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한국소설

해피 붓다

by Diligejy 2021. 12. 22.

https://coupa.ng/cbmCwP

 

해피 붓다

COUPANG

www.coupang.com

 

p.26~27

만약 지금의 우리가 당시의 독일 상황인데 히틀러 같은 괴물이 나타났다면 나치에 환호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보통의 경우 악마는 환란과 절망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강림하니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어두운 마음이 보고 싶어 하는 딱 그 거울인 것이다. 히틀러가 어디 먼 데 있는 게 아니다. 책이 얼마나 무서운 물건인지 모르는 사람은 혁명 같은 것을 논할 자격이 없다. 글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p.37~38

잽을 계속해서 허용하면 골리앗도 결국 맛이 가게 돼 있다. 스트레이트, 어퍼컷, 훅보다 무서운 게 잽이다. 가랑비가 댐을 무너뜨린다. 휘파람이 성을 무너뜨린다. 그의 가랑비와 그의 휘파람은 너의 가랑비와 너의 휘파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미 얕보지 마라. 못하는 일이 없으시다. 개미가 하나님이다. 오른손잡이의 오른손 공격보다 무서운 게 오른손잡이의 왼손 공격이다. 오른손잡이가 오른손에 부상을 입어 억지로 왼손을 많이 썼는데 의외로 쉽게 이기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은 그래서이다. 무력은 화력의 총량도 중요하지만, 화력의 밸런스에 의해 견고해지고 극대화된다. 권투는 두 주먹보다는 오히려 두 다리의 투기다. 먼지는 파괴되지 않고 떠다니다 아무데서나 먼지로서 건재할 뿐, 진흙으로 빚어진 몸이라야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니, 부디 먼지를 사랑하라. 무거운 것이 하늘에 냉정하게 떠 있어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힘이 된다. 기본이 수단을 등에 태우고 이동하면서 가격할 때야 비로소 의미 있는 폭발이 점화된다. 처음에는 정칙을 배워라. 그 정칙을 무한 반복해 형식이 감각으로 무르익으면 어느덧 그 정칙은 어떤 변칙으로 진화하고 그 변칙은 아까 그 정칙을 이기는 또 다른 정칙이 된다. 세상 모든 강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무적의 권투는 변화, 곧 역이다.

 

p.53

인간이 좌초되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바라보며 살아갈 필요가 있는데, 그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자신을 제 인생이라는 연극의 배우로 설정하고 감각하면서 하루하루 매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실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매우 옳은 행동이다. 이러면 인간은 자신 안에 갇히지 않으면서 제 삶을 즐길 수 있다. 반면 자신 안에 갇혀버린 사람은 온갖 고통 속에 허우적거리거나, 죽게 된다. 인생은 자신 안에 갇혀 사형수로 살 만큼 대단한 의미가 있지 않다. 이것은 우울하게 확 죽어버리기 위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그 어떤 경우에도, 제 삶을 끝까지 나름 보람 있게 공연한 뒤 사라지기 위한 지혜다. 정교한 허무주의는 아름답다.

 

p.54~55

내가 늘 술자리에서 하는 얘기지만, 인간에게는 자기애를 가르쳐야 한다. 이기적이라야 이념에 조종당하는 '사탄의 인형'이 되지 않을 수 있는 법이다.

 

본시 나는 타인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 절대 안 믿는다. 자신의 자유를 바탕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만 믿는다. 두고 보면 결국, 전자는 애초부터 아니었거나 변질되고, 후자가 정말로 타인을 (가능한만큼 최대한) 자신처럼 대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 어떤 좋은 동기에서 비롯된 사상일지라도 지옥을 실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실현자의 대부분은 위선자를 거쳐 멀쩡한 광인에 다다른다. 악보다 더 악한 게 위선이다. 위악의 전문가인 나는 한낱 귀염둥이인가? 자유인으로 살아가려면 그 하나를 지키기 위해 남들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하고 또 자신과의 몇 가지 중요한 약속들을 엄수해야 한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그는 자신이 상상할 수 없었던 최악의 노예가 되고 만다. 무식한 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은 진실과 진리를 말해주면 화를 낸다는 것이다. 자신의 소박한 노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과는 상종을 하지 마라. 그는 자신을 확인시키려고 분란과 분쟁을 일삼을 테니.

 

p.58

슈퍼맨은 왜 이 사회를 지키기만 하고 이 사회의 불의와 모순을 혁명하지는 않는가?

 

p.88

토마스 홉스가 당대에 무시당한 많은 이유들 중에는 공화파가 아니라 왕당파였다는 점 말고도 무신론자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가 신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데에는 분명 아버지에 대한 불신 탓이 컸으리라는 게 정설이다. 홉스는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전쟁을 치르던 시기를 온통 살아내야 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일상다반사였으며 말보다 주먹이 앞섰다. 힘이 곧 정의였던 시대에서 홉스는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지 않고 자연상태에 놓였을 경우 어떻게 될지 철학적 상상을 해보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거대한 힘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 불 보듯 뻔해 보였다. 이것이 바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탄생인 것이다. 그에게 국가는 그러한 비극을 해체하는 유일한 사회계약이자 괴물이었던 것이다.

