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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by Diligejy 2020. 8. 19.

한반도의 미래전략 어떻게 가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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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임진왜란부터 태평양전쟁까지 동아시아 오백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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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10

일본은 임진왜란에 이어 19세기 근대 이후 한반도의 독립국가를 멸망시키고 직접 지배를 꾀함으로써 16세기에 실패로 끝난 정복을 20세기 초에 성공시켰다. 그 결과 한국인은 이 두 차례 침략에서 심각한 트라우마를 입었다. 오늘날까지 한국인이, 역사상 일본 세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하게 한반도를 침략한 중국 또는 대륙 세력에 비해 일본을 더욱 증오하는 역사적인 연원은 이것이다. 더구나 한국인은 일본에 대해 선진문물을 전수해줬다는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라시아 동해안에 해양세력이 대두하면서 한반도에 부여된 '지정학적 요충지'라는 의미는, 오늘날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반도에 고난만을 가져다준 것일까?
 

임진왜란 이전의 한반도 국가들은 압도적인 군사력(hard power)과 우월한 문화적 자원(soft power)을 지닌 한인 세력에 대해 절대적으로 불리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송 요 금의 병립기와 원말 명초 등의 시기에 한반도 세력이 한인 세력과 북아시아의 유목민 반유목민 세력 간에서 균형 외교를 전개하려 한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질서 재편 과정에서 한반도의 발언권은 극히 미약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통해 20여만의 대군을 바다 건너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과, 내향적 외교로 조선과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이 일본에 등장하면서, 한반도 국가는 비로소 대륙 세력과 교섭할 수 있는 카드를 갖게 되었다.

 
p.11~12
최근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각종 움직임에 대해 한국 일각에서는 120년 전 일본의 '군국주의적'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으나,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은 미국의 요청이 먼저이며 일본의 호응은 2차적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한 미 일의 남방해양 삼각 동맹을 공고히 하려는 미국이 한일 갈등에 일본을 편드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러 가지 요인으로 보아 한국 일각의 희망 섞인 예측과는 달리 동아시아의 주도권, 나아가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미국의 일극 체제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이 동중국해에서 중국과의 영토분쟁 때문에 미국의 의사에 반하는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거나 심지어 미국과 충돌한다는 시나리오는 비현실적이다.
 
p.12~13
필리핀과 베트남과 같이 '대동아공영권'에 포섭된 경험을 지닌 유라시아 동해안의 해양 국가가 최근 중국보다 일본의 움직임에 이해를 표명하는 것은, 일본의 군사적 정치적 변화가 일본의 일국적인 우경화가 아닌 미국의 지도하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국가들은 유라시아 동해안 지역을 직접 지배하려고 하지 않는 미국이, 아편전쟁 이후 지난 170년간의 치욕을 씻고자 애국주의적 대외 정책을 추진하는 중국보다 덜 위험하다는 인식도 공유하고 있다. 한 예로 1992년에 미군을 자국에서 철수시킨 필리핀이 21세기 들어 다시금 미국과의 공조를 강화하고 있는데, 이는 유라시아 동해안 지역의 현 정세를 상징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 측면에서 현재 중국과 일본의 대립 상황을 120년 전과 마찬가지로 군국주의 일본이 주도하는 것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한국 일각의 생각은 유라시아 동해안 일대의 정치적 복잡성을 이해하지 않고 선과 악의 대립으로 세계를 해석하려는 단선적 움직임이다.
 
한국 내의 반일 민족주의적 관점에 대해 미국은 지속적으로 경고 신호를 던지고 있다. 2013년 말에 헤리티지 재단의 브루스 클링너(Bruce Klingner)선임연구원이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남한은 종종 21세기의 중국과 북한보다 1930년대의 일본을 더욱 두려워하는 것 같다"라고 비꼰 것이 미국의 입장을 상징한다. 2015년 들어서도 가해자 일본과 피해자 한중을 동렬로 취급하는 웬디 셔먼(Wendy Sherman) 국무부 차관보의 발언은 이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돼야 한다.
 
