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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골든아워 2

by Diligejy 2019. 1. 7.



p.9

중증외상 환자들은 준종합병원에서 대학 병원으로 왔고, 대학병원에서 받아주지 못한 환자들은 밖으로 밀려 다시 준종합병원으로 갔다. 환자들은 늘 밀려오고 밀려갔다. 대학병원에서 떠밀린 환자들이 다시 준종합병원으로 향할 때, 일부는 간신히 적절한 치료를 받았으나 많은 경우는 죽음을 맞이했고, 숨을 잃은 자들은 영안실로 옮겨졌다. 그곳은 마지막 종착지였다. 더는 살아서 괴롭게 병원과 병원 사이를 떠돌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망자에게 위안일지 모르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울음은 애끓는 듯 슬펐다.


p.125~126

사회가 의사에게 기대하는 바는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의사가 방대한 의학지식을 갖춰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이 남의 생사에 깊숙이 관여하는 자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 기본을 다지기 위한 의과대학 시절의 교육 과정은 살인적이다. 학업의 양마저 주어진 시간 안에 마칠 수 있는 것이 아닌 탓에, 의과대학 시절은 한게에 부딪치고 깨질 수밖에 없다. 좌절과 실망을 기본 값으로 삼아 겸손해져야 하는 때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까지 늘 잘하는 축에 속했던 학생들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그 지옥을 건너며 많은 학생들이 방황하고 좌절하다 진급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한두 차례의 유급은 극복이 가능하지만, 낙오가 거듭되면 정신적으로 의대 학업을 지속하기 어렵다.


공부만 한다고 의사가 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졸업 전 수많은 개별 성적사정위원회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여기에서 유급과 진급이 가려지고, 최종적으로 의사 국가고시를 치를 자격이 부여된다. 성적사정위원회의 시험은 학생이 의사가 되어 합법적으로 환자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는지에 대해 확인하는 절차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의사가 된다고 해도 고작 다시 '출발선'에 서는 것 뿐이다.


의사가 되어 환자를 정확히 진찰하고 적절히 치료하는 실제 업무는 시험과는 다르다. 시험 문제 한두 개 틀린다고 유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의료 과정에서는 한 번의 실수가 한 사람의 생사를 가르고 그 주변 인생에도 영향을 미치며, 의사 본인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학생 시절에는 절대 알 수 없는 업의 무게다. 의사와 환자는 공동체적 운명을 가진 것과 같아서, 진단과 치료가 잘못되면 의사 역시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이런 개별적 증례가 쌓여 의사 개인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의사가 돼서도 공부와 연구를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이유다. 이 모든 것은 끊임없이 밀려오는 환자들을 받아내는 가운데서도 이루어져야만 한다. 어느 임상과든 의료현장은 전쟁터와 같고, 전장에서 버텨나가는 그 내공은 의과대학 시절부터 길러지므로, 의과대학 학생은 가혹한 학업 과정을 견디며 제 근간을 다져가야 한다.


p.127

나는 당장 오늘 밤조차 예상할 수 없다. 내일은 더 먼 이야기다. 그런 내게 '비전'이라는 단어는 현실적이지 않았다. 저런 정신세계로는 치열한 의료현장을 감당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김재근은 왜 학업을 지속해야 하는지, 왜 생각을 달리 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학생을 설득하고 있었다. 학생이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김재근의 말을 깊이 새겨야 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다 바뀔 정도로 각오를 새롭게 다지지 않으면 안 된다.


p.187

환자나 보호자에게 감사하다는 반응을 기대하면서 외상외과 의사 생활을 시작하는 순간 위기에 빠진다. 그저 먹고살려고 하는 일일 뿐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왔다.


p.199

내년이라. 내년이 오기는 올까.

긴 미래는 생각하지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생각을 해봤자 답은 없고 그만두어야 한다는 결론만 선명해졌으므로, 나는 생각하기를 멈췄다.


p.229~230

원거리든 근거리든 다른 대학 병원에서 지원 요청을 받아 환자를 데리고 오는 과정은 늘 힘겨웠다. 환자가 죽어가니 와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우리는 늘 비행해서 날아갔고, 환자를 받아 와서 수술했으나, 그러고 나면 늘 수많은 뒷말이 남았다. 아주대학교병원과 지척에 있는 대학 병원들도 필요하면 전원 요청을 보내면서도 우리가 헬리콥터를 이용해서 환자를 이송하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날아갔다. 심각한 상태의 환자들에게 이송 시간은 중요했다. 헬기장이 없으므로 때로는 길바닥에, 때로는 인근 관공서 구청 잔디밭이나 주차장에, 군부대 안 헬기장에 헬리콥터를 계류해두고 하염없이 환자를 기다렸다. 출동 요청을 받을 때 해당 병원과 시간 약속을 해두지만 환자는 10여 분 거리의 약속 장소로 제시간에 오지 않곤 했다.


p.232~233

- 내가 특별히 지시하기 전까지는 가지 말라고 했잖아!
- 환자가 진짜 좋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도 죽어서 왔습니다. 


최동환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그 마음을 알았으나 내게 번복의 여지는 없었다.


- 그건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야. 그 병원의 문제지. 너는 오는 환자나 잘 보면 돼.


최동환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나는 다시 그에게 강조했다.


- 정부, 병원, 그 병원 응급실의 누구도 우리보고 헬리콥터 타라고 한 적 없어. 네가 뭐 해서 월급받는지 알아?


곧바로 문종환과 권준식, 허요를 비롯한 스태프들을 사무실 옆 복도로 불러 모았다. 모인 얼굴들은 하나같이 피로에 절었고 침통했다. 나는 그들에게 속에 있던 말들을 쏟아부었다.


