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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코끼리아저씨의 코는 누구에게? - 초협력사회]

by Diligejy 2018. 11. 13.

인간은 불완전한 인식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탐구하려 애쓴다. 이런 인간의 탐구는 코끼리 더듬기라는 비유를 통해 많이 회자되는데 그런 코끼리의 특징 중 가장 중요한 부위는 코끼리의 커다란 코일 것이다. 

최근에 유발 하라리나 스티븐 핑커, 제레드 다이아몬드, 대런 애쓰모글루 등은 인류의 근원이라는 코끼리에 대해서 각자 자신의 이론이 코끼리의 코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논쟁에 기꺼이 참여한 피터 터친은 자신의 이론인 '파괴적 창조'(슘페터의 창조적 파괴를 뒤집어 놓은)이론이 인류 근원이라는 코끼리의 코라고 주장한다. 

책 앞부분에서 최정규 교수는 제래드 다이아몬드나 애쓰모글루와 비교해보라고 권유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피터 터친이 노리는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아닌 리처드 도킨스와 스티븐 핑커라는 걸 깨닫게 된다. (동물학으로 박사를 받았기 떄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피터 터친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에 대해 훌륭한 이론이지만 왜 혈연적으로 관계가 없는 집단에서 협력하는지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을 말하며 심지어 과학이론도 아니라는 말까지 하고, 스티븐 핑커에 대해서는 진화심리학자들이 문화를 소홀히 다룬다며, 국가가 왜 발생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기능을 갖춰갔는지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피터 터친은 도대체 어떤 이론을 가지고 있길래 이렇게 자신감넘치게 비판할 수 있는걸까? 

어찌보면 피터 터친의 주장은 하라리의 주장에서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느껴지는데, 인류의 발전과정에서 집단 간의 전쟁은 협력을 증가시키고 이 협력에 있어서 문화는 중요한 뒷받침을 했으며 또한 전쟁을 통해 발전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 간의 경쟁과정을 통해 실제 폭력은 줄어들고, 협력의 규모는 커졌다는 내용이다. 다만, 여기서 폭력이 줄어드는 시점은 고대 국가가 성립된 이후라는 점에서 스티븐 핑커의 생각과 다르다. 스티븐 핑커는 인류의 시작 시점부터 시작해서 기울기가 -1인 선형함수처럼 폭력이 감소한다고 주장했지만, 피터 터친에 따르면 고대 국가가 성립하기까지 폭력의 횟수와 강도는 증가했으며 국가가 성립한 이래 A(로마자 alpha)자 형태로 폭력이 감소했다고 한다. 

이 폭력이 감소하는 추세는 야스퍼스가 얘기한 축의 시대 종교들과 함께 감소했으며, 이와함께 협력의 정도는 증가하고, 지배층의 권위는 정당화되었다고 터친은 지적한다. 하라리를 보았다면 익숙한 내용일 것 같다. 

지금까지 얘기를 들어봤을 때 전쟁을 일으켜야 하는 당위를 얘기하는 듯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류의 역사에서 문화가 서로 다른 집단간의 전쟁을 통해 문화가 뒤섞이고 더 효율적으로 협력하는 사회가 이기도록 자연선택이 일어났다는 얘기이지. 지금 당장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명분을 여기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피터 터친을 비롯해 애쓰모글루, 하라리, 핑커, 다이아몬드 등이 얘기하는 인류 발전의 핵심단어는 '협력'으로 모아질 수 있는데, 터친은 외부적으로는 집단 간의 전쟁, 내부적으로는 문화를 얘기한 것이고, 그것이 다른 이론보다 더 정확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진화를 해야한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는 인간이 아니다. 

이 분야 최고수들의 검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아마추어가 사실관계를 지적하기는 힘들듯 하다. 아마추어인 내가 눈여겨 보고 있는 건 피터 터친이 도킨스가 싫어하던 집단선택론을 들고 나왔고 도킨스의 주장이 과학이론이 아니라는 말까지 했기에 한 성깔 하시는 도킨스의 반박이 궁금하다는 점과 두꺼운 책 쓰기로 유명한 핑커의 대응이다. 팝콘 하나 뜯으며 관람해야겠다. 이런 논쟁은 차치하고, 이 책은 저자도 재미있게 썼고, 번역자도 잘 번역해놓은 책이기에, 텁텁한 맛 없이 읽을 수 있는 재밌는 책이다. 잠시 시간내서 아기공룡둘리 대신 인류기원탐구생활을 하고오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듯 싶다.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쓰는 서평입니다.