현재 한반도의 독립과 번영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는 국가를 굳이 들자면, 일본이 아닌 중국이다. 다음 지도는 1982년에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사령관 류화칭이 제시한 중국의 해양 방아선인 '제1도련'과 '제2도련'이다. 현재 중국 해군은 제1도련을 통과하여 제2도련까지 진출한 상태다. 이 지도에서 주목되는 것은 한반도 전체가 이미 제1도련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며, 개념적으로 한반도는 이미 중국의 내해에 포섭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p.15~16

근본적인 문제는 미국이든 중국이든 어느 한 나라에 군사 정치 경제 등 모든 부문을 전적으로 의존하고자 하는 사고방식이다. 유라시아 동해안의 국제적 동향을 무시하고 어느 한 나라의 일방적인 영향권에 편입돼 살 것인가, 아니면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과 해양세력 사이에 자리한 지정학적 요충지에서 복잡한 전략을 구사하면서 힘들지만 자립되고 번영하는 세력으로 존재할 것인가.
 
p.56
이렇듯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선봉에 선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각기 크리스트교(가톨릭)와 불교(니치렌슈) 신도였으며, 이들에게 임진왜란은 일종의 종교전쟁이었다. 일본에 있는 임진왜란 기록을 보면 일본군이 부처와 일본의 여러 신의 도움으로 전투를 잘 치를 수 있다는 대목이 적지 않게 확인된다. 인간은 종교라는 이름을 내걸었을 때 가장 잔인하게 전쟁을 치렀음을 역사는 수천 년에 걸쳐 증명한다.

 

 

p.26~28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100년 동안, 오늘날의 오키나와와 훗카이도를 제외한 일본열도는 이른바 전국시대라 불리는 혼란한 상황에 있었다. 15세기 일본의 양대 무사 집안인 야마나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이 충돌한 오닌의 난이 그 발단이었다. 전국의 무사 가문이 제각기 야마나 호소카와 가문을 편들며 둘로 쪼개지면서, 일본의 종교 지도자인 덴노를 보필하며 정치 군사를 담당한 무로마치막부는 통제권을 상실했다. 그렇다고 덴노가 종교적인 권위로써 일본을 통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늘날의 선입관과는 달리 이 시기의 장군 대다수에게 일본열도를 통일해야겠다는 야심 같은 건 없었다. '열심히'를 뜻하는 일본어 '잇쇼켄메이'는 "무사가 자신의 땅을 목숨 걸고 지킨다"는 뜻의 '잇쇼켄메이'에서 나왔다. 이처럼 일본 역사에서 무사는 자기 땅을 지키는 데 혈안인 존재로 인식됐다. 오늘날, 일본의 전국시대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천하통일을 꿈꾸는 장군들'이라는 이미지는 오다 노부나가라는 무사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67년에 노부나가는 중부 일본의 이노구치라는 곳의 이름을 기후라고 바꾼다. 이는 고대 중국의 주나라 문왕이 중국 산시성의 기산에 도읍을 두고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이때부터 노부나가는 '천하에 무를 펼친다'라는 인장을 써서 일본열도 통일의 뜻을 분명히 했다.

 

당시 노부나가의 이러한 태도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전국시대의 유명한 무장으로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이 있다. 다케다 신겐은 노부나가에 앞서 일본 통일의 뜻을 드러냈는데, 우에스기 겐신은 이를 일본의 안정을 깨뜨리려는 사악한 의도로 보았다. 이 때문에 다케다 신겐이 다른 영지를 침범할 때마다 우에스기 겐신은 자신의 이익과 무관하게 군대를 보내 침해당한 장군을 도와주었다.

