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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만약은 없다

by Diligejy 2016. 10. 21.

p.34~35

나는 과학자였으므로, 살인 가능성은 염두에도 두지 못했다 그의 증언을 믿어야 했다. 나는 사망만을 선고하는 판사였고, 다른 문제에 관해서는 전혀 판결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피해자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헛된 노력을 가해 사인을 무마한 범죄자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살인자와 같이 이야기하고, 친절한 면담도 한 공범인가? 도대체 내가 한 일은 무엇이었나? 눈앞에 살인자가 있는데, 의학저널과 논문을 뒤지는 일이었나? 도저히 이 죽음에 대해서 알 수 없다고 지껄이던 일이었나? 그것도 아니라면, 고작 매번 전력질주를 하던 거였나?


삶이 끝나는 장면과 죽음을 저지르는 장면이 엉켜 머릿속이 흐물거리며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상황은 명확했다. 나는 마치 살인을 저지른 사람처럼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네. 저는 제 모든 것을 걸고, 제가 본 것을 전부 기록하고 증언할 겁니다. 지금까지 저를 믿으셨으니, 그것도 믿으실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정신적인 공황으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곧, 나는 환자에 관한 모든 것을 포기했다. 어리둥절해하는 후배에게 환자를 떠넘기고 나는 집으로 가는 차를 몰았다. 주치의가 포기해서 곁을 떠나버린 환자는 절대로 오래 살 수 없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교통체증으로 꽉 막힌 퇴근길 어두운 불빛 속에서, 그 멈춰진 차 안에서, 후배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고, 그것으로 그녀는 죽었다. 나는 후배에게 '미상, 사인을 알 수 없음'으로 사망진단서를 쓰라고 지시했다. 전화가 끊기자 나는 곧 울기 시작했다. 고요한 울음은 점점 커져 결국 통곡으로 변했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고, 핸들과 계기판을 내리치며,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집어던졌다. 입으로는 알 수 없는 비명과 욕설을 내뿜으며.


순간, 나는 입술을 깨물며 불행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보다도 조금이라도 더 불행해지기로, 나는 굳게 마음먹었다.


p.47

암실에서 나는 눈을 감고 있다. 눈을 떠도 암흑이지만, 암흑 속에서 눈을 감으면 한층 더 어두운 암흑이 펼쳐진다. 그 고요한 흑 안에서 나는, 회로를 돌려 개인적인 생각을 꼬고 비틀고 버무려놓는다. 어제 목격했던 환자의 죽음, 내가 저질러버린 실수, 혹은 의학적이거나 문학적인 공상, 실패한 지나간 사랑, 이 질서 안에서 내 생각은 우주 한가운데에서 부유하다가 다른 우주로 도약하려는 것처럼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버린다. 나는 이 순간이 황홀하다. 그 점염하는 환희의 순간들이 나를 집어삼켜서 우주의 진공상태처럼 나를 찌그러뜨려버리거나, 불태워버릴지라도, 내 안의 생각들로 인해 달궈지는 느낌이 지극히 고요하고 치밀해서 견딜 수가 없을 만큼 좋다. 조금은 어두울지라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 삶이라면 그렇게 살고 싶다. 고로, 내 집에는 언제나 이런 암실이 존재할 것이다.


p.64

삶이 지루해 질 때마다 자신의 어깨 근처를 어루만지며 죽음과 가까웠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자신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 있었다고, 그 사람과 자신을 연결해주었던 흉터가 여기 있다고, 그렇게 여길 수 있는 상흔을 만드는 게 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p.170~173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외상을 입는다. 그중 실제 생명에 위협이 될 정도인 중증 외상 환자는 한 해 12만 명이다. 그중 25퍼센트 가량인 3만 명이 실제로 죽는다. 사망환자 3만 명 중에서, 1만 명은 의료기관에서 평가했을 때 대응이 빨랐다면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바꾸어 말하면 외상 환자 1만 명이 제도와 시스템 탓에 사망한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에서 인간의 목숨은 어떤 일보다도 먼저 고려되어야 하는 가치로 받아들여지며, 사람들은 이것이 위협받으면 분개하고, 그런 사실을 널리 알리려 한다. 아무리 많은 비용을 투자한다고 해도 하나의 생명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우리는 대의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해 1만 명이 외상 환자를 다루는 시스템 때문에 죽는다. 이건 통계청에서 발표한 사실이다. 하지만 국민들이 흉부외과 의사나 외과 의사가 부족하다고, 혹은 외상 환자를 다루는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고 시위를 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나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알 도리도 없다. 일단, 병원에서 "이런 경우 흉부외과 당직자가 처음부터 붙어 진료했으면 당신 남편은 살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같이 의사 입장에서 쓸모없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는다. 실제로 한 개인의 생사는 아주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런 언급은 과학적으로 틀릴 가능성도 있어서 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환자를 잃는 안타까움을 알려야 할 흉부외과 의사는 너무 소수이며, 이들 중 많은 수는 응급수술을 포기하고 전공과 관련 없는 의업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당장의 당직 근무에 지쳐 사회적으로 발언하기 힘들다. 타과 의사들은 자기 일과 자기 환자가 아니므로 관심도 없으며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결국 이것들이 맞물려, 1만 명의 죽음에 대해서는 관대한 사회가 되었다.


