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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국소설

스파링

by Diligejy 2017. 7. 10.

p.10

모르겠지. 세상 편하게 모르고 있을 터였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라고 떠벌리는 족속들이 있다는 걸 나는 아는데, 인간이 언제가 죗값을 치러야 한다면 그놈들부터 차례로 줄을 세워 목을 날려버려야 한다. 모르는 놈과 모르는 건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놈들이 힘을 합쳐 이 세계를 망가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p.11

남들이 나보다 먼저 나를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도록 방치하는 것은 종종 그 자체로 위험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자꾸만 내가 모르던 내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고 만들어지고 또하나의 나로 자리잡히게 되면 결국, 길을 잃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내가 타자에 의해 규정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급기야 나조차 내가 누구인지 헷갈릴 수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이 서서히 나를 잠식하고, 그러다보면 기어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내가, 정작 진정한 내 모습이기를 바랐던 나를 온전히 삼켜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마치 우주에 버려진 미아처럼 텅 빈 공간을 떠다니게 될 수도 있었다.


p.16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건 그 사람의 마음속에 무언가 다른 관점의 생각들이 존재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p.64

정의를 지키지 않는 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타인에게 정의를 지킬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야 했으므로, 마치 가방 속의 껌처럼 필요할 때면 쉽게 꺼내 씹을 수 있는 위치에 정의를 넣어두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사유하고자 하는 공간에 어떤 이방인이라도 다가와 어슬렁거릴 때면 곧바로 그 껌을 꺼내 딱딱 씹으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들이 소리를 내가며 씹는 정의는 그러므로 그들이 감추고자 하는 세계의 경보음이자 누구든 그곳에는 단 한 발짝도 들여놓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혹은 위협의 신호인 셈이었다.


p.76~77

흥미로운 것은 자기가 누굴 괴롭힘으로써 나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그 고통을 깨달아 더는 남을 괴롭히지 않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히려 더 잔혹하게 그들은 남을 괴롭혔다. 그때의 나로선 알 수 없는 심리였는데 그런 모습을 돌이켜보며 내가 궁금했던 건, 그렇다면 그같은 응징이 정의의 이름으로 수행되었다고 한들 그들의 태도가 달라졌을까 하는 점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행한 응징이 더 큰 피해를 양산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더한 음지로 밀어넣는 꼴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정의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어디까지를 책임져야 그 본연의 임무를 완수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정의란 그저 눈앞에 보이는 부조리만 해결하면 그뒤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없는 행위인가?


p.81~82

힘의 균형을 조절해야 할 감시자가 불균등을 묵인하는 부조리를 지속하면 그 그룹 구성원들의 의식 자체가 변화할 수 있었다. 잘못된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징벌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공통된 인식을 약화하는 것이다. 감시자의 묵인은 대개 피해자의 자포자기 혹은 침묵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고, 감시자와 피해자가 모두 침묵하는 공간에서 부조리는 더이상 부조리가 아닌 것으로 취급될 수 있었다.


이 과정은 부조리가 아니라 하나의 관행으로 자리잡힐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관행으로 자리잡힌 일들은 우리의 일상과 동등한 평가를 받으며 더는 불공평하거나 문제가 있는 상황으로 인식되지 않았고, 다소 불편할 때가 있더라도 그 또한 삶의 과정이니 전적으로 개인이 감당하고 살아야 하는 문제로 치부되기 십상이었다. 전체의 문제였던 일들이 그야말로 쥐도 새도 모르게 증발했다가 부지불식간에 개인의 문제로 뒤바뀌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모두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더이상 사회의 문제로 취급되지 않았다. 기묘한 방식으로 사회문제가 사라져버리는 셈이었다.


p.87

폭력성 가운데서도 가장 찌질한 폭력성을 지닌 인간들. 책과 폭력은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아주 밀접한 관계일 수 있었고 오히려 활자화된 폭력이 때론 더 잔인할 수 있었다. 글과 지식은 사용자의 인성에 따라 좋은 인품을 갖추는 도구가 될 수도 있었지만 직접적인 폭력의 도구가 될 수도 있었고, 도리어 폭력성을 감추는 가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p.161

"판사는 인마, 진실을 밝히는 사람이 아니야. 조서에 올라온 내용으로 잘잘못만 따지는 사람이지."


소나무 형의 그 말은 지하 골방에서 공명하는 것처럼 내 머릿속을 울렸다. 그럼 진실은 누가 밝히는가. 아무도 밝히는 사람이 없다면 진실은 왜 필요한가. 나 혼자만 아는 것이 진실이라면 진실을 지켜야 할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사람들이 말하는 진실이란 무엇인가. 사실과 다르지만 내가 가진 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그 진실과 같은 거라고 우겨댄다면, 그 말의 진실 여부는 또 누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p.178

때론 생각이라는 걸 안 하고 살면 그게 제일 편한 것 같지만, 또 막상 자기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고 살면 명확히 제 세계를 구축하고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질서에 휩쓸리게 돼. 문제는 그들이 세운 질서가 네가 원하는 질서와 다를 수도 있다는 거야. 너한테 무조건 불리하고, 너한테 무조건 억울한. 이해가 돼?


p.179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고, 결과도 하나 달라진 게 없는데, 저마다의 의견이 존재한다는 이상한 결론 하나로 결국 문제 자체가 사라져버리고 말았어. 마술처럼. 신기하지? 자, 그렇다면 이 문제의 문제는 뭘까?


p.181

이미 부당한 질서에 순응한 너희들은 그 새로을 질서에도 곧 순응하게 될 거야. 그때도 그게 물 흐르는 듯이 순리대로 사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고. 그렇지? 그러면 곧 네 보육원 후배들이 그 지역 중학교에 올라갈 즈음이면 천원으로 끝나지 않는 시대를 살게 될 수도 있어. 자 그럼, 그 아이들이 그런 세상을 살게 되는 데에 너희의 책임이 있을까, 없을까?


p.220

훗날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의 나를 확인해보고 싶을 때, 아무래도 자꾸 더 되새기게 되는 건 많이 이긴 전적보다 진짜 제대로 붙어봤던 단 한 번의 기억이거든.


p.300

가장 큰 문제는 공과를 판단해야 하는 인간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있는 인간이 아는 게 없다보니 정말 혼나야 하는 게 누구인지 몰라 아무나 막 혼내고, 정작 혼나야 하는 원흉은 그늘 속에 숨어 입가를 휘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자가 한 조직을 이끄는 수장이 되면 자신의 조직을 모조리 사지로 내몰기 십상이었고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렇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뿐더러, 심지어 모조리 죽이고서도 자기가 그런 것인지 알지 못했다.


모른다는 것이 그런 것이었다. 모르고 저지르는 사람은 밖에서 망을 보는 도둑놈의 일행처럼, 알고 저지르는 놈들의 공범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도 자기가 직접 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그들의 사고방식이었고,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줘도 그들은 곧 밝혀지지 않은 죄 또한 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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