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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국소설

산 자들

by Diligejy 2021. 7. 27.

https://coupa.ng/b4epEJ

 

산 자들 / 민음사

COUPANG

www.coupang.com

p.40

"그건 자기도 몰랐잖아."

"뭘?"

"걔 불쌍하다고, 잘 봐주려고 했었잖아. 가난하고 머리가 나빠 보이니까 착하고 약한 피해자일 거라고 생각하고 얕잡아 봤던 거지.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거든. 걔도 알바를 열몇 개나 했다며. 그 바닥에서 어떻게 싸우고 버텨야 하는지, 걔도 나름대로 경륜이 있고 요령이 있는 거지. 어떻게 보면 그런 바닥에서는 우리가 더 약자야. 자기나 나나, 월급 떼먹는 주유소 사장님이랑 멱살잡이해 본 적 없잖아?"

 

p.67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이었을까? 본사가 티앤티와 영업양수도계약을 체결한 순간 그들에게는 티앤티에서 모욕을 당하든지 본사에 남아 모멸을 겪든지 이 두 가지 시나리오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경영기획실장이 아무리 기분 나쁜 태도로 그들을 대했어도 군소리 없이 지시에 따라야 했던 걸까? 회사의 경영은 경영진이 결정하는 것이고, 그들이 어떤 신분으로 일하는지도 경영에 대한 사항이니까?

 

자회사로 가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왜'라는 의문을 품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까? 그들은 이리 와서 일하라고 하면 이리 와서 일하고, 저리 가서 일하라고 하면 저리가서 일해야 하는 잡부나 다름없는 처지였던 걸까. 그런 주제에 자신들이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자부심을 느끼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스스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착각했던 걸까.

 

p.149

"제가 보니까 답이 없더라고요, 이건. 손바닥만 한 아파트 단지 주민들 노리고 이 골목에 너도 나도 들어와서 건물주들이랑 간판업자들 배만 불려 주다가 열에 아홉은 만신창이가 돼서 나가는 거에요. 밤에 몇 시까지 문을 열어 놓는다고 크게 달라질 게 없어요."

 

"그 열에 아홉이 아니라 남은 하나가 되어 보겠다고 이렇게 애를 쓰는 거 아닌가요?"

"그게 정말 우리 손에 달린 일 맞아요? 전 잘 모르겠어요. 이건 저희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의 문제가 아닌 거 같아요. 저희 집이나 이 집이나 장사 잘되면 어떻게 될 거 같으세요? 그러면 여기 장사 잘되는 곳이구나, 하고 옆에 빵집 또 생겨요. 틀림없어요. 저는 가게 망할지 안 망할지는 그냥 다 운인 거 같고요. 가게 문을 몇 시에 닫느냐, 그래서 하루에 몇 시간을 자느냐, 이건 저희가 정할 수 있는 문제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p.164

재개발은 재건축과 달리 공익성이 있기 때문에 세 들어 사는 사람도 보호해 주는 거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공익성도 없는 남의 돈벌이 때문에 쫓겨난단 말인가요? 어차피 쫓겨나는 건 똑같은데 공익성도 없이 쫓겨나는 억울한 사람에게 돈을 더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p.171

돈암동 현장은 3층짜리 상가 건물이었다. 지난해 건물주가 바뀌었다. 새 건물주가 건물을 사자마자 재건축을 한다며, 입주한 가게 상인들에게 두 달 안에 나가라고 요구했다. 많게는 수억 원씩 권리금을 내고 상가에 입주한 상인들이 순순히 나갈 리 없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건물주가 마지못해 보상금을 제시했다. 그 돈을 받고 떠난 이들도 있었지만 상당수 가게 주인들은 남았다. 건물주도 다급하긴 마찬가지였다. 은행에서 거액을 빌려 상가를 사들였고, 재건축을 해서 월세를 높인 뒤 그 임대 수입으로 대출을 갚을 계획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체되면 전 재산을 은행에 뺏길 참이었다.

 

p.314

강연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내용이 아님을 뒤늦게 깨달았다. 사람들은 콘텐츠가 아니라 아우라를 원한다. TV에 나오는 유명인을 직접 만난다는 경험은 콘텐츠보다 더 큰 주관적 효용을 주며, 공급량이 적고, 복사나 전송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책보다 강연에 더 큰 금액을 지불하는 것 역시 경제적으로 완벽하게 합리적인 소비였다.

 

p.323

찢어진 운동화를 신고 낡은 기타를 들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그는 생각했다. 이미 세계의 질서가 정해졌는데 거기에 맞서는 기획이 얼마나 가망이 있을까. 질서는 시스템이고 기획은 이벤트다. 이벤트는 시스템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성 평등 운동, 소수자 인권 우동, 환경 운동, 동물권 운동, 그런 기획들은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거대한 질서가 새로 생길 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변화를 잘 타고 미끄러지는 것 정도가 아닐까?

 

p.326~327

음악의 가격이 10년 사이에 100배, 어쩌면 175만 배 싸진 것은 받아들이겠습니다. 상품의 가격은 판매자의 노동이 아니라 구매자의 주관적 효용과 공급량, 보완재와 대체재의 가격에 달려 있다고 하니까요. 저는 다른 게 이해가 안 갑니다. 음악이 그렇게 싸져서 모든 사람이 거의 공짜로 음악을 즐기게 됐는데 사람들이 음악으로부터 얻는 효용은 얼마나 늘어났나요?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그 10년 사이에 175만 배나 100배, 아니 열 배라도 더 행복해졌나요? 오히려 반대 아닌가요? 사람들은 이제 음악을 공기처럼, 심지어 어떤 때는 공해처럼 받아들입니다.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캐럴이 듣기 싫어 괴롭다고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잔잔한 음악을 엘리베이터 뮤직이라며 조롱합니다. 음악은 이제 침묵보다도 더 값싼 것이 되었습니다.

 

p.335

네가 어른이 되면 의사도 변호사도 다 스트리밍 서비스에 밀려날지 몰라. 인공지능 로펌이 월 8800원에 무제한 법률 상담을 해 줄지도 모르지. 한 달에 2만 9900원을 내면 정수기처럼 로봇 의사를 집에 설치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때는 모든 것의 가격이 같아질 거야. 법무, 의학, 투자, 분석, 관리, 강연, 방송, 교육, 소설, 청소, 운전, 모든 게 . 유사 연애조차도. 개개인의 취향을 파악한 맞춤형 월정액 가상현실 소프트웨어에게 아이돌들이 자리를 내줘야 할 테니까.

 

그리고 그건 그리 나쁜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 모든 재화와 용역에 무제한 스트리밍으로 접근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사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시스템을 다시 세울 수 있을 테니까. 공급량, 보완재, 대체재를 넘어서.

 

그러면 좋은 음악은, 다시 소중해질지도 몰라.

 

p.379

공감 없는 이해는 자주 잔인해지고, 이해가 결여된 공감은 종종 공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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