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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by Diligejy 2019. 2. 8.

p.9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에서 자식은 부모의 기획에 따른 결과물이 아니라 긴 시간 수많은 관계와 사건을 통과하며 부모와 만나는 독립된 존재다. 현대 사회에서는 유전공학 기술의 발달로 일정 수준의 유전적 기획이 가능해졌다 해도 자녀는 수정란에서 태아 단계를 거쳐 세상에 나와 점차 하나의 고유한 인격을 형성하며 부모 앞에 '나타난다'. 출산과 동시에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점차 한 사람의 개인으로 성장하고, 확장되고, 여러 가지 경험을 축적하고 체화하면서 하나의 인격체로서 부모를 만나는 것이다. 부모 또한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 변화한다. 성숙일 수도 퇴보일 수도 있지만, 부모 역시 서서히 자녀와 '만나가는' 것임은 틀림없다.


p.63

품격을 강조하는 이들이 속물성의 그림자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비극일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내달리는 노골적인 속물이 나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품격주의자는 고상한 척 공연을 만들고 권력과 권위, 지위, 경제적 이익을 교묘하게 추구하는 기획자에 가깝다. 그에 반해 속물은 필요하다면 노골적으로 잔인하고 야한 연극을 만들어 경제적 이익을 좇는 기획자와 유사하다. 둘은 하나의 철학을 공유하면서 삶이라는 공연의 장르만을 달리한다.


p.83

누군가에게 연극적인 삶은 위선이겠지만 누군가는 연극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 가면을 쓰지 않은 얼굴은 너무나 투명해서 실제로 얼굴이 있는지도 알아볼 수 없다. 아무리 거울에 비추어 보아도, 즉 반성해도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얼굴이 없는 인간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나체로 죽겠다는 결정은 결국 자신의 죽음조차도 퍼포먼스로 만든다. 자신이 장애를 비관하여 죽는 게 아니라는 '진실'을 위해 연극적으로 죽어야 하는 삶. 이런 죽음은 정반대로 장애가 없는 '완벽한' 인간에게도 있다.


p.91

완벽할 정도로 발달한 성찰적 자아를 통해 자기 신체를 스스로 파괴하는, 연못에 빠져 익사할 때까지 일어나지 않고, 스스로 배를 가르는 고도의 성찰 능력이 보여주는 역설적인 타인 지향적 연극을 극복하는 힘. 떄로 무력하고 별 볼일 없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힘.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가진 것이 없다는 부정을 선언하는 힘. 거기서 우리는 타인 지향성을 넘어선 진정성의 한 형태를 본다.


p.115~116

유전자진단기술을 통해 장애아를 '걸러낼' 수 있는 사회는 해당 장애에 대한 의료, 사회복지 지출에 둔감해지기 쉽다. 그냥 '걸러내면' 될 것을 굳이 낳아서 치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기술을 사용하지 않은 개인은 사회에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죄책감은 타당할까? 위 프로그램의 의미를 소개하면서 연구자 황지성은 첨단기술을 활용할지 말지는 개인의 선택이라고 하지만, 그 기술을 사용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은 사회적 차별과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모순을 지적한다. 유전자진단이나 임신중절은 일정 범위 안에서는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다만 그 자유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장애아가 태어나면, 그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 결국 모든 기술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된다. 


p.118~119

당신과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혹은 '열등한' 혹은 '잘못된' 어떤 속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당신을 더 화나게 할지도 모른다. 나는 왜 하필 이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거지? 왜 나는 이렇게 키가 작지? 왜 내 지능은 좋지 않지? 왜 나는 아토피성 피부염이나 만성피로증후군을 타고난 거지?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싶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 '잘못된' 상태가 아니라면 우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p.139

우리가 무엇인가를 '수용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철저히 자발적인 선택을 의미한다. 믿음은 나의 의지에 따라 믿거나 믿지 않기가 대단히 어렵지만, 수용은 오로지 나의 의지에 달려있다. 물론 객관적인 증거가 있다면 좀 더 수월하게 수용할 수 있지만, 근거가 꼭 필요하지는 않다. 당신이 장애가 있는 아이를 진정 가치있고 반짝거리는 존재로 수용하고자 한다면, 그아이에게 다른 아이에게는 없는 천재적인 수학 능력이 있는가 혹은 예술가로서의 빛나는 재능이 보이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p.144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장애가 있는 몸, 미적 기준에서 벗어난다고 여겨지는 신체를 수용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혐오나 피해의식에 기초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이 세상이 구축해놓은 외모의 위계질서에 종속되지 않으며, 앞으로의 삶을 외모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 혹은 피억압자로서의 의식과 트라우마에 짓눌리지 않은 채 살아가겠다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입장)'를 수용한 것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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