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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국소설

디 마이너스

by Diligejy 2017. 8. 14.

p.9

기억은 스스로 사라진다. 파괴는 불가능하고 분실이 최선이다. 왜 잊으려 애쓰는가?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잊었음을 깨닫는가? 되찾을 때가 왔기 때문이다. 기억의 종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우스개와 같다.


p.10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어쩌면 그래서 죄는 용서해도 사람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p.15

겸허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어야 하지, 단어를 선택하며 발휘하는 게 아니다.


p.37

아이에게 신을 선택할 자유를 주는 편이 나을 거야. 정말로 교회에 복수하고 싶다면.


p.143

과거 국내 최대의 자동차 기업이었던 대우자동차가 부도를 맞았다. 해외 시장으로 무리한 확장을 시도했던 게 화근이 됐다. 먼저 몸집을 부풀려야 몸집을 키울 힘도 생긴다는, 김우중 회장의 독창적인 지렛대 경영 전략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다. 이 경영 전략의 공식 명칭은 '세계경영'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대우자동차를 구제하는 대신 해외 매각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 정책 역시 '세계화'란 이름이 붙었다. 김우중의 세계경영 대 김대중의 세계화. '세계'란 무엇인가?


p.202

선배들은 대공분실 이야기를 웃으며 들려주었다. 엄청나게 멋지고 낭만적인 전설인 것처럼. 나도 웃으면서 들었다. 지나간 시절의 영광된 이야기가 다 그랬다. 프랑스 시민혁명의 낭만에 대한 이야기야 널렸지만, 누가 바스티유 감옥에서 조각조각 분해된 채 죽은 자들의 공포를 말하던가? 죽은 자는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개인은 나쁜 일을 먼저 기억하지만 역사는 좋은 일만을 기억하는 것이다.


p.227

인간은 불행이 따르면 믿을 수 없어 하지만, 불행이 닥치지 않는다고 의아함을 느끼지는 않는 법이다. 그리고 불행은 인간이 완전히 방심했을 때, 즉 몸과 마음의 긴장을 홀가분하게 내려놓았을 때, 무장강도처럼 불쑥 찾아와 최악의 피해를 남긴다. 그래서 그것이 불행이라고 불린다.


p.332~333

축제란 불바다인 전쟁과 피가 튀는 학살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죄책감의 산물이었다. 대한민국의 다섯 개 국가경축일 가운데 네 개가 전쟁과 관련이 있다. 대한민국의 45개 국가기념일 가운데 17개가 전쟁과 관련이 있다. 축제는 인간의 죄에서 유래했다. 축제의 흥취에 익사 직전까지 젖었을 때, 비로소 인간이 저지른 지나간 죄는 깨끗이 망각된다.


그러므로.

축제는 계속되어야 한다.

인간의 죄가 계속되는 한.


p.407

너희가 무엇과 싸우는지 정확히 말해주마. 너희는 세상과 싸우는 게 아냐. 세상이란 단어에는 아무 뜻도 없어. 너희는 선배들과 싸우고 있다. 너만 할 때는 딱 너랑 똑같은 눈빛을 가졌던 놈들. 그리고 언젠가 네 후배들이 너랑 똑같은 눈을 하고 너의 미래와 싸우게 될 거야. 끝이 없는 윤회 같은 거지. 나는 너희를 혐오한다. 너희는 역겨워. 너희에 비하면 무장강도가 차라리 순수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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