 

이러한 다케다 신겐조차도 스스로를 불교도라고 생각하여 '부처의 제자'라고 서명한 편지를 노부나가에 보냈는데, 이에 노부나가는 답신에 '제육천마왕'이라고 서명헀다고 한다. 제육천마왕은 불교에서 불법 수행을 방해하는 악신이다.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불교 국가이기 때문에, 노부나가의 태도는 일본의 안정을 깨뜨리는 이질적인 것일 뿐 아니라, 이단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p.30

전국시대의 일본은 고대부터 정교일체 세력으로 존재해온 덴노, 무사 계급의 상징적인 수장인 쇼군, 각지에 할거하여 영지를 지니고 있던 이른바 전국 다이묘, 정토진종 천태종 진언종 등의 불교 세력, 가톨릭 다이묘 및 예수회 세력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p.32

일본 통일을 꾀하는 노부나가의 가장 큰 적은 종교 세력이었다. 15세기 일본에서 위협적인 종교 세력은 불교와 가톨릭이었는데, 가톨릭 세력은 조총 군함 등 유럽의 군사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노부나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이를 통해 대항 세력인 불교를 억제하려 했기 때문에 노부나가와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그리하여 노부나가는 히에이 산을 포위하고 불을 질러 수천 명을 태워 죽이고 고야 산에서도 천여 명을 살해하는 등 고도로 정치화된 불교세력과의 일대 전쟁을 전개했다. 그가 스스로를 불법의 훼방자 '제육천마왕'을 자칭한 이유다.

 

p.37

히데요시가 과연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어디에 속한 사람이었는지부터 시작해서,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는 과정에서 작용했을 권력의지의 지향점, 일본 바깥 세계에 관한 관념, 자신의 사후에 도요토미 정권이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할지에 대한 구상 등, 그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인지도 여전히 모호하다.

 

p.38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백가쟁명'이라고 할 만큼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됐다. 세상의 모든 학설이 그렇듯이, 의견 자체만 봐도 그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이 서 있는 곳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의 '궁극적'목적이 조선의 정복이었다는 한국 일각의 주장은, 한국을 '선량한 세게의 중심'으로 간주하고 일본을 그 선한 중심에 적대하는 '악의 축'으로 설정하는 크리스트교적 관점을 기반으로 한다. 세계를 빛과 어둠의 전쟁으로 해석하고 빛이 최후 전쟁에서 승리하리라 믿은, 조로아스터교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그 이원론 말이다.

 

자기 집단을 이 세계에서 가장 유의미하고 선량한 존재로 간주하고 집단 바깥에 사악한 적대 세력을 설정하는 것은 집단의 존속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행위다. 다만 이런 관점은 자기 집단의 세계관에 대해 바깥 세계의 동조를 구하고자 할 때 문제가 된다.

 

p.39~41

임진왜란의 궁극적 목적이 조선에 국한된다고 보는 것은 전쟁 전후로 히데요시가 발급한 여러 문서와 충돌할 뿐 아니라, 일본의 궁극적 목표가 자국임을 안 명나라가 20여만 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병시켜 전선을 한반도에서 교착시킨 것이라는 당시 조선과 명의 해석과도 엇갈린다.

 

이 난제에 대한 가장 손쉬운 의견은 히데요시가 "나이가 들어서 판단력이 흐려져 과대망상을 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유라시아 동부를 뒤흔들고 한반도를 지정학적 요충지로 부상시킨 장기간의 국제전을 지나치게 히데요시 개인적인 이유로 환원시킨다. 역사가 필연보다 우연으로 움직이는 듯 보이거나, 한 집단의 의사결정을 주도할 수 있는 일개인의 사적인 사정이 결과적으로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얼핏 우연적이고 개인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는 역사의 움직임은, 역사 지리적 상황이 특정한 국면에 이르렀기 때문에 비로소 현실에 나타나는 것이다. 현 일본 총리 아베신조가 국수주의적 정책을 밀어붙이는 배경에는 A급 전범 용의자인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에 대한 특별한 감정에서 비롯된 신념이 엿보인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인 감정이 국가 정책에 반영되는 데에는 경제 불황 속에 자신감을 잃고, 2011년의 도쿄전력 핵발전소 사고 이후에 생존의 위기를 느낀 일본 사회의 피해의식이라는 배경이 필요했다.

