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세이

검사내전

by Diligejy 2018. 3. 9.

p.10~11

우리는 이처럼 조직의 논리에 쉽게 물들지 않고 물음표를 가지는 이들을 종종 만난다. 그러나 그들이 조직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누구보다도 국가를, 회사를, 학교를, 자신이 속한 공간을 사랑하는 이들이다.


p.16

서울중앙지검을 떠나기 전에 영민 씨를 불렀다. 그에게 뭔가 멋진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바보 같게도 나는 그에게 살다 보니 세상이 다 사기 같다고 말했다. 영민 씨 같은 사람에게 세상은 더욱 그렇다고 했다. 청년에게 희망을 주라는 말도 사기라고 했다. 그런말을 하는 살마들은 대부분 자기 자식들에게 희망이 아니라 특혜를 준다. 청년에게 위로를 건넨다는 교수나 종교인도 정작 관심은 돈에 있는 것일지 모른다. 정의와 법치주의를 부르짖는 검찰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사기의 주연일지 모른다. 어쩌면 개처럼 일하는 형사부 검사들의 선의와 신실함이 이 사기의 가장 화려한 기술로 악용되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세상은 늘 영민 씨 같은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과 기대를 훔쳐 가는지 모른다.


p.26~27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언론에 자주 나오는 검사보다는 재배당과 이송을 적게 하는 검사가 좋은 검사다. 재배당을 하게 되면 모든 수사가 일시에 얼어붙게 되고, 새로운 검사가 재배당 받은 사건을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재배당을 받은 검사는 기소중지된 사건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 기소중지된 사건들은 기록 보관 창고에 있고 전산상으로만 승계가 된다. 해당 사건은 수배된 피의자가 잡혀야 창고에서 나와 빛을 보게 되고, 검사는 그제야 비로소 해당 기록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p.49

곤경에 처했을 때 가장 쉽고 효과적인 해결책은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모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함은 터무니없을수록 효과적이다.


p.63

논리와 이성의 천적은 부조리가 아니라 욕심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주성분은 욕심, 욕망, 욕정이다. 우리는 '욕심'이라는 거친 바다 위를 구멍 뚫린 '합리'라는 배를 타고 가는 불안한 존재들이다. 마땅히 쉼 없이 구멍을 메우고 차오르는 욕심을 퍼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욕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허세를 부린다. 그래서 우리는 욕심으로부터 논리와 이성을 지켜내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그 결과 아무리 허술한 속임수라도 피해자의 욕심과 만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지구온난화를 해결해주는 무한동력 에너지 사업도 200세 인생을 가능케 하는 세포재생 사업도, 바르기만 하면 100달러짜리 지폐로 변모한다는 마법 잉크도 모두 가능해지는 것이다. 개미귀신은 늘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 개미귀신이 개미에게 뿌려대는 모래는 내 마음속의 탐욕이다. 누구도 자신 안의 탐욕을 이길 수는 없다.


p.68

사랑과 두려움 둘 중에 꼭 하나를 고르라면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운 존재가 되는 것이 낫다고 한 마키아벨리 말이 맞는 것 같다. 차라리 겁을 주었다면 합의를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p.69

목사님은 7년 동안 이 사기꾼들에게 끌려다녔다. 재산을 모두 잃었을 뿐 아니라 부인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충격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현재는 앉지도 걷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목사님의 비극은 이들의 형량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기껏해야 징역 1~2년 더 얹히는 정도다. 재판정에 나가보면 피해자의 반신불수보다 피고인의 치질이 더 중병 취급을 받는다. 그것을 지켜보는 피해자들은 심장이 구겨지듯 괴롭다. 그러니 제발 범죄 피해를 당하지 마시라. 피해자도 헌법상 기본권이 보장된 우리나라 국민이지만 실제로는 2등 국민이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오류의 중요한 본질적 요소는 오류의 형식이나 수단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려는 의도, 즉 여러 가지 형태를 통해 그것을 관철하려는 의도이다." 어려운 말인데, 내 수준에서는 사람들이 오류에 빠지는 것은 궁극적으로 원하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p.70

호메로스는 만약 인간이 자기 운명보다 더 많은 고통을 당했다면 그것은 신들 탓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의 장님 때문이라고 했다.


p.76

헌 가마니에 더 들어가는 법이다. 늙는다고 욕심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할머니의 말은 감정적이었다. 감정적인 것은 대개 부정확하나 사람들을 꾀는 데는 효과적이다. 고갱은 말했다. "생각은 감각의 노예다." 사람들은 감정이 가자는 대로 가면서도 꼭 합리적이었다고 변명한다.


