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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외교학

결정의 본질

by Diligejy 2022.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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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oupa.ng/bKMbAA

 

결정의 본질

COUPANG

www.coupang.com

 

p.5

결정의 궁극적인 본질은 제3자가 이해할 수 없다. 사실, 결정하는 사람 자신도 모를 때가 많다. 의사결정 과정에는 가장 깊이 관여한 사람조차  알 수 없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부분이 항상 있기 마련이다.

 

- 존 F. 케네디

 

나는 공직에 참여하지 않고 역사를 기록하는 지식인과, 생각하지도 않고 중대한 결정에 참여하는 정치인을 만난 적이 있다. 전자는 항상 일반적인 원인을 찾는 경향이 있는 반면, 후자는 일관성이 없는 일상을 살면서 모든 것이 특정 사건 탓이고 자신이 잡아당기는 밧줄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둘 다 세상을 제대로 모르는 것 같다.

 

- 알렉시 드 토크빌

 

p.15

쿠바 미사일 위기는 핵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적은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에 엄청난 틈이 있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p.22

질문에 대한 더 좋은 답을 얻는 진짜 비결은, 분석을 할 때 분석자가 아마추어든 전문가든 상관없이 어떤 틀을 사용하는지 더 잘 인식하는 것이다.

 

p.45

주의할 점이 있다. 분석자가 합리적 행동이론에 따라 행위자의 마음속에 들어가 속셈을 밝혀내고 행동을 설명한다고 하지만, 설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결코 합리성의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진정한 설명력은 행위자의 목적과 상황 판단 및 득실계산에 관한 가정과 증거에서 나온다.

 

p.71

전략적 행위란 상대로 하여금 나의 행동이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향할 것이라고 예상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결국 상대의 행동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행위다.

 

p.73

1961년 서베를린을 둘러싼 위기가 고조되자, 셸링은 자신의 이론을 실제로 적용해 케네디 대통령에게 한 편의 짤막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당시 작전 개념은 소련군이 서베를린으로 진격하면 일단 재래식 전력으로 방어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당 지역의 전력 균형상 그런 작전이 실패하리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다음 수순은 소련군 및 보급선에 대한 대규모 핵공격이었다. 다만 소련에 대한 직접적 공격은 회피하도록 되어있었다. 셸링은 이런 작전 계획에 반하는 주장을 펼쳤다. 셸링은 대통령이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이는 "소련 지도부로 하여금 전면적 핵 전쟁의 위험을 깨닫도록 사용해야 한다... 즉, 전술적 표적이 아닌 소련 지휘부의 심리를 표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p.95

역사상 1962년 10월의 마지막 2주처럼 핵전쟁 가능성이 높았던 적은 없다. 따라서 국제정치를 진지하게 공부하는 모든 이들은 쿠바 미사일 위기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두 초강대국이 어떻게 핵전쟁의 벼랑 끝으로 갔고,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발길을 되돌릴 수 있었는지 이해하려면 세 가지 핵심적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첫째, 소련은 왜 쿠바에 공격용 미사일을 배치했나?

둘째, 미국은 왜 쿠바 봉쇄로 대응했나?

셋째, 소련은 왜 미사일을 철수하기로 결정했나?

 

p.106~108

쿠바 방위를 위해 미사일을 배치했다는 가설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허점도 많다.

 

첫째, 미국의 쿠바 침공 억지가 목적이라면 '왜 굳이 탄도 미사일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탄도 미사일은 미국의 비밀공작을 억지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전면 침공을 억지하기 위한 무기다. 전면 침공을 억지하기 위해서는 굳이 탄도미사일이 아닌, 더 나은 대안이 있었다. 예컨대 약간의 지상군만 파견해도 서베를린의 미군처럼 전면 침공 억지라는 목적을 손쉽고 완벽하게 달성할 수 있었다.