 

p.95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밤하늘의 별이 반짝였다. 별은 왜 반짝일까.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위로 맞은편을 바라보면, 경치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뜨거워진 공기가 움직이며 빛을 흩어놓기 때문이다. 별이 반짝이는 것도 이와 같다. 별들이 있는 높은 곳의 기류는 빛과 함께 항상 흔들린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흔들리는 인간만이 높이 솟아 반짝이는 별처럼 아름답다.

 

p.115~116

해야할 일을 모를 때 우리는 방황한다.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타락한다. 해야할 일이 벽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강해진다. 그 벽을 무너뜨리고 전진했을 때 우리는 깨닫는다. 해야할 일을 다했을 때 우리는 감사하며 침잠한다. 이제 더 해야할 일이 무엇일까 궁리할 때 우리는 조용히 기쁘다.

 

p.141

인간들은 의식주 외에도 이념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 이념들 중에 생명력이 있는 이념들이란, 사실은 이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종교'라고 해야 맞다. 핵전쟁도 사실은, 전쟁학의 소관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왜냐, 아직은 아무도, 어느 나라와 어느 나라도 핵전쟁을 실제로 경험하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휴거처럼.

 

p.143~146

너무 많은 것들을 인간과 그 사회에 기대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거짓과 위선에 물들어 지친 끝에 삶의 감동을 잃게 될 것이다. 이승은 모순과 허위로 가득 차 있다. 상처받을 일이 아니다. 그게 영원한 일상다반사인 것이다. 김종필은 모든 면에서 박정희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점에서 박정희와는 상대가 안 됐다. '모순성' 박정희의 어마어마한 에너지는 바로 그 모순성에서 튀어나왔다. 그러자 허위는 모순이라는 어미 캥거루의 주머니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그 캥거루는 초원을 통통 튀어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구텐베르크는 면죄부와 성경 때문에 명성을 쌓았다. 살아서는 면죄부를 다량으로 찍어서 구교로부터 총애를 받았고 죽어서는 성경 인쇄의 대중화로 인해 신교의 영웅이 되었다. 청년 간디는 힘의 논리를 앞세웠다. 그는 폭력 사용을 적극 지지했다. 힌두교도들의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잔혹한 보복을 주장했다. 농업 노동자들의 부당한 고통을 유감으로 여겼으면서도 토지개혁은 지지하지 않았다. 낮은 임금에 개탄했지만 산업 재분배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안도 하지 않았다. 간디는 현대 의학을 혐오했다. 그의 아내가 폐렴에 걸렸을 적에 영국인 의사들이 그녀에게 페니실린 주사를 놓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아내는 죽었다. 그러나 간디는 자신에게는 너무도 관대했다. 그때 그는 그토록 혐오했던 영국인 의사에게 자신의 치료를 부탁하면서 말라리아 특효약인 키니네를 투약하도록 허락했다. 또한 장염에 걸리자, 영국인 의사에게 수술까지 받았다. 진짜진짜 대박인 것은, 아내와는 어느 시기부터 아예 성관계를 안 했던 간디가 성적 욕망을 억제하는 스스로를 시험하기 위해 밤에 젊은 여성을 옆에 재웠다는 점이다. 어린 여성이 그 괴팍한 늙은이의 금욕주의 실험대상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미친 것 아닌가? 그는 인도의 최하층 계급 인민들에 대한 박해를 비난했지만 카스트 제도는 수용했다. 간디의 도덕관은 인도 대륙의 도덕관을 극복하지 못했다. 나중에 그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하나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기는 했다. 하지만 정작 자기 아들이 이슬람 여성과 결혼하겠다는 것을 한사코 반대해 종교간 화해를 기원했던 많은 이들을 실망시켰다. "나는 어떤 방법으로든 백인과 흑인이 정치적으로 평등하게 되는 것을 찬성하지 않으며, 찬성했던 적도 없다"라고 링컨은 말했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남과 북의 경제 주도권 싸움이 핵심 원인이었다. 이들에 비한다면 천도교의 수운 최제우는 자신의 두 몸종을 면천시켜줬을 뿐 아니라 그 중 하나는 수양딸로 다른 하나는 며느리로 삼았다. 수운은 당시를 말세로 인식해 개벽을 주창했다.