p.81

할머니의 필살기는 돌려준 돈을 이중 삼중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1월 1일 강씨로부터 1000만 원을 투자받으면 한 달 후인 12월 1일 수익금 명목으로 200만 원을 강 씨에게 송금해준다. 그 후 12월 3일에 직접 만나 추가 수익금이라면서 100만 원을 더 준다. 그런데 이날 12월 1일에 송금한 돈을 합한 300만 원짜리 영수증을 받는다. 12월 5일에는 다른 번호계의 계금 1000만 원을 강 씨 게좌로 송금한다. 12월 7일에 강 씨를 만나 이에 대한 영수증을 받는다. 12월 10일에는 바다이야기 아저씨에게 전해달라면서 500만 원을 강 씨 계좌로 송금한다. 며칠 후인 12월 12일 곗날에는 바다이야기 아저씨에게 100만 원을 추가로 주고 그로부터 600만 원짜리 영수증을 받는다.


강 씨가 할머니를 사기죄로 고소하면 할머니는 강 씨에게 받은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돌려주었다고 변명한다. 그리고 그 증거자료로 12월 1일 200만 원 송금증, 12월 3일 300만 원 영수증, 12월 5일 1000만 원 송금증, 12월 7일 1000만 원 영수증, 12월 10일 500만 원 송금증을 제시한다. 즉, 1000만원을 받았는데 3000만원을 돌려준 셈이 되는 것이다. 물론 자세히 살펴보면 이중 계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할머니는 여러 계에서 수십 명과 수십 개의 계좌로 거래했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그 흐름을 잡기 어려웠다. 이런 수법이 설마 통하겠느냐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지 마시라. 할머니는 이 수법으로 거의 모든 민사소송에서 승소했다. 또한 10여 건의 고소 사건 모두 혐의 없음 처분되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가 허위 고소로 몰려 무고죄 조사를 받기도 헀다.


그뿐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피해자가 빚에 시달리다 야반도주를 하면 그것도 이용했다. 야반도주하는 경우 주소지는 그대로 남게 된다. 그럼 피해자를 상대로 대여금반환소송을 한 후 피고의 주소지로 소장을 송달하게 한다. 당연히 피해자의 주소지에는 아무도 살지 않으니 의제자백으로 승소를 하는 것이다. '진화타겁軫火打劫'이라고, 불난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는 것이다.


p.86

강 씨는 조사를 받으면서, 할머니가 설마 자기처럼 어렵고 힘든 사람을 등칠 줄 몰랐다며 흐느꼈다. 그러나 만만한 데 말뚝 박고, 생가지보다 마른 가지 꺾는 법이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니까 사기치는 것이다. 1960년대부터 탄자니아에서 침팬지를 연구했던 제인 구달의 연구도 이를 입증한다. 구달에 따르면 침팬지 무리가 다른 무리를 공격할 때는 영토를 침범당하거나 위협을 당할 때가 아니라고 한다. 그 무리가 약할 때라는 것이다. 19세기 초 남태평양에 살고 있던 모리오리족은 해협을 건너 침략해온 뉴질랜드 원주민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며 선의와 평화를 청했다. 하지만 무기를 버린 그들은 결국 살해되고 노예가 되었다. 선의는 자신이 베풀어야 하는 것이지 타인에게 바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기도 마찬가지다. 사기꾼은 없는 사람, 약한 사람, 힘든 사람, 타인의 선의를 근거 없이 믿는 사람들을 노린다. 이것이 사기의 서글픈 두 번째 공식이다. 그러니 설마 자기같이 어려운 사람을 등쳐먹겠느냐고 안심하지 마시라.


p.96

"매달 300만원씩 꾸준히 수익이 나는 가게는 절대 매물로 나오지 않아. 그런 거라면 집에서 놀고 있는 자기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창업 브로커들이 너에게 친절한 이유는 딱 하나야. 네가 호구이기 때문이지. 네가 건네주는 권리금의 일부는 창업 브로커 몫이야. 창업 브로커가 권해주는 점포를 물려받는다면 네가 꽃다운 청춘이라고 주장하는 시간들의 대가로 받은 알량한 명예퇴직금을 전 점주와 창업 브로커 그리고 임대인에게 건네주는 꼴밖에 안 돼."