 

다만 우경화되는 모습이 명백하다고 해도 일본의 행보는 과거와 다르다. 100여 년 전처럼 세계에 위협을 줄 수 없으며, 400여 년 전처럼 임진왜란이라는 대형 사고를 친 뒤에 '쇄국'체제로 숨어버릴 수 없다. 바로 세계의 정치경제적 구조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해석할 때 지나치게 개인적인 이유를 강조하고 그 사회적 배경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선동적인 영웅주의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다.

 

p.41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유라시아 동부 지역을 살펴보면, 한인과 여러 비한인 집단은 중국 동부 지역의 황허 강과 양쯔강 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충돌을 거듭했다. 물론 북아시아 지역의 집단들은 한인의 영역뿐 아니라 중앙아시아 러시아 유럽 등으로도 세력을 팽창했기 때문에, 이들 집단이 한인의 영역만을 절대시하여 정복을 시도했다고 말하는 것은 중국 중심적인 사고방식이다. 중국사의 입장에서는 어떤 비한인 집단이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면, 그 집단의 거주지만큼 '중국'의 영역이 확장되는 과정이 반복됐다. 

 

p.42

서로 밀고 밀리는 경쟁 관계였던 한인과 비한인 집단이었으나, 중국 '주변'지역의 집단 가운데 이 경쟁에 참여하지 않은 집단이 둘 있었다. 그 하나가 한반도의 한민족이고 다른 하나가 일본 열도의 일본인이다. 오늘날 한국인의 조상이 되는 집단이 주축이 돼 건설한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은 동북삼성 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한반도까지 영역을 확대했으나, 끝내 황허 강 유역으로 서진하지 않았다.

 

p.44

한인의 영역을 지배하고자 한 모든 비한인 세력의 시도가 성공한 것은 아니고, 만주인과 같이 우연이 겹치며 명나라의 정복에 성공한 사례도 있었다. 따라서 히데요시가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명나라의 정복을 시도한 것은, 한인과 비한인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패권을 두고 경합한 수천 년의 패턴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p.45

16세기 후기에 한반도가 갖게 된 이러한 지정학적 동력은 19세기 말에도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청 러시아와 일본이 충돌한 끝에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일본은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 세력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몽골 러시아 등의 대륙 제국에 대항하여 에스파냐 포르투갈 영국 미국 등의 해양 제국이 세계사적 헤게모니를 잡게 됐고, 교통가 통신의 발달로 인해 육지보다 바다에서 움직이는 것이 더욱 편리해진 현재,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상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오늘날 중국과 일본이 군사적으로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는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동중국해의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다. 또한 남중국해의 영해권을 두고 베트남 타이완 필리핀 브루네이 말레이시아 미국과 중국이 새로운 전국시대를 연 덕분에 한반도 주변의 군사적 위기가 상대적으로 완화되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한국 일부에서는 여전히 일본이 대륙 진출을 노리며 북한에 접근하고 있고, 이를 막기 위해 중국이 북한을 번병으로 거느리고 있다고 해석한다. 필자는 이를 '역사가 반복된다'는 가설을 지나치게 기계론적으로 해석한 데에서 비롯된 오류이자, 일본을 세계사 속에서 불변하는 절대 악으로 간주하는 이원론적 종교관 영향 탓이고, 기술 문명의 발달이 이끌어낸 인류사의 비가역적(irreversible)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p.57

