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

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

by Diligejy 2023. 7. 10.

 

 

p.26~27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을 때에는 대화가 어떤 상황에서 시작되었는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지, 등장 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인지를 잘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아테나이의 외항 페이라이에우스는 이른바 아테나이 민주파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그를 붙잡은 폴레마르코스의 이름에 재미있는 암시가 있는데, 그 이름은 헬라스어로 '싸움'이란 뜻을 가진 '폴레모스(polemos)'와 '시작, 기원, 발단'이란 뜻을 가진 '아르케(arkhe)'가 합쳐진 것이다. 폴레마르코스의 아우 뤼시아스는 아버지 케팔로스의 사망 후 십오 년 동안 유랑 생활을 하다가, 서기전 412년에 아테나이로 돌아와 다시 아버지의 가업을 일으켰다. 그는 민주파 사람들과 제휴하여 30인 과두 정권에 맞섰다가 형과 함께 체포되었고, 형은 처형당했으나 그는 도피하였으며, 서기전 403년 민주파가 집권하게 되자 아테나이로 귀환했다. 플라톤의 당대 독자들은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그들과 소크라테스 사이에 긴장이 생겨났음을 짐작했을 것이다. 이러한 긴장은 폴레마르코스가 소크라테스를 붙잡는 방식에서 드러났다. 폴레마르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자기 쪽 사람들이 몇 명인지 아느냐고 묻는 것은, 자신들의 수가 많으니 자신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그들을 설득하면 순순히 보내줄 것인가를 물었다. 폴레마르코스 쪽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는 그들이 소크라테스를 이겨 보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어쩔 수 없이 폴레마르코스의 집으로 갔다.

 

p.42

친구와 적은 늘 똑같은가? 아니다. 인간 본성에 관한 여러 가지 인류학적 고찰에서 공통적인 결론 중의 하나가 인간은 거의 본능적으로 배신을 잘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순식간에 입장을 바꾼다. 인간은 배신을 잘하면서 동시에 타인의 배신에 대해서 굉장히 분노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수많은 실험이 이 점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의 배신을 알아차렸을 때 인간은 자신이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그 배신을 응징하고자 한다. 

 

p.60

논쟁을 할 때는 처음부터 상대방의 세상 사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시작하면 안 된다. 처음에는 상대를 무미건조하게 논리적으로 반박하여 궁지에 몰아넣고 그 다음에 세계관의 문제를 건드려 무너뜨려야 한다. 물론 이는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대화를 통해 자시느이 세계관을 바꾸는 사람은 없다.

 

p.77-79

많은 사람은 결과로 얻어질 자잘한 이익에는 신경을 곤두세우겠지만 그것이 그 자체로 올바른 것인지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다가도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낌새가 보이면 올바름에 관심을 갖는 척이라도 한다. 많은 사람을 움직이는 동기는 두 가지다. 이익이 되는 결과,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평판, 둘 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다. 그 자체로 올바른 것은 참된 것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글라우콘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참된 것이면 된다는 것이다. 앞서 많은 사람이 올바름을 행하는 이유는 보수나 평판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이익이 되고 평판을 얻을 수 있다면 올바르지 못한 짓도 한다. 많은 사람이 이 생각에 합의를 하면 이 생각이 실제가 된다. 많은 사람의 의견이 모여 올바르지 못한 것을 저지르는 게 좋다고 합의한다면 이것이 약정이 되어 통용된다. 이것은 그 자체 올바른 것과 관계가 없다.

 

플라톤이 당대 아테나이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게 이것이다. 민주 정체에서는 많은 사람이 약정을 하면 된다. 글라우콘의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들의 법률(nomoi)과 약정(계약: syntheke)을 제정하기 시작했으며, 이 법(nomos)에 의한 지시를 합법적(nomimon)이며 올바르다(dikaion)고 한다." 법이 "올바름의 기원(genesis)이며 본질(ousia)"이라고까지 말한다. 합법성과 올바름(정당성)이 법을 통해서 결합된다. 민주정 법치 국가의 모습이다. 체제가 법규범에 합당한 절차에 따라 작동하고 그 법의 내용이 어떠하든 실정법으로써 입법되어 있기만 하다면 정당성을 얻는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내용이 극도로 악한 법도 법이므로 그것은 옳은 것으로 간주되며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이는 체제의 형식적 구성에 기여한다. 우리는 정당성의 원천을 참된 올바름에서 찾으며, 그런 까닭에 적절한 합의에 의해 형성되는 올바름이 진짜 올바른 것인지는 격렬한 이념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곤 한다. 폴리스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규정을 바탕으로 판단한다면, 폴리스의 정당성이 올바름에 정초되지 않았을 때, 또는 무엇이 올바름인가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어떠한 합법성도 의미를 갖지 못한다. 무엇이 '잘 삶'인가를 확정해야만 체제는 완성된 현실태가 되기 때문에 글라우콘의 주장은 철없는 도덕주의자의 푸념이 아니다. 현실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나온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익과 평판에 따라 행동한다면 올바름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도 실제로 올바른 사람인지 알아낼 방도가 없으며 어쩌면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일 수도 있다. 글라우콘은 사유실험을 했다. 여기서 그가 내놓는 것은 '기게스의 반지'로 알려진 이야기다. 반지를 끼면 자신이 남에게 안 보이게 되니까 뭐든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 (exousia)를 가지게 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 반지가 생겼다고 해 보자. 그걸 끼고도 항상 올바른 일을 할 자신이 있는가. 남들이 안 보는데 뭐 어떤가. 글라우콘도 그렇게 말했다. "올바름 속에 머무르면서 남의 것을 멀리하고 그것에 손을 대지 않을 정도로 그처럼 철석같은 마음을 유지할 살마은 아무도 없을 것 같이 생각"된다고 말이다. 그에 대비되는 이는 "단순하고 고귀한 사람으로서, 아이스퀼로스의 표현대로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기'(생각되기 : dokein)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훌륭한 사람'이기'(einai)를 바라는 사람"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