제대로 충고하려면 애정을 빼고, 주저하지 말고, 심장을 향해 칼을 뻗듯 명확하고 고통스럽게 해야 한다. 듣는 사람의 기분까지 감안해서 애매하게 할 거면 아예 안하는 것이 낫다.


p.97

어설프게 아는 것은 사기당하는 지름길이다. 사기의 세 번째 공식이다. 나름대로 알아보는 것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주변의 지인이나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정보는 없느니만 못하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대신해주는 것은 없다. 대신해주겠다는 사람은 대개 브로커다. 뭐든 새로운 일을 하려면 그곳에서 직접 6개월 이상 일해보고나서 결정해야 한다. 그게 싫다면 차라리 안하는 것이 낫다. 그냥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말은 모조리 거짓말이다. 좋은 것을 굳이 광고까지 해서 당신에게 알려주는 선의란 없으며, 만약 그런 게 있다해도 절대 당신의 순번까지 돌아오지는 않는다.


p.103

범죄 피해자가 되는 것은 큰 위기이다. 재산을 비롯한 물리적인 피해를 당할 뿐만 아니라 커다란 정신적 상처를 입는다. 더욱이 사람과 우리 사회에 대한 신뢰도 잃는다. 살면서 누구나 어려움을 겪는다. 흔히 사람들은 위기가 기회라고 설교한다. 정말 그럴까? 주변에서 그런 사례를 직접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없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듯 위기는 위기다. 그것이 기회라고 말하는 사람은 위기를 겪어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위기가 진짜 기회라면 위기를 만들어주는 컨설팅 회사가 있어야 한다. 위기를 극복해서 성공했다는 이야기들을 잘 들어보면 사실 위기가 아니었던 경우가 더 많다. 단순한 순환 과정에서의 일시적인 부침에 불과한 것을 크나큰 위기였던 것처럼 호들갑 떠는 이유는 자신이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고 포장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심각한 타격을 주지 않는 것은 위기가 아니다. 위기란 대개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 게다가 막 걸음을 떼는 영민 씨 같은 청년들에게 닥치는 위기는 재기 불능의 타격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위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위기는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예방하고 피해야 하는 것이다.


p.111~112

청년들이 쉬운 먹잇감인 이유는 자신들이 초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들이나 이러저러한 매체들을 통해 접한 팝콘 같은 상식들이 세상을 꿰뚫어보는 혜안과 냉철한 이성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들은 술자리에서나 통하는 것이다. 현실이라는 실전에서는 빗방울 하나 막아주지 못한다. 소화가 덜 된 이야기들은 세상의 야수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 청년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쉽게 믿고, 한번 믿은 것은 쉽게 바꾸지 못한다. 세상이 조작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에게 쉽게 주입되는 정보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탐사 보도나 고발 프로그램의 내용을 그대로 믿는 청년들이 장마철 개구리처럼 많다. 그러나 사건들은 시나리오처럼 뚜렷한 모습을 가진 것이 아니다. 선과 악이, 원인과 결과가 그렇게 쉽게 구분될 수 없다. 만약 쉽게 구분된다면 그건 감정 탓이다. 감정이 이끄는 결론과 확신은 편하지만 자신이나 달느 사람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생존 기술이 부족한 상태에서 야수를 만나면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청년들은 문제가 터졌을 때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초동 대응부터 문제다. 일이 터지면 혼자 해결해보려고 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해결하는 것도 아니고 혼자 끙끙대면서 그저 잘 해결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는 게 전부일 경우가 많다. 일이 커지면 도움을 구하기도 하지만, 이때 실제 도움이 될 수 있는 가족이나 부모보다는 세상에 대해 자기만큼이나 알지 못하는 친구나 선배들에게 의지한다. 청년들이 하늘같이 생각하는 선배란 겨우 1~2년 더 산 사람들이다. 그런 선배들의 조언을 받는 건 63빌딩에서 뛰어내리면서 우산 대신 파라솔을 드는 것만큼 허망하다. 잘못된 조언과 도움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옛말에 병은 사람을 죽이지 못하나 약은 사람을 죽인다고 했다.


p.121

정의를 외치는 그 많은 단체와 변호사들 중에서 수민 씨 같은 피해자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것이 명예나 정치적인 입지를 주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무관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p.135

시간이 지나 그 상처를 치유해준 것도 있었다. 우연히 만난 애덤 스미스의 말이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이타심은 건물의 장식품과 같다고,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어주기는 하지만 그것이 없다고 해서 사회가 무너지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정의는 건물의 기둥과 같은 거라서 그것이 없어지면 건물이 무너지듯 사회도 무너진다고. 


p.136

마음대로 짓밟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면 그건 존엄한 것이 아니다. 짓밟힌 것이 오히려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간청해야 한다면 그건 존엄한 것이 아니다. 존엄한 것은 두려운 것이고 원시적인 것이다. 지켜지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소년 전담 검사를 하면서 나는 늘 피해자들에게 너는 소중하고 무엇보다 존엄하다고 말해주곤 했다. 그리고 가해자들과 친구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고, 화해하거나 용서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피해를 당한 아이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건 대개 두려움 때문이다. 그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존엄함과 권리를 포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존엄한 것은 양보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화해를 강요하지 말라.


