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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내가 사랑한 화가들

by Diligejy 2023. 3. 6.

p.6

위대한 예술가라고, 천재라고, 거장이라고 추앙받는 화가들의 인생을 공부하면서 제 나름대로 찾은 그들의 공통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그들은 삶에 버거운 고통이 찾아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갔습니다. 그 덕분에 거장이라는 반열에 오를 수 있었죠.

 

p.13

샤갈은 언제나 고통스럽고 슬픈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했고, 절망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사랑을 발견해내곤 했습니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했죠. "삶이 언젠가 끝나는 것이라면, 삶을 사랑과 희망의 색으로 칠해야 한다."

 

p.15~16

<비테프스크> 위에서는 샤갈의 모든 것이 담긴 그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향, 사랑, 유대인 등 그야말로 모든 것이 담긴 작품이죠. 

 

이 작품에는 제목 그대로 그의 고향 위를 날고 있는 유대인이 등장합니다. 어두운 자루를 짊어진 채 지붕 위를 떠다니는 긴 수염을 가진 남자는 이스라엘의 예언자 엘리야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고, 루프트멘슈를 암시한 것이기도 해요. 루프트멘슈란 인간과 공기를 의미하는 두 단어인 '루프트'와 '멘슈'를 합친 말로, 직역하면 '공기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공기처럼 허공을 떠돌며 살아가는 동시에 공기처럼 누구나 필요로 하는 인간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은, 당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야 했던 유대인들의 절박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죠.

 

p.20

비테프스크의 유복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벨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배우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샤갈과 결혼한 후에는 자신의 꿈을 미뤄두고 그의 예술 인생을 지원해주기로 마음먹습니다. 1909년 벨라와의 첫 만남을, 샤갈은 이렇게 회상했죠. 

 

"그녀의 침묵은 나의 것, 그녀의 눈도 나의 것입니다. 나는 벨라가 내 과거, 현재, 미래까지 언제나 나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벨라와 처음 만나던 순간, 그녀는 나의 가장 깊숙한 내면을 꿰둟어보는 것 같았고 나는 그녀가 바로 나의 아내가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참 진솔하고 아름다운 고백이죠? 그는 화가였지만 스스로를 시인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작품이 시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을 좋아했죠. 앞으로 샤갈의 그림을 볼 땐 시적인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요소를 찾아보는 것도 좋겠네요. 

 

벨라 역시 샤갈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는 항상 꿈을 꾸었어요. 언젠가 반드시 어느 화가에게 내 마음을 빼앗길 거라고 말이에요. 그 사람은 마음으로 그리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되었죠."

 

p.22

마르크 샤갈, <손가락이 일곱 개인 자화상> 1913

<손가락이 일곱 개인 자화상>은 어디서 본 느낌이죠? 당시 샤갈이 많은 영향을 받았던 피카소와 마티스의 스타일이 엿보이는 그림입니다. 입체주의의 특징을 더해 인물을 다시 점으로  표현한 것도 주목할 만 하네요. 러시아에서 그린 작품들보다 색감도 더 강렬해졌고요.

 

샤갈의 큰 특징 중 하나는 그의 예술을 어느 한 사조로 분류하기가 어렵다는 점인데요. 샤갈은 파리에서 다채로운 사조의 영향을 받았지만 특정 분파에 녹아들지 않고 그 모든 것을 흡수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창조했습니다. 그의 화풍은 입체파, 야수파의 운동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당시 유행했던 화풍에 휩쓸리지 않고 독창성과 일관성을 유지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지요. 이 때문인지 샤갈은 작품에 사회성이나 특정한 의미를 담고 분석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고 해요. 예술을 하는 사람은 사회 이슈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자신의 뿌리인 유대인에 대한 상황은 어쩔 수 없이 들어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샤갈의 그림에는 대부분 자신의 감정과 스토리가 담겨 있습니다.

 

p.23

'일곱 손가락으로 일한다'는 말은 정말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유대인들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요. 자신의 손가락을 일곱 개로 표현한 것은 빨리 화가로 성공해 이름을 알리고 벨라를 만나러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죠. 

 

p.25

마르크 샤갈, <생일>, 1915

<생일>은 샤갈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실제 그의 생일을 그린 그림이기도 하고요. 이날은 샤갈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러시아로 금의환향한 그는 약속대로 벨라에게 청혼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생일 날, 벨라가 예고도 없이 꽃과 음식을 들고 샤갈을 찾아옵니다. 샤갈이 외출한 사이에 벨라가 집에 와서 몰래 깜짝 생일파티를 준비한 거죠. 음식도 준비하고 예쁜 옷을 입고 꽃을 든 채로.

 

p.29-30

마르크 샤갈, <연인들>, 1937

 

레닌의 등장은 유대인들에게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차별은 어떤 경우에도 안 된다며 유대인들에게 가하던 제약을 풀어주었거든요. 게다가 레닌은 예술에도 호의적이어서 파리에서 이름을 알렸던 샤갈을 미술학교 교장으로 임명하기까지 했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호시절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레닌 이후 스탈린 정권이 들어서면서 판도가 뒤집혔거든요. 스탈린은 정치 선전용 그림만 허용했고 본인 정권을 옹호하는 예술가들 외에는 모두 숙청했습니다. 참고로 스탈린은 화가가 자신의 초상화에 키를 작게 그렸다는 이유로 총살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을 정도죠. 도저히 자신의 예술관을 포기할 수 없었던 샤갈은 결국 러시아에서 이룬 모든 성취를 포기하고 파리로 떠납니다. 

 

파리로 향하는 샤갈의 당시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해봅니다. 속상하고 화가 나고 억울했겠지만, 한편으로는 파리에서 펼쳐질 행복한 삶을 기대하며 설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건 한낱 꿈에 불과했죠. 파리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나치 정권의 수장인 히틀러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에 가두고 잔인하게 학살합니다.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고, 샤갈은 계속해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인지 이 시기에 사걀은 행복과 불행을 함께 그림에 담습니다. 이 당시의 대표작이 바로 <연인들>이지요.

 

<연인들>을 그린 1937년은 샤갈에게 기념비적인 해였습니다. 몇 년동안 거절당했던 프랑스 시민권을 마침내 발급받았걷느요. 한편으로는 유대인으로서 끝없는 공포와 두려움, 좌절감에 시달린 시기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프랑스 국기의 색을 써서 그렸지요.

 

p.32

바이올린 역시 유대인의 삶을 의미합니다. 특히 샤갈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바이올린은 유대인들의 축제 때 자주 등장하는 악기인데, 구슬프면서도 강렬한 음색에 휴대하기도 편해서 유대적 색채가 강한 악기로 간주되곤 했죠. 떠돌이 바이올린 연주자 역시 러시아에서 살았던 유대인들의 결혼식과 축제에 어김없이 등장헀던 인물입니다. 실제로 샤갈의 자서전에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지부응로 도피하려 했던 친척들에 관한 일화가 등장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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