 

둘째, 쿠바 방위를 위해서라면 굳이 병력을 파견할 필요 없이 공개적으로 방위조약을 체결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소련 국방부 장관 로디온 말리놉스키와 쿠바의 체 게바라 사이에 조약 초안이 합의되어 1962년 11월 흐루쇼프의 쿠바 방문을 기해 대대적인 조인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그때 완성될 미사일 기지도 함께 공개될 예정이었다. 조인식은 결국 열리지 않았다. 1962년 8월 말 방위조약을 마무리지으려고 모스크바를 방문한 체 게바라와 쿠바의 고위 간부 에밀리오 아라고네스는 흐루쇼프에게 더 이상 미사일을 감추지 말고, 조약 추진 사실도 공개하자고 제안했다. 조약만으로도 미국의 공격 의도를 억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 일행은 조약으로 (터키처럼) 미국이 동맹국에 핵무기를 배치한 상황과 같은 논리로 쿠바 내 소련 기지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을 터였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거부했다. 

 

셋째, 핵무기 문제다. 소련이 어떤 이유로든 핵억지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 (사정거리 100마일 안쪽인) 전술핵무기면 충분했다. 전술핵무기는 훨씬 빨리, 값싼 비용으로, 몰래 배치할 수 있었다. 실제로 흐루쇼프는 그 점에 착안해서 전술핵무기를 쿠바에 서둘러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시점은 케네디의 공개적인 경고로 미국의 쿠바 침공에 대한 실질적 우려가 다시 제기됐던 1962년 9월이다.

 

넷째, 설사 어떤 특정한 이유로 전략핵미사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더라도 사거리 1100마일의 MRBM(중거리 탄도 미사일)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굳이 더 비싸고, 커서 발각될 위험도 큰 사거리 2200마일의 IRBM(중장거리 탄도 미사일)을 배치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또 쿠바에 SLBM(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을 탑재한 잠수함용 기지를 건설하는 일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섯째, 무엇보다 중요하게도 소련이 내린 일련의 결정 순서가 쿠바 방위설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련 정부는 진작부터 미국의 위협이 매우 심각하다고 판단했고, 그에 따라 신중한 검토 과정을 거쳐 4월 12일 지대공 미사일과 크루즈 미사일, 지상군 1개 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조치가 쿠바 방어를 위한 소련의 대응이었다. 한 달도 더 지난 5월 21일과 24일 흐루쇼프는 갑자기 회의를 소집해 핵무기로 무장한 대규모의 소련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4~5월에 미국이 카리브해 지역에서 실시한 군사훈련이 계기가 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진작부터 예정, 예고된 훈련이었다. 그 훈련이 모스크바의 관련 담당자들의 주목을 끌었다는 증거가 없고, 쿠바가 소련 정부의 4월 12일 결정을 재고해달라고 요청한 증거도 없다. 쿠바에 파견된 소련 군사고문단이 5월 18일 해안 방어용 미사일과 병력을 추가로 지원해달라는 (매우 조심스러운) 요청을 쿠바로부터 받기는 했다. 그러나 카스트로든 소련 대표단이든 핵무기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p.131~132

케네디가 볼 때 흐루쇼프의 행동은 베를린에서의 승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납득이 되었다. 미국이 가만히 있으면 소련은 미군을 비롯한 NATO군을 서베를린에서 강제로 몰아낼 참이었다. 그때 예상되는 미국의 강수를 쿠바 미사일이 억지하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미국이 협상에 나서면 쿠바와 서베를린을 맞교환하자고 할 터였다. 서베를린이 쿠바에 비해 훨씬 더 중요했으므로 이는 곧 흐루쇼프의 승리를 의미했다. 미국이 쿠바를 봉쇄하거나 공격하면 소련은 서베를린 봉쇄나 공격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케네디가 말했다.

 

"우리가 쿠바에서 뭘 하든 흐루쇼프에게 서베를린에서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겁니다!"