p.143~144

경청하는 자세나 겸손한 마음과 같은 힐링 콘서트에서나 나올법한 것들은 사실 적대감을 줄이는 데는 별 쓸모가 없다. 그것보다는 상대방의 의도를 빨리 알아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상대방의 진의를 파악해야 나와의 거리감을 알 수 있고 서로 일치하는 지점을 확인해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고 한다. 왁자지껄한 선술집같이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하는 말도 잘 들리지 않는 곳에서 신기하게도 좀 떨어진 옆 테이블에서 하는 말이 들리기도 한다. 이때 가장 잘 들리는 말은 자신의 이름이고 그다음은 성적인 대화라고 한다. 그런 말들이 잘 들리는 것은 생존 본능과 종족유지 본능 때문이다. 이를 '칵테일파티 효과'라고 하는데, 칵테일파티처럼 시끄러운 와중에도 자신이 관심을 갖는 말은 들리는 현상을 말한다. 이 말은 사람들 간의 대화에도 적용된다. 자신이 관심 있는 주제여야 대화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테일러 스위프트 팬인 딸에게 산울림 이야기를 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것과 같다.


p.164

사람들은 늘 진실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분노할 대상이 필요한 것뿐이다. 그래서 언론은 공정한 수사와 재판보다는 대부분 흥밋거리에 집착한다. 위기관리 전문가 에릭 데젠홀은 이렇게 말했다. "뉴스 매체는 결코 타락할 수 없는 공명정대한 존재가 아니라 진실과 아무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상처 입히려는 강한 욕구를 가진 영리 기업일 뿐이다.


p.185

흔히 범죄나 청소년 범죄를 사회 탓으로 돌린다. 경쟁 위주의 입시 등으로 원인을 돌리는 것은 여러모로 편리하고 저항도 덜 받는다. 모두에게 책임을 돌리게 되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구조적인 문제라는 피상적인 말잔치로 포장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이론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그 때문에 처음 발표된 199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비난을 받아왔다. 하지만 1993년 그래스믹의 연구에서부터 2005년 맥도날드의 연구에 이르기까지, 이를 반박하기 위해 실시된 여러 조사들에서 오히려 일반이론이 옳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따라서 학교폭력의 원인을 경쟁이나 사회 탓으로 돌리는 것은 비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p.189

단순한 연민은 자신의 선량함을 자랑하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장식품이 될지 모르나 사회 전체로 보면 오히려 악이자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 버나드 맨더빌은 "연민은 공공 이익이나 우리 이성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충동이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선뿐 아니라 악도 나올 수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그는 연민 때문에 처녀의 명예가 무너지고 재판관의 신실함이 더럽혀진다고 덧붙였다.


p.204

독일의 철학자 한스 요나스도 비슷한 말을 했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지 않는가를, 무엇을 원하는가보다 훨씬 빨리 안다는 것이다. 또한 선에 대한 인식보다 악에 대한 인식을 더 쉽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이 무엇인가보다는 불법이 무엇인가를 선험적으로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p.206~207

박 여사는 '욕구'와 '요구'를 교묘하게 섞고 있었다. 법적으로 그 둘은 다른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은 것은 요구이고, 담배를 피우는 것은 욕구이다. 요구는 대부분 권리로 인정받을 수 있으나, 욕구의 경우는 좀 더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야 인정된다.


p.207~

"노름이 사람 죽입니까? 노름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잖아요. 밥을 먹고 싶어 하면 밥을 먹도록 해줘야 하듯이 노름을 하고 싶어 하면 노름을 하게 해줘야 그게 자유 아닙니까?"


"도박은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잖아요."


"무슨 악영향을 미치는데요?"


"그게 좋은 거면 사람들이 그리 싫어하겠어요?"


"아이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면 다 죄인가요? 그럼 왜 불효자는 처벌 안 하는데요? 불효는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거 아니요? 사람들이 싫어하는 거 아니고요?"