 

네안데르탈인에게는 병자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 마흔 살쯤 돼서 죽은 이의 뼈가 발견되었는데, 관절염을 앓고 있었고 성장이 멈춘 한쪽 팔이 팔꿈치 아래서 단절돼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주변의 보살핌을 받아 무사히 성인에 도달돼 있었다. 게다가 현저하게 치아가 닳아 있어서 이는 아마도 한쪽 손이 없는 것을 벌충하기 위해 치아를 사용하였기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친구들이 그를 불가에 앉히고 무언가 치아를 사용해서 할 수 있는 일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네안데르탈인은 죽음을 이해하고 사후세계를 믿었다. 깊은 고랑 안에 우반신을 밑으로 하고 무릎을 접은 형태로 눕혀진 소녀의 무덤에는 야생화가 뿌려져 있었다. 그들은 꽃을 사랑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네안데르탈인은 크로마뇽인들에게 학살돼 멸종됐다. 우리의 직계 조상이 그렇게 한 것이다. 구약성경은 진리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카인의 후예'다.

 

우리는 자신의 완강함이 타인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자각하지 못한다. 그 타인 안에는 심지어 애인도 들어 있고 가족도 들어 있다. 그런데 세상과 인생은 자꾸만 우리에게 완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완강함에 중독되어 있다. 정말로 우리는 완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가? 예외와 신념을 갖춘 투쟁은 진정 불가능한 것일까? 사람들은 자꾸 귀에 다가와 속삭인다. 완강하지 않으면 너는 패배자가 될 거라고. 자신의 완강함으로 인하여 애인과 가족조차 작거나 크게 희생시키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우리들에게 말이다. 때로는 방법이 본질을 규정하고 구원한다. 무엇이 완강함을 극복한 진정한 강함이고 무엇이 완강함에 갇힌 사악한 어리석음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지금 이것만은 잘 알겠다. 우리는 자신을 생각할 적에 기쁨만큼이나 '괴로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삶의 길이고 아름다운 인간이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완강함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시고 기도 속에서 괴로움을 잃지 않게 하소서. 아멘.

 

p.156~157

진실이 중요한 것인가. 매혹이 우선인 것인가.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 진실과 매혹의 공동 하한선일까? 매혹이 없는 진실에 무슨 성과가 있을 것이며 거짓인 매혹에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진위를 개의치 않는 게 매혹의 진실이며, 진실은 매혹을 경계하여 제 본체를 사수한다. 진실은 완고하고, 매혹은 흔들린다. 궁극적으로 인간을 해치지 않는 진실과 매혹은 없다. 선택이고 대가가 따를 뿐이다. 진실과 매혹의 혼합 비율마저도. 사랑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은 인생과 죽음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이며, 신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은 사랑에 대해 질문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왜 이런 일이 하필 나한테 벌어졌나 싶은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그냥 눈감고 넘길지 아니면 맞서 싸워야 할지 선택해야만 하는 그런 일들. 전자를 택하면 나와 내 직업군의 자존심은 훼손되지만 대신 몸은 편하고 후자를 택하면 나와 내가 속한 직업군의 자존심을 지킬 수는 있으되 내 몸과 나를 둘러싼 상황들이 극도로 나빠지는 일. 많이 내려놓고 포기하고 일부러 좌절하게 되는 일.

 

p.166

언젠가 진정한 악마의 표정을 상상해본 적이 있다. 필경 그것은 천진하고 착한 표정일 것이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도 모르는 표정. 그것이 가장 무서운 악마의 얼굴일 것이다. 일생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얻으려 살아가고 또한 자기에게 불필요한 것들을 내버리며 살아간다. 한 사람이 제 일생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얻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내다버리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것만은 확실하다. 사람은 자기가 원했지만 못 얻은 것들 때문에 불행하기보다는, 자기가 불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내다버리지 못한 것들 때문에 불행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필요한 것들을 원하고, 필요한 것들을 내다버리고 있는 우리는.

 

p.176~177

생각해보면. 만리장성처럼 멍청한 방어책이 없다. 아무리 길어도 한 곳이 뚫리면 뚫리는 것이고 아무리 길어도 끝은 있으니 그 끝을 돌아가서 치면 되니까. 실지로 몽골 군대는 그렇게 중국을 무너뜨렸다. 교만한 자들의 갇힌 사고방식은 그런 블랙코미디로 참화를 야기하는 법이다. 인생을 살아갈 적에도 만리장성을 방어책으로 건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시 스스로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안위를 위해 만리장성을 쌓는 자, 조롱받아 마땅하며 가혹한 패배와 치욕스러운 죽음이 가깝도다. 삶에 만리장성 따윈 무용지물을 넘어선 자멸책인 것이다. 

 

p.180

시체를 보게 되면 코를 막고 인상을 찌푸리는 자가 있다. 그리고, 시체를 보았을 때 죽음이라는 것을 보고 자신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자도 있다. 자, 당신은 전자인가. 후자인가. 우리는 어떤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문학 > 한국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빛의 호위  (0) 2021.12.28
환한 숨  (0) 2021.12.27
지구에서 한아뿐  (0) 2021.09.09
산 자들  (0) 2021.07.27
알로하, 나의 엄마들  (0) 2021.07.1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