더 나쁜 것은, 서베를린을 잃으면 그 내막을 알 리 없는 미국의 동맹국들이 미국을 비난하고 적전분열을 일으켜 결국 소련만 최후의 승자가 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케네디가 볼 때 문제는 쿠바 때문에 핵전쟁 위협을 감수하느냐 마느냐가 아니었다. 쿠바 문제로 지금 핵전쟁을 감수하느냐, 아니면 서베를린 문제로 다음 달에 핵전쟁을 감수하느냐였다. 앞의 경우라면 핵전쟁의 책임은 흐루쇼프가 져야겠지만, 뒤의 경우라면 미국의 전략적 상황이 훨씬 나빠지고 핵전쟁 책임이 케네디에게 돌아갈 터였다. 이 문제가 10월 19일 합참에 제시했던 케네디가 처한 딜레마의 핵심이었다. 

 

p.165

흐루쇼프의 마음을 바꾼 것은 봉쇄가 아니었다. 이미 논의했다는 이유로 일단 배제했던 공습, 침공과 같은 추가적 행동 위협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소련의 후퇴를 유도하지 못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이미 배치된 미사일을 철수하도록 할 수 없었을 터였다.

 

p.179

중요한 것은 조직 자체가 조직의 목적을 해석하는 정치적 과정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조직은 여러 목적 중에서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고, 그럼으로써 '임무'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특히 그 임무는 구체적 과제에 적용되는 운영적 차원에서 목표를 결정할 때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정치적, 운영적 맥락에서 조직은 운영 목표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능력 확보에 주력한다.

 

p.180~181

조직은 불확실한 미래를 추측하고 그에 따라 행동을 하는 것을 매우 꺼려한다. 그래서 단기적 피드백을 중시하는 선택 절차를 개발해왔다. 실내 온도 자동조절 장치처럼 조직은 미리 설정된 기준에서 벗어나는 일을 그때그때 바로잡는 교정기제를 따르지, 한 달 후 기상예보에 의거해 일을 처리하지는 않는다. 이런 단기적 교정기제는 조직의 다양한 운영 환경에 맞춰 다양하게 존재한다. 

 

마치와 사이먼에 따르면, "프로그램에 따라 이루어지는 어떤 조직의 활동 패턴은 한마디로 다양한 프로그램들의 복잡한 모자이크라고 할 수 있다. 각 프로그램은 나름대로의 운영절차에 따라 작동한다." 바로 이런 프로그램이 거의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효율적 선택의 범위를 규정한다.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완전히 새로운 프로그램을 짜는 일은 거의 없다. 아니, 아예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는 기존의 하위 프로그램을 새로 조합하여 적응할 따름이다." 프로그램을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 말하자면 일종의 전문지식을 개발함으로써 조직 문화가 생성된다.

 

미리 마련된 프로그램과 경직된 일상 절차는 많은 비난을 받지만, 프로그램과 절차가 없으면 조직은 돌아가지 않는다. 조직을 운영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사항이다. 고든 체이스가 [휴먼 서비스 프로그램의 실행]이라는 에세이에서 이 점을 잘 묘사하고 있다. 미리 수집된 일상적 절차란 조직 안에 존재하는 기술적 맥락과 외부의 사회적 맥락 사이에서 이루어진 일종의 타협이다. 그것응로 조직 운영자들의 관할 범위가 결정되고, 한정된 관할 내에서 자유와 자율이 보장된다. 문제는 규칙이 아니라 규칙이 깔고 있는 전제 혹은 규칙이 포함된 체계다.