오호, 박 여사가 던진 질문은 실로 법률가들을 엄청 괴롭히고 있는 난제이다. 누구도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근원적이고 핵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형법에 대해 갖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 중 하나가 '도대체 어떤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가?'이다. 박 여사 말처럼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라고 모두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 무엇이 범죄로 분류되는 것일까? 나도 모른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라고 만든 직업이 학자이다. 그래서 학자들의 말을 빌려보자면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공리주의적 해석이다. 공동체 전체의 효용을 떨어뜨릴 수 있는 행위는 범죄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얼핏 맞는 말 같지만, 공동체 전체의 효용을 떨어뜨린다고 다 범죄인 것은 아니다. 이기적인 행동은 거의 대부분 공동체 전체의 효용을 떨어뜨리지만 모두 범죄로 처벌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공동체 전체의 효용을 올린다고 하여 모두 범죄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예를 들어 무고한 한 명을 죽여서 죽어가는 다섯 명에게 장기이식을 하여 살렸다고 치자. 한 명을 희생시켜 다섯 명을 살렸기 때문에 공동체 전체의 효용은 늘어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살인죄가 아닌 것은 아니다. 공리주의적 해석을 곧이곧대로 적용하면 이런 일을 범죄로 규정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두 번째는 존 스튜어트 밀이 주장한 '해악 원리'이다. 타인에게 해악을 주는 행위는 범죄이고, 그렇지 않은 행위는 모두 합법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해악 원리도 박 여사의 의문점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매춘, 마약, 도박 등은 타인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다. 해악 원리는 그런 행위들을 범죄로 분류하는 보편적인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 약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해악 원리를 일부 수정한 것이 '공격 원칙'이론이다. 공격 원칙 이론은 타인에게 해악을 미칠 뿐만 아니라 그 행위로 타인을 분노케 하면 그것은 죄로 분류된다는 설명이다. 감정적으로는 납득되지 않지만 사실상 현실에 가장 잘 들어맞는 이론이다. 사람들은, 특히 대중들은, 자신들을 화나게 만드는 것을 징벌하는 게 정의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여럿이 뭉칠수록 분노와 정의를 더 빈발하게 혼동한다.


마지막으로 '법도덕주의'이론이 있다. 부도덕과 부정의 정도가 심한 것을 범죄로 분류한다고 설명하는 이론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다소 부도덕하더라도 범죄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부도덕이란 무엇이고, 심하다는 게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법도덕주의가 중요시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가장 적절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법도덕주의의 바탕에는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국가의 간섭을 거부할 수 있는 기본적 자유가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아무리 악행이라도 그 기본적 자유에 해당한다면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길에서 도적을 만나 죽어가는 나그네를 보고도 내버려둔 사람을 비난할 수는 있지만, 돕고 안 돕고는 기본적 자유에 해당하므로 그의 행위를 죄로 처벌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럼 법도덕주의 이론에서 볼 때 도박은 그 정도가 심한 부도덕이나 부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튼 나는 박 여사와 최 계장 간의 대화에 점점 흥미가 생겼고, 당나귀 찬물 건너가듯 술술 나오는 박 여사의 다음 말이 궁금해졌다.


최 계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도박은 계속 범죄로 취급해왔단 말이요. 그리고 내가 도박죄를 만든 것도 아니고, 정당하게 국회의원들이 만든 법률인데 왜 박 여사만 못 지키겠다고 하는 거요?"


"뭐 꼭 안 지키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이 모여서 법으로 만들기만 하면 국민들은 모두 지켜야 하는 건가요?"


오! 이것도 어려운 주제이다. '법이란 무엇인가'를 따지는 질문이다. 법이란 단순한 규칙인가, 아니면 도덕이나 정당성에 관한 것인가. 누구나 한 번쯤 가져봤을 법한 의문이다.


'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오랜 논쟁이 있었다. 심지어 그 똑똑하다고 하는 임마누엘 칸트마저 '법이란 한 개인의 자의가 다른 개인의 자의와 자유의 보편법칙에 따라 합치될 수 있는 제 조건의 총체'라는 참으로 어려운 말을 하면서도 법의 개념이나 정의는 아직도 찾고 있는 중이라고 말한 바 있다. 수많은 철학자들도 제각기 한마디씩 보탰다. 로스코 파운드는 법이란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한 사회공학적 제도'라고 했고, 예링은 '국가권력에 의한 외적 강제에 의해 보장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체'가 법이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유명한 대법원장 올리버 홈즈는 "법이란 법원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예견이다"라는 막말을 하기도 했다.


