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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주역의 예지

by Diligejy 2023. 3. 7.

p.17~18

'상왈'로 시작하는 [상전]은 64괘의 괘사에 대한 해석(대상)과 괘를 구성하는 각 육효의 효사에 대한 해석(소상)으로 구분된다(전자를 '대상', 후자를 '소상'이라고 구분하기도 하는데 이 책에서도 이러한 구분에 따라 '대상', '소상'으로 표기한다). '대상'은 64괘를 구성하는 상하 괘의 괘상을 근거로 해석한다. 각 괘의 형태 및 의미에 대한 총평이기 때문에 '대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괘가 64개이기 때문에 '대상'도 64개다.

 

'소상'은 각 괘를 구성하는 육효 각각에 대해 각 효의 위치 및 형태에 근거한 해석이다. 모든 괘는 6개의 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 괘마다 '소상'도 당연히 6개이고, 64괘에 대해 각각 6개의 효가 있으니 전체 효는 384개, 효사도 384개다. 그리고 각 효사마다 '소상'이 붙어 있기 때문에 <주역> 전체적으로 '소상' 역시 384개다. '소상'은 '소상'이 해설하고자 하는 효사의 핵심을 간략한 구절로 요약하고, 그것의 의미 및 판단의 이유 등을 각 효의 위치, 음양, 상하 효의 관계 등을 근거로 해석한다.

 

'대상'은 건괘를 구성하는 상하의 괘를 총평하면서 괘의 의미를 도출한다. <주역> 점을 치는 사람은 괘와 효의 판단 자체에 돌입하기 전에 이 '대상'의 메시지를 음미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주역>을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대상'의 메시지를 음미하면서 <주역>이 나에게 알려주는 지혜를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64괘의 '대상' 자체는 다시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앞부분은 괘의 형태에 입각한 설명이고, 뒷부분은 괘의 형태에서 끌어낼 수 있는 인간학적 함의다. 이런 '대상'의 해석을 거치면서 <주역>은 고대의 점서에서 유가적 철리를 담은 경전으로서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p.21

잠룡, 물용에 대해 진의 간보는 주나라 문왕이 유리에 잡혀 있던 상황을 말한 구절이라고 보고, '물용'은 문왕이 아직 등용되지 못한 시기를 표현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괘사나 효사를 역사적 사건과 연결시키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사건은 사건 그 자체의 내용보다는 그 사건을 통한 인간적 체험을 해석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읽어야 한다. 문왕의 체험은 사건 그 자체로서보다는 인간의 고난 체험의 상징으로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효가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나온 것인가를 밝히는 역사적 해명은 [주역]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p.22

[주역]에서 1, 3, 5는 양(홀수)이고, 2, 4, 6은 음이다. 음의 자리, 즉 2, 4, 6에 양효가 오면 '부정不正'이라고 평가한다. 위치가 바르지 않다는 의미다. '실위失位' 혹은 '부당위不當位'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건과 곤의 경우에 바름과 바르지 않음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보통 하나의 괘 안에 음효와 양효가 호응하는 것은 바람직한 상이라고 본다.

 

초(1)와 4, 2와

5, 3과 상(6)이 대응하고, 음과 양일 때 호응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이효가 음효이고 오효에 양효가 올 때, 그 두 효는 호응한다. 초효와 사효, 삼효와 상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음효와 양효는 서로 호응하고 협력하기 때문에 좋은 의미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양효와 양효, 음효와 음효는 호응하지 않는다. 그것을 '실응失應'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건괘의 경우 이효는 양효만 오효의 양효, 즉 구오와 호응한다고 해석한다. 또한 이(二)는 신하의 자리, 오(五)는 군주의 자리라고 해석한다. 상하가 호응하면 힘을 가지게 된다. 호응하지 않으면 도움을 주는 상대가 없기 때문에 힘이 부족해진다.

 

p.25

[주역]은 균형을 강조한다. 상승세를 탈 때 경거망동하지 말고 더욱 조심하라! 하강기에 있을 때 낙담하지 말고 새로운 기회를 준비하라! 이것이 [주역]의 핵심 메시지 중의 하나다.