유라시아 동부를 지배하고자 하는 목표를 내걸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여름에 사망하자, 전쟁을 계속할 명분을 상실한 일본군은 열도로 되돌아갔다. 이로써 일본열도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 대륙부에 대한 지배를 꾀한 세 번째 시도도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세 번째 시도가 유라시아 동부에 미친 영향은 이전의 두 차례와는 달랐다. 중국에서는 한인의 명나라가 만주인의 청나라로 교체됐고,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정권이 몰락하고 도쿠가와 정권이 들어섰다. 이 영향은 타이완과 동남아시아에까지 미쳐서 이들 지역의 정치적 지형을 바꿨다. 한반도는 분단의 위험을 피했지만, 잇따른 쿠테타와 반란, 그리고 만주인과의 두 차례 전쟁과 점령이라는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왕조 교체에 준하는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그런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유라시아 동부의 질서를 재편한 100년간의 장기적 변동기를 연 사건이었다.

 

p.59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은 각 지역의 거점만을 점령하며 급히 북쪽으로 진격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 때문에 거점 지역 바깥은 일본군이 지배할 수 없었고, 조선은 바깥 지역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관군과 연합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즉, 1592년 시점에서 일본군은 점령지를 면적(面的)이 아니라 선적(線的)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등의 육군과 함께 침략전쟁의 한 축이었던 일본의 수군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연전연패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명나라 군대의 참전까지 확인하자 일본군으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한반도 북부에 진입한 일본군은 개전 때 경험하지 못한 조선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임진왜란 이전에 한반도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는 세력은 언제나 해양이 아닌 대륙 쪽에서 왔다. 따라서 조선을 비롯해 한반도에 자리했던 국가는 영토 북쪽에 주력부대를 배치하고, 남쪽에는 소규모의 왜구 세력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병력만을 배치했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이 무력하게 무너진 이유가 이것이다. 그러나 1592년 말이 되면 북방에서 여진인(女眞人)에 맞서 국경지역을 지키던 조선의 정예병이 일본군과의 전투에 투입됐다. 여기에다 날씨도 조선군을 도왔으니, 따뜻한 기후의 일본열도 서부 출신이 주축을 이룬 일본군 장병은 한반도 북부의 혹독한 겨울에 견디지 못한 것이다.

 

p.61

12-13세기에 금(金)나라를 세웠다가 몽골인에 의해 멸망당한 뒤로, 이 지역의 여진인은 몽골 조선 명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16세기 당시 여진인은 몽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해서여진(海西女眞) 4부(部), 명과 조선의 영향이 강한 압록강 북쪽의 건주여진(建州女眞) 5부, 그리고 두만강 북쪽의 야인여진(野人女眞) 4부 등 13개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은 동질감이 약하여 서로 대립하고 있었으며, 몽골 조선 명 등의 주변 세력이 이러한 대립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p.62~63

신중한 누르하치는 임진왜란 발발 직후에 조선을 도와줄 의향이 있다고 타진하는 등 여전히 조선과 명에 저자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1595년에 경기 황해 평안 함경 도체찰사가 된 류성룡은 여진 세력이 누르하치의 영도하에 급속히 통일되고 있음을 우려하며, 이를 방치하면 장차 화근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류성룡은 유사시 겨울의 압록강에 얼음성을 쌓아 여진 세력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다고 건의했다. 실제로 누르하치가 1626년에 만리장성 북쪽 영원성근처를 공격했을 때에 명나라군이 얼어붙은 보하이 만의 얼음으로 성을 쌓아 대응하기도 했는데, 군사학적인 소양이 깊었던 류성룡 역시 한반도 북부의 특성을 활용한 병법을 고안한 것이다. 그만큼 임진왜란 당시부터 누르하치 세력이 장차 위협이 되리라는 사실이 예견돼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이처럼 온갖 방법을 구상해야 할 정도로 누르하치의 여진 세력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가까운 미래의 위협으로 다가와 있었다.