박 여사가 


p.242~243

사실 의지로 되는 것은 거의 없다. 의지란 아주 극단적인 상황에서 예외적으로만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고, 대부분은 여러 가지 여건이 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우연한 행운을 마치 노력의 대가인 것처럼 속이기 위해 동원하는 말이다. 


p.253

직선적인 추정은 편리할 뿐 아니라 피로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세상 일이 어떻게 인천공항 활주로처럼 직선이겠는가.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곡선이고 움직인다. 사람이 경직되는 것은 오직 죽었을 때뿐이다. 그래서 직선적인 추측은 죽음을 상징한다.


p.255

답은 되도록 말해주지 않는 것이 좋다. 답이라는 것이 도그마가 될 수도 있고, 정작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꼭 말해야 한다면 질문한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서로가 조금이라도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검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바라지 않는 답을 말해준다. "검사가 되려면 시험을 잘 봐서 좋은 대학을 가고, 대학에서 높은 성적을 받아 로스쿨에 들어가고, 거기서 역시 높은 성적을 받아야 합니다."


폭넓고 다양한 경험을 쌓기 위해 여행을 하라거나, 대자연을 품으며 호연지기를 기르라는 답을 기대했는지 모르나, 그렇게 하면 <나는 자연인이다>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더 높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다면 박지성만큼 열심히 뛰면 된다. 막연한 동경이나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열망은 선거 공약과 같은 거다. 별 의미 없다.


p.257

집단지성이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으며 소셜 미디어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통제력과 이해력이 떨어질수록 무언가 믿을 구석을 찾아 매달리게 마련이다. 오늘날에는 소셜 미디어가그 믿을 구석이 되고 있다. 소셜 미디어는 실제와 달리 뉴스가 선정적이고 획기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거대한 압력을 가하면서 뉴스를 더욱더 상품화했다. 소셜 미디어의 '투명성'은 말만 투명성일 뿐이며, 본질적으로 구원과는 불화를 이룬다. 사용자들은 피해자가 언제까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있기만을 바란다. 이론상 소셜 미디어는 대화와 갈등 해결을 장려하나 실제로는 전쟁을 조장한다." 에릭 데젠홀의 말이다.


p.258

현상을 벗어나 그 뒤에 있는 이면에 대한 인식과 고민을 하게 해주는 것은 다양한 경험이다. 기 드보르가 말하길 직접경험은 '소외 또는 분리 이전의 총체성을 회복시켜주는 삶과의 직접적인 만남'이라고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경험해볼 수는 없다. 따라서 간접경험을 통해 그러한 능력을 키우는 것이 현실적인 답이다. 간접경험을 가장 깊이 할 수 있는 것이 책 읽기다. 인터넷이나 영상으로 접하는 정보가 목적지향적인 1차원적 강요라면 책으로 접하는 경험은 3차원적인 단일성의 회복이다. 책 읽기를 통해 습득한 인식과 고민은 때로는 유연성으로, 때로는 냉철함으로 작용한다. 검사 일이 대부분 활자로 된 정보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 책 읽기를 통해 익힌 이해력, 어휘력, 상상력, 비판 의식, 사실 파악 능력 등은 사건의 분석, 해석, 평가에 직접적으로 활용 가능한 능력들이다. 내 경험으로는 단편소설이 가장 효율적인 수단인 것 같다.


p.270

주위의 시선, 경멸의 눈초리, 그렇게 두려웠던 것들이 실상 살을 뚫고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부끄러워도 사람의 시선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다. 내가 아무리 이상해도 사람들은 나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세상에는 정상적인 사람보다 비정상적인 사람이 더 많다. 남과 다르다고 숨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자신이 보고 있기 때문에 어디로 숨을 수도 없다. 


p.296

알파고의 승리도 인류의 승리일 뿐이다. 알파고를 화성인이나 벌칸인이 만든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알파고는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기보를 집적하여 이에 기초해 확률적으로 더 승률이 높은 수를 선택했다고 한다. 즉, 알파고는 새로운 바둑을 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쌓아온 바둑의 역사와 기사들의 빛나는 두뇌를 재빠르게 펼쳐 보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세돌 국수를 이긴 것은 기계가 아니라 시간이었던 것이다.


결국 인공지능이라는 것은 빅 데이터를 활용하는 것이므로 인류의 오랜 지식활동을 찰나에 드러내는 것과 다름없다. 기계가 한 것은 시간의 비용을 줄여준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인공지능은 빅브라더가 아니라 인간의 수고와 땀의 소산이다. 말하자면 방대한 도서관에서 어떻게 신속하게 필요한 책을 찾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내비게이션을 따라 운전한다고 '티맵'이 나를 조종하는 것은 아니듯, 인공지능으로 판결을 하고 법률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서 기계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수백 년간 이어져온 법률가들의 수고와 고민들을 따르는 것뿐이다. 다만 좀 더 신속하고, 공정하다.