이상한 일은 또 있다. 10년간 흉부외과 레지던트가 한 명도 없던 우리 병원의 경우를 보면, 현재 인기가 있다는 소위 '피안성정재영(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정신건강의학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 레지던트가 각각 피부과 8명, 정신건강의학과 8명, 재활의학과 8명, 영상의학과 8명으로 모두 32명이다. 이들도 중요한 의업을 하고 있고 본인의 의지에 따라 선택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이들의 수가 좀 적거나 심지어 없어도 응급실에서 환자가 죽는 일은 없다. 정원보다 지원자가 넘쳐나는 이 과의 의사들 중 소수만이라도 흉부외과를 지원했더라면 흉부외과적인 응급에 지금보다도 훨씬 원활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병원에서는 몇 년간 단 한 명의 흉부외과 레지던트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들을 쉽게 비난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흉부외과를 선택하면 남들보다 훨씬 힘든 길을 평생 가야만 하는데다가,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지 못하고 심지어 돈도 못 버는데, 그런 일이라면, 그건 누구에게나 가장 먼저 제외될 선택지다.


참 이상한 일이다. 분명 우리는 돈보다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다고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목숨을 아끼고, 자신의 목숨도 소중하게 여긴다. 하지만, 생명과 직결될 수 있는 흉부외과 의사의 수는 현재 시장논리로 인해 전멸에 가깝다. 지원자는 모집정원의 반을 넘긴 적이 없다. 현실적인 수가 조정이라든지, 단순한 금전적 보상으로라도 이걸 늘릴 방법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신경외과나 정형외과의 레지던트 생활은 흉부외과 못지 않게 힘들지만 나중에 금전적인 보상이 따르기 때문에 이 두 개의 과는 거의 미달이 생기지 않는다. 흉부외과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라면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의사들 사이에서 흉부외과는 압도적으로 경시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다. 1년에 1만 명이면, 하루에 27명꼴이다. 외상 시스템의 미비로 한 시간에 한 명이 넘게 죽고 있다. 누군가는 이런 일을 낱낱이 알고 있을 텐데, 왜 고쳐지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현실적으로 닥칠 위험이 거의 없다시피 한 광우병이나 광견병에는 분노하고 두려워하지만, 귀갓길에 마주한 교통사고 때문에 병원에 갔는데 수술이 지연되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는 왜 분노하지 않을까.


중증 외상에 대한 대책으로 외상센터를 지정하고 보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래서 기존 병원들 중에서 몇 곳을 센터로 지정하고 시스템의 미비점을 고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센터까지 잘 이송되어서 갈 사람이면 원래 살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사고가 났을 때 상주하고 있다가 가장 빨리 눈앞에서 환자를 볼 수 있는 흉부외과 의사 한두 명이 더 급하다.


나는 응급실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의사다. 밤새고 일하는 고생은 크게 인정받지 못하고, 이를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외진 응급실에서 조용히 일할 뿐이다. 큰 신념이나 의지가 있어 사회나 시스템을 개혁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내 환자가 눈앞에서 죽어가면 식은땀이 나고 온몸이 떨린다. 생각 없는 나도 며칠 동안을 자책하고 후회도 한다. 하지만 해결책이 없는 질문은 무지한 나도 먹먹한 기분이 들게 한다. 많이 바라는 것은 없다. 그냥 상주하는 흉부외과 의사가 환자를 살려줬으면 한다. 그뿐이다.


p.177~180

해는 매일 다른 표정으로 진다. 나는 그 순간을 매일 목격함으로써, 내가 숨 쉬고 있는 공간을 완연하게 느끼고 싶다. 어떤 날은 맑고 정직하게, 또 어떤 날은 몇 점의 구름으로 수줍게 가려진 채로, 가끔씩은 짐작할 수 없는 먼 곳으로부터 신비롭고 희미한 빛깔을 보이며 해는 저문다. 습관처럼 내가 사는 곳의 일몰을 관찰하면,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았던 곳이 정말 특별해진다. 내가 만난 일몰의 개수나 특징만큼 나는 매일 다른 세상을 본다. 그래서 주변을 조금 더 아름답고 그립게 만들 핑계를 만든다. 이곳을 여행하거나 일탈을 하는 것처럼, 내가 사는 곳이 가보지 못했던 이곳의 한 도시인 것처럼, 그리고 다른 도시에 머물 적에는 이곳이 내가 살았던 도시인 것처럼, 빨갛게 지는 노을은 하루도 완벽히 같은 날이 없다. 그래서 매일 새로운 광경을 보는 나의 달리기는 지루할 틈이 없다.


특히 평소라면 걸어보지도 않았을 길을 달리는 일은 나의 일상을 새롭게 한다. 그래서 나는 잿빛 벽만 나를 노려보는 헬스클럽 러닝머신을 이용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것은 햄스터가 쳇바퀴를 아무 의미 없이 달리는 것처럼 전혀 창의적인 영감이 생기지 않는 일이다. 방랑벽이 있는 나는 바깥을 뛰는 습관으로, 앞으로 살아갈 많은 집과 도시에서의 추억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도달할 수많은 여행지에서도 이런 식으로 그곳을 고스란히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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