 

p.88~91

오삼계가 산해관의 문을 열고 도르곤의 청나라군을 맞이하는 역사적 현장을 지켜본 조선 사람이 있었다. 바로 1636년의 병자호란 이후에 인질로 청나라에 와 있던 소현세자였다. 중국의 동북지방, 만주 지역의 중심지인 심양에 거주하던 소현세자는, 청나라군이 산해관을 돌파하고 북경을 정복하는 원정군에 참가하도록 요구받았다. 청나라는 단순히 만주인만의 국가가 아니라 만주인 몽골인 한인의 연합체제였으며, 조선인 역시 정묘 병자호란 전후로 이 체제의 일원이 됐다. 청나라의 근본이 되는 시스템인 팔기 가운데에는 '고려 니루'라는 조선인 조직이 결성돼 있었으며, 병자호란 이후 명나라를 공격할 때에는 임경업 등이 이끄는 조선군도 참가했다. 1644년의 북경 공격 역시 이러한 연합군 체제로 수행된 것이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거주하고, 산해관을 지나 북경에 들어가는 일련의 과정이 청나라의 강요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군대가 만리장성 너머 북경에 진입한 것은 한반도 역사상 유래가 거의 없는 사건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이는 고구려의 유민인 고선지가 당나라군을 이끌고 티베트군을 격파, 중앙아시아 연합군과 탈라스 평원에서 맞붙은 사건 이후, 한반도 출신이 군사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에서 활동한 드문 사례로 볼 수 있다.

 

p.95~96

이리하여 여진인이 세운 금나라의 수도였던 북경이 다시 여진인이 세운 청나라의 소유가 됐다. <심양일기>의 저자는 북경을 정복한 도르곤의 청나라 군대가 규율을 지키는 모습을 기록했지만, 이후 전개되는 청나라의 정복 전쟁에서는 저항하는 한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정묘 병자호란 당시 조선이 겪었던 그 이상의 참극에 대한 <양주십일기>와 같은 기록은 만주인 지배하의 청나라에서 유통이 금지됐으나, 중국 남부의 상인을 통해 근세 일본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메이지유신 이후의 근대 일본을 배우고자 유학 간 한인 청년들은 이런 기록을 통해 만주인의 정복 초기에 일어난 일을 알게 되고 반청운동을 일으킨다. 역사는 참으로 기묘하고 우연히도 연면히 이어진다.

 

p.111

1683년에 청나라가 타이완 섬을 정복함으로써, 1500년대 일본 열도의 전국시대에서 시작돼 임진왜란, 누르하치의 여진 통일과 홍타이지의 대청국 건국, 정묘 병자호란, 청나라군의 산해관 돌파와 북경 함락으로 이어진 약 200년간의 연쇄반응이 비로소 끝났다. 유라시아 동해안의 이와 같은 장기 지각변동은 한반도 세력이 일본열도의 호전적 군사 세력을 막아내지 못한 데에서 시작됐으며, 타이완이 독립을 유지하는 동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반도와 타이완 섬은 유라시아 동해안에 존재하는 두 개의 중심점(pivot)이자 '약한 고리'다.

 

2015년 현재도 타이완 섬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은 긴박하다. 중화민국이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함께, 일본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센카쿠열도에서의 긴장도 높아지고 있다. 타이완 섬 인근의 긴장 관계가 한반도 주변의 긴장을 이완시키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한반도와 타이완 섬 두 지역은 유라시아 동해안의 두 개의 중심점으로서 각기 기능할 뿐 아니라 상호 연동하고 있다.

 

p.167~168

조선과 러시아군은 무력충돌하면서도 끝끝내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으며, 이들이 향후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리라고는 더더욱 예견하지 못했다. 조선에 중요한 외국은 여전히 중국과 일본, 특히 중국뿐이었다. 이를 <삼국지>에 비유하자면, 조선인은 자국을 <삼국지> 속의 위 촉 오 가운데 촉나라와 동일한 존재로 생각하거나, 위 촉 오 바깥의 '오랑캐'와 대비되는 '중화'적인 존재로서 간주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인이 진정으로 알아야 할 외국은 중국, 또는 중국과 일본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에 러시아 영국 프랑스 미국과 같은 서구 열강이 들어갈 틈은 없었다.