p.301

법률가들이 제기하는 과학기술의 많은 문제들은 사실 과하그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였다. 유전공학이 인간의 존엄성을 궁극적으로 침해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굳이 유전공학이나 복제인간을 들먹이지 않아도 인간의 존엄성은 이미 사회 곳곳에서 도전받고 있다. 대부분, 아니 거의 전부, 길거리에서, 마트에서,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갑질'과 부당한 착취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법과 법조인은 그 가해자들과 강자들을 옹호하는 데 활용되었다. 그래서 인간 존엄성 침해를 조장하고 이에 부역한 책임은 누구보다 법조인들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그럼 법조는 왜 유독 이렇게 과학기술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일까? 어쩌면 그건 과거 법조가 인문학, 철학, 종교로부터 권력을 강탈했던 과정과 과학기술이 법률가들을 대체하는 진행 경과가 매우 흡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우라노스로부터 권력을 찬탈한 크로노스가 자신의 자식인 제우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p.307~308

세상의 시비를 가리는 도구로는 '규칙'과 '기준'이 있다. '규칙'은 일정한 규범을 정해놓고 그것에 위배되면 잘못된 것이라고 선언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어느 한쪽이 조금이라도 무거우면 그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에 비해 '기준'은 일정한 지점에서부터의 거리로 잘잘못의 부담을 정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고에 갑이 51%, 을이 49% 책임이 있다고 하자. 그럼 규칙은 그 잘못을 모두 갑에게 지우는 식이다. 이에 비해 기준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면 갑은 정도에서 51걸음 멀어져 있고, 을은 49걸음 멀어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갑과 을 모두 책임을 져야 하고, 다만 그 책임에서 2%의 차이가 날 뿐이다. 기준 방식이 더 바람직해 보이긴 하지만 잘잘못을 수치로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어려운 데다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규칙을 선호한다.


'법'이야말로 전형적인 규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 가장 심한 것이 '형사법'이다. 형사법에서는 조금이라도 잘못이 큰 사람이 모든 책임을 지고 죄인이 된다. 기준에서 단지 2% 더 떨어진 것에 불과한 갑에게 100%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형사법이다. 겨우 2% 차이로 죄인이 된 갑으로서는 당연히 억울하고 그 결과에 쉽게 승복할 수 없다. 갑은 자신이 하지 않은 49%에 해당하는 불공정함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을은 그만큼의 이득을 보며 기쁨을 느낄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악한 희열에 불과하다. 그에게 돌아가는 이득과 희열이 공동체에는 부담이자 독소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칙을 적용한 형사법이 주된 분쟁 해결 방법이 된다면 공동체 전체가 느끼는 불공정성은 필연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p.323

사회가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검찰, 경찰, 국세청 같은 공권력 기관이 아니라 시민들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분쟁과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물론 대통령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는 우리나라 헌정 체제 상의 한계를 짚고 넘어가야겠지만, 그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최소한 시민 스스로 자신의 힘을 국가권력에 갖다 바치는 어리석음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 어리석은 행태를 가장 악화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고소인의 권한 확대이다. 늘어나는 고소를 당장 줄일 수 없다면 최소한 시민들 스스로 직접 분쟁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나가야 한다.


p.325

부도덕과 불법은 다르다. 모든 부도덕을 불법으로 만드는 사회는 결국 전체주의 국가나 신정국가로 전락할 수 있다. 다에시나 보코하람, 마녀사냥, 주홍글씨 모두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물론 성매매 남성의 부도덕까지 옹호하는 것은 아니니 벌컥 화를 내지는 마시라. 내 말은 '불법화는 보충적인 것으로 가장 마지막에 등장해야 하는 항생제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부도덕이라고 모두 소독하고 박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의 경우 그들을 정말 부도덕한 사람으로 봐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사실을 말하자면 몸을 파는 것보다 영혼을 파는 것이 더 부끄러운 것이다. 정말 성평등이 완화된 사회라면 성매매 여성들을 그렇게 부끄러운 존재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p.329~330

아무튼 금주법은 선의에서 시작되었다. 술이 사라지면 정치도 깨끗해지고, 폭력도 사라지고, 사회도 다시 도덕적으로 바뀔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미국을 정화시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금주법은 예상치 못한 불치병을 낳았다. 마피아가 창궐하게 된 것이다. 금주법이 시행되자 마피아들이 쓰나미처럼 미국 전역을 휩쓸었다. 원래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서 활동하던 마피아들은 1860년대에 기후가 비슷한 뉴올리언스로 이주한 뒤 매춘과 술집 운영으로 돈을 벌어 세력을 확장했다. 경찰서장을 살해하는 등 악명을 떨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던 마피아들은 금주법이 시행되자 미국 전역으로 퍼져갔다. 금주법이 쓸어버린 북부 대도시의 주류시장을 아무런 비용도 들이지 않고 장악한 것이다. 밀주사업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게 된 마피아들은 그 자금을 바탕으로 몸집을 불렸고 무서운 기세로 시카고, 뉴욕 등 대도시를 접수했다. 마피아가 북상함에 따라 마피아의 술집도 북상했고, 그에따라 재즈도 북부로 이동했다. 갱들의 천국 시카고에는 미시간 호를 건너 캐나다산 위스키들이 물밀듯 흘러들어왔다. '불법', '해적판'을 의미하는 '부트레그bootleg'라는 말도 부츠에 밀주를 넣고 다닌다고 하여 생긴 말이다.