- 다음에 너희가 센터장 되면 하고 싶은 대로 해. 센터장이 되면 온갖 회의 자리에 들어갈 거고 그 더러운 말들을 다 듣게 될거야. 그걸 듣고도 너희 마음에 선한 의지가 남아 있으면 그렇게 하라고. 나는 우리가 하는 일을 쓰레기 취급하는 소리 듣고 사는 게 지겨워. 나 혼자 지겨우면 그만이지만 그 말들은 당신들 모두를 무시하는 거야. 그걸 몰라서 그래?


다들 고개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나는 이미 토해낸 말들이어서 멈추지 않았다.


- 밖에서 들리는 말은 내 선에서 끝내. 마음 상해하지 말고 일하는 데 위축되지 말라고. 하지 말라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다들 죽을 만큼 힘든 걸 뻔히 아는데 사기 떨어지고 이 일 하기 싫어질까 봐, 이탈할 것 같아서 웬만해서는 이런 이야기는 안 했어.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 건 그만큼 심각하다는 말이야. 내가 하는 이야기는 100가지 중 한 가지일 뿐이야. 그 한 가지는 나조차도 감당이 안 돼서 하는 거고. 나만 쓰레기 취급당하는 게 아니야. 여러분 명예와도 관련된 거라서 나는 숙이고 들어가면서까지 이 짓을 더 하고 싶지 않아.


복도에 정적만 흘렀다. 모두 말이 없었다.


p.256

한 지방자치 단체에서 1,800억 원을 들여 대규모의 안전체험 테마파크를 지어놨다. 하루 평균 입장객은 350여 명, 연간 적자 규모는 15여억 원이라고 했다. 1,800억 원이면 중증외상센터 전체건립비용을 상회하며, 소방항공대 두세 곳을 창설할 수 있는 금액일 것이다. 세월호와 중증외상에 대한 이슈가 불거진 이래로 안전과 외상을 테마로 수많은 것들이 벌어지고 있으나, 나는 그 핵심 가치를 알 수 없었다.


p.263

내가 외상외과라는, 한국에는 정착할 수 없어 보이는 기이한 일을 할 때마다 나와 연관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문제를 알고도 그만두지 못했고, 문제의 본질이 다른 곳에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은 내 권한 밖의 일이었으므로 나는 늘 진퇴양난 속이었다.


p.268

사실 의료비를 적절히 투입했을 때 가장 극적인 효과를 볼 수 있는 분야는 중증외상이다. 그것이 세계 의료계의 정설이지만, 한국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하긴 한국의 어떤 분야가 그렇게 세계적인 표준을 좇아가겠는가? 해외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몇몇 민간 기업을 제외하면 한국 사회의 그 어느 분야도 그렇게까지 세계 표준을 추구하지 않는다. 다들 제 살길 찾기에만 고도로 특화되어 있는 이 사회에서 나는 그동안 쓸데없는 짓을 해온 것만 같다.


p.275

시간이 흘러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새 정부는 공약대로 건강보험을 통한 보장성을 확대하겠다고 했다. 난 현재의 건강보험 재정상태로 얼마나 확대가 가능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한국의 병원들은 대부분의 선진국뿐 아니라 개발도상국가에 비해서도 의료 인력을 절반 이하 수준으로 고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까지는 대학 병원들이 젊은 의사, 간호사 및 의료기사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컨베이어 시스템처럼 고도로 효율화된 진료체계를 구축해서 간신히 수지를 맞췄지만, 최근 20년 동안 국민이 지향하는 삶의 자세는 획기적으로 변했다. 적절하게 휴식과 보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며, 어려운 일은 안 하면 그만이다.


p.281

대부분의 정당이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다고들 했다. 그들이 말하는 노동자에 외상센터에서 일하는 우리는 없었다. 한국 중증외상센터의 직원 고용 수준은 영미권의 3분의 1에 불과했고, 적은 인력이 과도한 업무를 감당하느라 과로로 쓰러져나갔다. 수술방의 모든 의료진이 감염의 위험을 감수하고 환자의 피를 뒤집어썼다. 전담간호사들이 다치거나 유산해 대열에서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이 현실은 무관심 속에 외면받고 있었다. 이곳의 노동자들은 무슨 이유로 희생을 기본 값으로 감수해야만 하는가. 거대 담론만이 존재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중증외상센터의 지속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p.292~293

국회의사당과 정부청사 안쪽의 사람들은 이런 우리의 현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아하게 회의를 하고 대책 방안을 마련해보겠다고 하고서는 사라져버린 사람들에게 우리는 쉽게 잊혔다. 세상에서 우리는 버려진 소모품에 불과한 것 같았다. 사실, 자기 눈앞에 시시각각으로 닥치는 일이 아니면 누가 진정성을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겠는가. 북한군이나 해외 망명자들의 인권에 대한 고민 가운데 100분의 1만큼이라도 피바다 속에서 환자와 함께 신음하는 의료진을 생각한다면, 정책이 이따위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잘 자는 사람들의 책상에서 결정되는 정책에 따라, 24시간 쉼 없이 일하는 사람들의 생사여탈이 결정되는 현실에 신물이 났다.


나는 그런 허망한, 시스템 아닌 시스템 속에서 최전선에 내몰려 있었다. 진작 종료했어야 하는 중증외상센터를 계속 끌고 오면서 어쩌다 정치적 이슈가 되는 환자들을 만났고, 그들이 치료되어 살아날 때마다 무지개처럼 제시되던 헛소리들을 믿어가며 너무 오래 버텨왔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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