 

이는 일본인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일본인은 자국을 천축(인도) 진단(중국과 한국) 본조(일본)의 삼국 가운데 하나이거나, 자국을 일본열도 바깥의 오랑캐와 대비되는 중화로서 간주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일본은 러시아와의 접촉과 충돌을 통해 <삼국지>적 세계관을 벗어났으나, 한반도는 <삼국지>적 세계관을 탈피하지 못한 채 20세기를 맞이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떤 한국인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거나 미국과 중국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현대 한국의 역사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존재를 과소평가하고 미국과 중국의 존재를 과도하게 평가하는 바람에 중요한 판단을 그르치는 경우를 적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반도 통일 문제에서는 미국과 중국만이 아닌 러시아와 일본 역시 중요한 플레이어로서 기능할 테지만, 한국 일각에서는 러시아와 일본의 중요성을 저평가하는 경향이 확인된다.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도 아닌, 극도로 단순한 세계관으로 이루어진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다 보니, 한국 사람들 일부는 수많은 플레이어로 이루어진 현실 세계를 냉철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굳이 소설을 읽고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필자는 <삼국지>보다 차라리 <열국지>나 정비석의 <소설 손자병법>을 권하고 싶다. "<삼국지> 세 번 읽은 사람과는 말도 하지 마라"는 식의 주장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을 때, 한반도의 시민은 비로소 수많은 플레이어가 현란하게 얽혀 전개되는 국제관계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능란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p.169~170

오늘날 쿠릴열도 남부 섬들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이 상징하듯이, 18세기 후기에 이 지역에서 시작된 양국의 저강도 분쟁은 울치인 니부흐인 오르크인 아이누인 등의 선주민을 희생시키며 200년 이상 이어진다. 참고로 일본은 현재 네 개의 영토 문제를 안고 있는데, 그 가운데 힘을 쏟고 있는 곳이 바로 이 러시아령 쿠릴열도 남부다. 중국 타이완과 충돌하고 있는 센카쿠열도는 일본 관할, 독도는 한국 관할, 북태평양의 오키노토리섬은 일본이 관할을 주장하고 있지만 영유권 인정을 받지 못하는 환초다. 일본 정부는 쿠릴열도 남부 도서를 분쟁지역으로 국제사회에 부각시키려는 반면, 센카쿠열도가 분쟁지역이라는 것은 부정함으로써 상충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일본이 처한 이러한 모순적 상황을 파악하면 독도 문제를 고찰하는 데 참고할 수 있다.

 

p.197

현대 한국에서는 통신사가 근세 한일 양국 간의 문화 사절로서 활동한 사실을 부각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애초에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한 것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목적이 컸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을 되돌려오는 것이 그 일차적인 목적이었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발생한 힘의 공백 상태를 이용하여 누르하치가 급속히 여진인 세력을 통합하던 만주 지역의 상황을 감안해야 했다. 조선은 남북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지 않도록 일본을 달래면서 군사적 움직임을 감시하고자 했다. 일본도 조선과의 국교를 정상화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을 꺾고 일본의 주인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새롭게 수립된 정권을 외국에 인정받아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자 한 것이다.

 

p.200~201

당시 일본은 오늘날 일부 한국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류 스타'로서 통신사를 맞이한 것이 아니라, 자국의 정치적 맥락에 유리하게 해석했다. 그 맥락이란 곧 서쪽의 조선, 남쪽의 유구(오키나와), 북쪽의 아이누, 그리고 바다 건너 네덜란드가 일본에 복속됐다는 일본판 중화의식이다. 유구 왕국의 사신과 나가사키의 네덜란드동인도회사(VOC) 상관장, 그리고 조선의 통신사가 에도에 오는 것은, 일본이 중국과는 또 다른 세계의 중심이라는 일본의 세계관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여졌다. 그야말로 동상이몽의 통신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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