 

강건한 덕을 가진 군자는 '항상(終日)'  발전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군자는 대인과 비슷한 말로 덕을 가진 인물, 또는 덕과 지위를 겸비한 인물을 가리킨다. 스스로 자각적으로, 주체적으로 인생을 영위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그런 반성력과 주체성에 입각하여 군주를 도와 나라를 운영할 수도 있다. '종일'은 하루가 끝날 때까지라는 의미다. 구삼이 하괘의 끝(終)에 위치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건건'은 강건하고 또 강건하다는 의미로 건(강건함)을 강조하는 표현 형식이다. 강건하고 또 강건하게 '자강불식自强不息'한다는 의미다. 

 

'석척약', 즉 군자는 밤에 휴식할 때도 자신을 반성하고 염려한다. 염려한다는 의미의 척(惕)은 [주역]의 핵심 가치를 반영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정서적으로 불안하여 벌벌 떤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배려하고 반성한다는 의미다. 그런 염려와 반성이 있기 때문에 위험한 자리(三)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p.27

[주역]에서 삼효, 사효는 쉽지 않은 위치, 난처한 자리다. 하괘의 끝에 있어서 위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하괘를 벗어나긴 했지만 외괘(外卦, 상괘)에서는 가장 낮아서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삼효와 사효는 자칫하면 저항을 불러일으키거나, 위로부터의 압박을 받기 쉽다. 따라서 [계사전]에서는 '삼다흉三多凶', '사다구四多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건괘 구삼의 '종일건건, 석척약', 구사의 '혹약재연'은 처해있는 상황이 쉽지 않기 떄문에 근심하고 머뭇거리면서 상황을 예의 주시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구사는 상괘의 처음 자리에 있다. 변화가 막 시작되었으나 아직 진퇴나 승패가 결정되지 않은 단계에 있는 것이다.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은 바른 때가 있다. 때를 알아야 재난을 당하지 않는다. 

 

p.28

[주역]의 판단사에는 정도의 차이에 따라 여러 단계가 있다. 구(咎)는 회(悔)보다 무겁고, 흉(凶)보다는 가벼운 재난이다. 회, 구, 흉의 순서로 점점 더 나빠진다. 회는 비교적 작은 곤란, 후회할 만한 일이다. 구는 비교적 가벼운 재난을 의미한다. 흉은 거대한 재난, 크게 나쁜 일이다.

 

p.32-33

'견군룡무수(見群龍無首)', 즉 '무리를 이룬 용이 머리가 없음을 본다'라는 말은 용이 머리를 감추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즉 유순하고 겸손하게 행동한다는 뜻이다. 강건한 성질을 가진 용은 자기 힘을 과시하기 위해 머리를 치켜들 수 있다. 머리를 치켜든다는 말은 지나치게 강하거나 건방지다는 의미다. 그러나 여기서 용은 한 마리도 아니고 무리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강건함을 과시하지 않고 스스로를 자랑하지도 않는다. 아예 그들은 머리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자신의 주견과 주장을 전혀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건괘를 이루는 양효 전부가 노양(老陽 - 노쇠한 용)이라 결국은 음(陰)으로 변화한 형상이다. 그런 경우 상황은 긍정적으로 전개되어 나갈 수 있다. 용구의 효사는 양강인 경우의 마음가짐을 보여준다. 건의 강건한 덕은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열흘 동안 피는 꽃이 없고, 10년을 지속하는 권력도 없다.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겸허함(謙)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길하다. [주역]의 지혜가 여기서 다시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주역]을 대표하는 괘는 건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건괘의 내용을 잘 읽어보면 건괘의 요체가 '강건함(剛=健)'이 아니라 '겸허함(謙=虛)'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주역]을 대표하는 괘는 강건함을 상징하는 건괘가 아니라 오히려 겸허함을 강조하는 겸괘, 혹은 자기 비움을 강조하는 함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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