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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남자는 무엇으로 싸우는가

by Diligejy 2016. 10. 17.

p.20

세상은 탈출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탈출할 수 있는 지하 감옥과 같다. 중년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으로 세상과 맞서야 하는 나이다. 세상을 믿지 않음으로써 세상을 믿어 봐야 하는 나이다. 사랑을 의심함으로써 사랑을 발견해내야 하는 나이다. 브루스 웨인은 절망과 죽음에 미혹된다. 세상을 믿을 수 없다면 세상을 끝까지 의심해 보기로 한다. 사랑 없이 홀로 살아가느니 외롭게 죽기로 결심한다.


p.22

희망을 믿으면 착한 사람이 되고 마음은 편하다. 하지만 정작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은 나빠진다. 절망을 믿으면 못된 사람이 되고 불편하다. 결국 세상을 조금은 바꾼다. 40대는 선택할 수 있는 나이다. 세상에 거짓 희망을 말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이용할 수도 있다. 세상에 진짜 절망을 말하며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도와줄 수도 있다.

 

p.51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싸우기 시작한다. 아버지와 싸우고 형제와 싸운다. 학교와 싸우고 친구와 싸운다. 연적과 싸우고 회사와 싸운다. 세상과 편견과 사회의 모순에 맞서고 권력과 시장에 항거한다. 남자에게는 끊임없이 싸움 상대가 주어진다.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여자다.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남자일 수 없다. 세상과 맞서 싸우는 과정을 통해 남자는 비로소 남자로 태어난다. 중간에 포기해서도 안 된다. 싸움을 포기하면 남자이기를 포기하는 꼴이다.

 

p.59

현대사회에서 어디에 가 봤다는 건 공간 개념이 아니다. 거기에서 돈을 써 봤다는 뜻이다. 한 남자가 도산공원 명품 거리에서 에르메스 매장을 찾아 헤매고 있다면 그 남자는 분명 한 번도 에르메스 매장에서 돈을 써 본 적이 없다. 에르메스 매장은 그의 영역이 아니다. 도산공원은 그의 서식지가 아니다. 길을 안다는 건 단지 공간 지리를 안다는 것 이상이다. 청담동 지리를 잘 안다는 건 청담동 번지수를 외우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청담동 이곳저곳에서 돈을 써봤다는 의미다. 저 레스토랑과 이 와인바에서 카드를 긁어댔기 때문에 남자는 길을 안다. 청담동에서 길을 몰라 헤맨다는 건 스스로 이방인이란 걸 드러내는 행위다. 길을 모른다는 건 길만 모른다는 게 아니다.

 

p.75

인간은 두려우면 미워한다. 공포의 대상을 증오의 대상으로 치환해야 자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p.84~85

어차피 모든 부랑자는 다 가짜다. 진짜는 우리 자신이다. 추락하는 비행기 앞에 서 있는 건 언제나 우리 자신일 수밖에 없다. 진짜한테 선의가 없는데 진짜를 모방한 가짜한테 선의가 있을 리 없다. 가짜가 진짜 가짜가 된 건 스스로를 진짜라고 믿었던 우리조차 가짜였기 때문이다. 40대식 사고로는 이걸 인정하기 어렵다. 대의정치에 매몰돼서다. "미안하다"는 말은 "잘못 뽑아서 미안하다"거나 "정권을 못 바꿔서 미안하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부랑자든 저 부랑자든 가짜인 건 마찬가지다. 원본이 없으면 모두 복사본일 뿐이다. 이 부랑자를 저 부랑자로 바꿔봐야 또 책임 회피다. 이것도 유체이탈 화법이다. 가만히 있을 수 있다.


p.94

남자가 여왕에게 충성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모두가 가질 수 있어서 아무도 가질 수 없는 여자이기 때문이거나, 감히 갖고자 할 수 없어서 아무도 가질 수 없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빅토리아와 측천무후가 각각 그랬다. 남자가 여왕에게 바치는 충성에는 언제나 소유욕이 동반된 연애 감정이 뒤섞여 있기 마련이다. 


p.121

의미 없이 수염을 기르는 남자는 없다. 민낯을 요구하는 현대 규율 사회에서 수염을 기르는 남자는 늘 해명을 요구받기 떄문이다. 세상은 남자에게 왜 가면을 썼는지 묻는다. 게을러서, 멋으로, 불만이 있어서, 벗어나려고, 고독해서 기를 수 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남자의 수염 뒤엔 늘 무언가 감춰져 있다.


p.228

40대 남자가 가장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은 자책감이다. 결국 자기 인생이 여기까지 흘러오게 만든 온갖 실수들을 곱씹으며 깊은 자책감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실수에서 배우는 건 좋다. 반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더 중요한 건 그런 실수들과 함께 인생을 계속 살아가는 일이다. 영어 표현 가운데 'I can live with that'이라는 문장이 있다. 직역하면 '그것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감당하며 살아간다는 얘기다. 그것이 실수든 오만이든 나태든 패배든 마찬가지다. 결국 인생이라는 항로에서 마주한 모든 패배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게 인간의 운명이다. 자책감은 쓰라리지만 그것조차도 짊어져야 할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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