 

p.184

미국 국방부 건물에는 벽에 그림과 사진이 많이 걸려있다. 이 그림과 사진은 과거 국방부와 관련된 사건을 담고 있는데, 그 중 일부는 국방부의 일상적 활동을 보여주지만, 다른 일부는 역사적 사건을 보여준다. 모두 일종의 중대한 결정을 담고 있다. 바로 그런 결정이 오늘날 미국 국방부의 정체성의 상징인 동시에 미래의 활동을 규정하는 규칙이다. 조직에 있어 의사결정이란 "다른 일에 대한 일종의 계기로 작용한다. 즉 표준운영절차를 작동시키고, 역할에 대한 기대, 의무 혹은 이전의 약속을 수행한 계기, 옳고 바른 것을 결정하는 계기, 그로써 조직의 역사를 재발견하거나 재해석하게 되는 계기, 영광 또는 치욕의 계기, 스스로와 집단의 이익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 좋은 시절의 계기가 된다."

 

p.188

엘리자베스 키어의 책 [전쟁을 상상한다 Imagining War]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영국과 프랑스가 공격 위주가 아닌 방어 위주의 군사교리를 채택하게 된 이유를 따진다. 키어는 한편으로는 군의 조직문화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정치적 논쟁과 합의의 와중에서 조직에 생겨나는 자율성의 공간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조직의 자체적 적응을 강조한다. "서로 다른 나라의 집단이 처한 상황이 비슷하다고 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도 같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즉, 모든 군이 항상 공격 위주의 군사교리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군 안에서도 각 군별로, 예컨대 공군과 육군의 교리가 매우 다를 수 있고, 같은 군 안이라도 부대별로 역량과 편제에 따라 큰 차이가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요컨대 "군사교리에 대한 선호는 군대 조직의 기능적 필요에서 논리적으로 추론해낼 수는 없다." 달리 말하면 조직의 기능적 필요는 객관적 현실, 정치적 맥락, 조직의 지도부가 자신과 자신들의 과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념 등이 복합적으로 빚어내는 것이다.

 

p.190~191

분석자와 관리자, 정치 지도자는 조직의 본질이 문제를 특정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정책 관리에 성공하려면 지도자는 자신의 목적과 조직의 경향이 지닌 무게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p.199

조직의 산출물로서 정부의 행동이 분석의 단위가 되면 정부의 선택과 행동을 분석하는 초점도 달라진다. 정부의 공식적 선택을 분석할 경우 그 초점은 조직이 제공하는 정보, 조직이 규정하는 방안, 현존하는 조직적 역량, 장기판에서 말의 위치를 정하고 전체적인 판세를 형성하는 조직의 산출물에 있다. 정부의 실제 행동을 분석하려면 조직의 역량과 장기판에서의 위치, 나아가 개별 조직들이 실행할 수 있는 산출물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p.209-210

특정 시점에서 정부 정책을 전환하기 위해 지도자가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다.

(1) 할 수 있는 실행 목록 내에서 B 프로그램이 아니라 A 프로그램을 작동시키기로 결정한다.

(2) 기존 프로그램을 새로운 맥락에 적용한다
(3) 다른 조직의 프로그램 몇 개를 동시에 작동시킨다.

 

한 조직의 내부 부서 간에 경쟁을 부추기거나, 전략적 문제를 예산 문제로, 혹은 예산 문제를 전략적 문제로 포장함으로써 추가적 지배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또 장기적으로 지도자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 수도 있다. 종종 지도자들은 기존의 조직적 경향을 뒷받침하는 요소를 조작함으로써 조직 내부의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처럼 선택지가 다양하지만 지도자의 개입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조직이 제공하는 정보, 조직이 프로그램에 의해 얻는 평가와 대안 속에서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p.213-214

문제는 상충하는 목표들이 조직의 역량과 문화에 비춰 모두 중요한 경우다. 이 문제는 순차적 대응이라는 방식으로 해소한다. 즉, 먼저 일어난 일에 집중하는 한편 다른 일은 뒤로 미루거나 당분간 무시하는 것이다.

 

하와이에 주둔하던 미 해군의 항공대는 두 가지 임무를 띠고 있었다. 
(1) 태평양 중앙의 일본령 섬, 특히 마셜군도를 공격하기 위한 조종사 훈련과, 

(2) 적군의 활동을 감시하기 위한 장거리 정찰 비행. 

