

충분히 좋음은 안주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변명도 아니다. 충분히 좋음은 자기 앞에 나타난 모든 것에 깊이 감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완벽함도 좋음의 적이지만, 좋음도 충분히 좋음의 적이다.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충분히 좋음의 신념을 따르면 놀라운 일이 생긴다. 마치 뱀의 허물을 벗듯 '충분히'가 떨어져 나가고, 그저 좋음만이 남ㄴ는다.

 

p.222

관심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기로 결정했느냐, 더 중요하게는 어떻게 관심을 기울이느냐가 곧 그 사람을 보여준다. 지난 삶을 돌아볼 때 어떤 기억이 표면 위로 떠오르는가? 어쩌면 결혼식처럼 커다란 사건일 수도 있고, 우체국의 말도 안 되게 긴 줄에서 뒤에 선 사람과 나눈 뜻밖의 다정한 대화처럼 작은 사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은 가장 주의를 기울인 순간일 확률이 높다. 우리의 삶은 가장 열중한 순간들의 총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베유는 "가장 큰 희열은 가장 온전하게 주의를 기울였을 때 찾아온다"라고 말했다.

 

p.252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 향하는 대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문제인 것은 그 주체, 즉 '나'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때 그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환상이다. 헤로인 중독자는 헤로인을 갈망하지 않는다. 헤로인을 하는 경험,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헤로인을 못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정신적 괴로움으로부터의 자유, 즉 아타락시아다.

 

p.275

간디는 폭력을 혐오했지만 그가 폭력보다 더 싫어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비겁함이었다. 둘 사이에서 골라야 한다면 간디는 폭력을 선택했다. "비겁한 사람은 남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간디의 진정한 목표는 인도의 잃어버린 남성적 힘을, 인도만의 방식으로 되찾는 것이었다. 간디는 그렇게 하면 자유가 자연히 따라오리라 믿었다.

 

p.288

비폭력이 효과를 발휘하지 않은, 아니 발휘할 수 없었던 명백한 사례는 아돌프 히틀러와 관련되어 있다. 1939년과 1940년, 간디는 히틀러에게 평화의 길을 선택하라고 촉구하는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냈다. 그 후 곧바로 간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명백히 역사상 가장 잘못된 발언 중 하나였다. "나는 히틀러 씨가 보이는 것 만큼 나쁜 사람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드러난 후에도 간디는 유대인들이 "도살자의 칼에 스스로를 바쳐야 했다. 바닷가의 절벽에서 스스로를 내던져야 했다... 그랬다면 전 세계와 독일인들을 각성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순진하고 명백하게 그릇된 발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말 간디는 처칠이 말했던 것처럼 "반즘 벗은 까까머리 중"이자 사기꾼이었을까?

 

p.306

예의는 사회의 윤활유이고, 친절은 사회의 초강력 접착제다. 예의 있는 문화가 꼭 친절한 문화인 것은 아니다.

 

p.372

"모든 진실은 구불구불하다." 니체가 말했다. 모든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든 것이 지난 후에야 과거를 돌이켜보며 서사를 매끄럽게 다듬고 패턴과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지그재그다. 여백도 있다. 과거의 자신을 막 모습을 드러낸 미래의 자신과 갈라주는 텍스트 사이의 빈 공간. 이 여백은 무언가가 누락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백은 무언의 과도기이며, 우리 삶의 흐름이 바꾸는 지점이다.

 

p.439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말했듯이 우리가 노화 탓으로 돌리는 많은 결점은 사실 인성의 문제다. 노화는 새로운 성격 특성을 만들어낸다기보다는 기존의 특성을 더욱 증폭한다. 우리는 나이 들수록 더 강렬한 형태의 자기 자신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보통 긍정적이지 않다. 돈 쓰는 데 신중한 청년은 늘 투덜대는 늙은 수전노가 된다. 감탄할 만큼 의지가 강한 젊은 여성은 짜증날 만큼 고집 센 할머니가 된다. 이런 성격의 강화는 늘 부정적인 쪽으로만 흘러가야 하는 걸까? 나이 들면서 그 궤도의 방향을 꺾을 수는 없는 걸까? 더 나은 모습의 나이 든 내가 될 수는 없을까?

 

p.445

실존주의자들에게 사람은 곧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다. 더 이상의 반박은 없다. 우리는 온전히 실현한 기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추상적인 개념의 사랑이란 없으며, 오로지 사랑하는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천재란 없고, 천재적인 행동만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한 번에 한 붓질씩 자기 자화상을 그린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곧 그 자화상이며 "오로지 그 자화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더 이상 스스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 말 것. 스스로를 그려나가기 시작할 것.

 

p.489

인간은 불편한 진실을 거부하는 데 능하며, 죽음보다 더 불편한 진실은 없다. 나는 거울 속의 나이 든 내 얼굴을 바라보듯이, 죽음을 바라본다. 안 보거나, 본다 해도 옆으로 힐끗 본다는 뜻이다. 죽음의 공격에 맞서 스스로에게 예방주사를 놓으려는, 절박하고 헛된 시도다.

 

몽테뉴는 그런 회피에 너무 큰 대가가 따른다고 생각했다. 죽음을 회피하면 "다른 기쁨까지 전부 사라져버린다." 몽테뉴는 죽음을, 자기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직면하지 않고선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없다고 말한다. "죽음에서 낯선 느낌을 제거하고, 죽음을 알고, 죽음에 익숙해지자. 다른 무엇도 죽음만큼 자주 생각하지 말자. 매 순간 죽음의 모든 양상을 상상하자. 말에서 떨어질 때, 건물 타일이 떨어질 때, 아주 살짝 바늘에 찔릴 때, 즉시 이렇게 생각하자. 지금 내가 죽는다면?"

 

몽테뉴는 그리스 극작가 아이스킬로스가 독수리가 물고 가던 거북 등딱지에 맞아 죽었다고 말하며 죽음이 언제든 우리를 찾아올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언제나 장화를 신고 즉시 떠날 준비를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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