금주법 시행으로 미국이 얻은 거라곤 마피아의 창궐로 인한 조직 간의 전쟁, 부패한 경찰, 마피아와 맞서 싸우는 경찰 조지프 페트로시노 같은 느와르의 소재 정도였다. 술보다 더 고약하고 치명적인 부작용이 생긴 것이다. 


p.342~344

정치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것은 팬덤에 기초한 무비판적인 공감 혹은 반감이다. 프로이트가 말하길 이 세상의 현상을 알고자 한다면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의 공감과 반감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두 극단적인 감정의 노예가 되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게다가 정치인들이 연출해낸 적대적인 상황은 '무관심도 적으로 간주'하는 문화와 '공격을 참여라고 생각'하는 돌림병을 낳았다. 적대적인 정치 환경은 무관심할 자유도 주지 않는다. 잘못된 정치에 동조하지 않고 거기에 소극적으로나마 저항할 자유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 때만 되면 투표로 세상을 바꾸고, 투표율이 높을수록 선진국이라는 말이 아무런 고려도 없이 주술처럼 떠돈다. 어떤 투표는 나쁜 투표라고 하면서 어떨 때는 국민의 의무라고 강변하는데, 그 차이를 도대체 모르겠다. 


OECD 주요 국가의 평균 투표율은 71.4% 정도이다. 우리나라는 56.9%로 OECD 전체 국가들 중 26위 정도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우 평균 투표율이 95%가량이다. 이 수치들만 놓고 보면 투표율이 높아야 선진국이라는 선동이 사실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다고 하는 스위스의 평균 투표율은 50%미만이다. 그리스(76%), 브라질(83.3%), 아르헨티나(70.9%) 등보다 훨씬 낮다. 하짐나 스위스가 그리스, 브라질, 아르헨티나보다 정치 후진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투표율이 높은 것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으면 벌금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벨기에, 룩셈부르크, 싱가포르, 터키의 투표율이 높은 것도 역시 투표에 불참하면 형사처벌을 하기 때문이다. 선진국일수록 정치에 관심이 없어 투표를 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형사처벌로 투표를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에서는 여권 및 운전면허증의 발급을 중지할 뿐 아니라 징역형을 선고하기도 한다. 결국 투표율과 정치 발전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


투표율이 낮으면 최악의 정상배가 집권할 것이라고 위협한다. 그럼 투표율이 높으면 최악의 정상배가 집권하지 않을까? 나치가 집권한 1933년 3월 바이마르 공화국 선거의 투표율은 71.6%로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투표율이었다. 1934년 히틀러가 총통이 된 독일 국민투표의 투표율은 95.7%였다. 푸틴이 권력을 사유화해가던 2011년 러시아 총선의 투표율은 140%가 넘었다. 러시아는 하이퍼-울트라 선진국인가 보다. 그런데도 투표율이 낮으면 나쁜 정치인이 득세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투표 거부도 분명히 정치적 의사표현이다. 오히려 몰리는 것이 위험하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무게 중심은 언제나 대중이 밀집해 있는 곳에서 발견되며, 그곳이 바로 상대를 궤멸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타격점이라고 말했다. 무게 중심에 몰리는 것이 썩 좋은 전략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왜 설사 최선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투표를 하자는 말이 나올까? 그것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가 하자 있는 상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뜻 구매하지 않으려고 하는 손님에게 차선이라도 선택해야 한다고 꼬이는 것이다. 그 결과 지지율의 함정이 발생한다. 실제보다 높은 지지 속에 당선되었다고 믿는 착시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그로 인해 국민의 대의가 자신을 선택한 것이라고 견강부회하면서 독점적인 권력행사를 당연하게 여긴다.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0) 2018.12.22
힐빌리의 노래  (0) 2018.04.19
유병재 농담집 - 블랙코미디  (0) 2018.02.20
개인주의자 선언  (0) 2018.02.07
느낌의 공동체  (0) 2017.08.0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