 

당시 보유한 항공기 규모로는 두 가지를 모두 수행할 수 없었다. 고심 끝에 해군은 첫 번째 임무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영토에 대한 공격 준비라는) 우선적 임무에 한정된 자원을 집중하기 위해 항공기들은 금요일이 되면 기지로 돌아와 주말에 정비를 받았다. 일부 항공기만이라도 12월 7일 일요일 정찰 활동을 했더라면 일본군의 기습을 적어도 한 시간 전에는 알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함대 차원의 전투 계획에 집중하느라 정찰이라는 또 다른 임무는 소홀히 했다.

 

p.216

실무 차원의 실행 가능성과 관련해 지도자들은 다음을 명심해야 한다.

(1) 조직은 쉽게 다룰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2) 조직이 이미 가지고 있는 프로그램이 아닌 새로운 과업을 수행할 경우 기대하는 결과를 얻기가 거의 어렵다.

(3) 여러 조직을 동시에 동원함으로써 각 조직의 프로그램 간의 조정이 필요한 프로젝트는 거의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다

(4) 여러 조직의 프로그램을 동시에 가동할 경우 개별 조직의 절차 사이에 상호작용이 일어나 예상치 못한, 때로는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5) 기존 조직의 목표에 배치되는 과제를 할당할 경우 저항이 일어난다
(6) 적어도 각 조직이 가진 노하우에 따라 "자기 몫"을 할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다.

(7) 각 조직이 조직의 문제점에 대해 제공하는 정보는 지도자의 입장에서 볼 때 대개 불완전하고, 심지어 왜곡되어있다.

 

p.218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군사 계획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었다. 1941년 1우러 해군의 전쟁기획국은 진주만 방어 계획에 관한 탁월한 요약 보고서를 준비해 해군부 장관과 해군참모총장의 결재를 받아 배포했다. 해당 보고서는 공습 위험을 정밀히 묘사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놓았다. 

 

"함대가 궤멸적 타격을 당할 가능성으로 인해...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육군과 해군이 합동으로 앞서 어너급한 공습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 태세를 갖추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음"

 

그러고는 구체적으로 다섯 가지 건의안을 제시했으나, 단 한 가지만 제대로 이행됐다. 바로 "보다 철저한 계획이 필요하다"는 부분이었다. 1941년 3월 하와이의 육해군 사령부의 고위 장교들이 하와이 방어 계획에 대한 탁월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보고서를 준비했다. 워싱턴도 해당 보고서를 극찬했다. 그러나 보고서 내용을 이행하려면 꼭 있어야 하는 정찰기가 하와이에 없었다. 9개월이 지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해당 계획이 여전히 유효했을지라도 말이다. 

 

p.218-219

대부분의 조직은 조직의 '건강'을 핵심적 목표로 삼는다. 여기서 건강이란 조직의 '독자성, 자율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조직은 예산과 인력과 업무 영역의 확대를 추구한다. 업무 영역 간의 경계가 모호하거나 유동적인 경우, 또는 매력저거인 새로운 업무 영역이 나타나면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진다.

 

암호 해독 기술의 혁명적 발전으로 일본의 외교 전문을 감청 해독할 수 있게 되자, 해군의 각 부서는 "새롭게 획득한 메시지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골몰하는 대신 "적의 의도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업무를 누가 맡을 것인가"를 놓고 다투었다. 해군 정보실과 전쟁기획국이 경쟁자였다. 막강한 실력자라서 다들 다투기를 꺼려하던 인물이 국장으로 있던 전쟁기획국이 "모든 정보 출처에서 입수되는, 모든 가능한 적성국 관련 정보 전체를 해석하고 평가할" 권한을 차지했다. 그러나 전쟁기획국에는 일본어에 정통한 사람도, 일본 전문가도 없었다.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 결코 좋은 결과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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