p.10

어찌 보면 집단 간의 경쟁은 가까운 이들을 넘어서 낯선 이들을 상대로까지 협력과 신뢰를 증진시켜낼 수 있는 적절한 문화적 해법을 찾아낸 집단에 경쟁적 우위를 부여하는 과정이었을 수도 있다.

p.19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가 아니다. 평화는 적극적인 관리를 요구하는 일이다.

p.25

뭔가를 알고 싶다면, 그것을 측정하는 법부터 배워라.

p.35

저명한 진화생물학자이자 개미 전문가인 에드워드 O. 윌슨은 그의 저서 [지구의 정복자]에서 인류와 사회적 곤충은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 지구를 정복했다고 지적한다. 일부 예외가 있기는 해도 사람의 경우 유전적으로 관계가 없는 개체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협력하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생식능력을 잃지는 않는다. 반면에 사회적 곤충은 가까운 친척끼리의 집단으로 살아간다. 반면에 사회적 곤충은 가까운 친척끼리의 집단으로 살아간다. 예를 들어 하나의 벌집에 있는 꿀벌들은 모두가 자매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생식능력이 없다. 벌집 안에서 알을 낳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여왕벌 한 마리뿐이다. 두 경로가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생물학자들은 대부분 사회적 곤충에 대해서는 진사회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인간에게는 초사회성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p.39

학자들이 늘 놓치는 부분이지만 이런 가설이 맞고 틀리고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제국들이 멸망하는 이유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p.43

물론 지형과 농업도 중요하다. 하지만 농경지가 언제 어디서 큰 국가로 발전했는지 에측하려면, 무엇보다 전쟁의 패턴을 잘 살펴봐야 한다.

p.71

과거의 역사는 실패한 국가와 제국의 잔해로 가득하다. 역사가와 역사서를 읽는 독자들은 모두 이런 저런 제국들이 무너진 이유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답을 찾기가 훨씬 더 어려운 질문이 있다. 애초에 거대 제국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는 것이다.

답은 이방인과 협력할 수 있는 제도를 발명해야 했다는 것이다. 협력이 잘 될수록 게임을 계속할 기회는 많아진다. 규모가 작은 사회가 대규모의 사회와의 경쟁으로 사라질 때에도, 협력이 잘 되지 않는 대규모 사회는 협력이 잘 되는 사회에 복속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많은 목숨이 사라졌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진화의 전형이다.

p.75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가 말한 것처럼, 위대한 문명은 살해되지 않는다 - 그것은 자살로 끝난다.

p.103

혈연선택론은 유전적으로 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집단에서 이루어지는 협력을 설명하지 못한다. 유전자 중심 관점은 군인이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며 전우를 구하기 위해 수류탄에 몸을 던지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거대한 인간사회가 협력해가며 진화를 거듭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이기적 유전자]는 여러 면에서 대단한 책이다. 그러나 한 가지를 설명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 협력하는 인간 능력의 진화다.

p.108

[이기적 유전자]와 부산물 이론에 대한 나의 비판은 흥청망청 탐욕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쭙잖게 제공한 그럴 듯한 도덕적 변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기적 유전자학'은 사실 과학이론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도덕성을 진화의 우연한 결과로 본다. 다수준 선택과 달리 그것은 실험으로 입증할 수 있는 이론적 예측을 낳지 않는다.

p.129~131

구체적인 사례로 용기 같은 개인적 특성을 생각해보자. 전장에서 맨 앞으로 나가 적과 용감하게 맞서는 전사는 위험한 기미가 보이자마자 뒤로 빠지거나 달아나는 겁쟁이보다 죽거나 부상당할 위험이 훨씬 크다. 순진한 진화론자는 용감한 젊은이가 겁쟁이보다 더 많이 죽고 따라서 결혼하여 아이를 남기지도 못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 결과 세대를 건너갈수록 용기 있는 사람이 자꾸 줄어들어 결국 자연 선택에 의해 이런 특성은 제거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찰스 다윈이 지적한 대로 용기 있는 전사가 많은 부족은 겁쟁이가 많은 부족보다 전투에서 이길 확률이 높다. 부족 간의 싸움에서 패할 경우 종족이 통째로 사라지기도 하기 때문에 반대로 용기 있는 행동이 증가하리라 기대할 수 있다.

어느 쪽이 맞는가? 다수준 선택론에 따르면 둘 다 틀렸다. 더 좋게 말해 둘 다 완전하지 못하다. 자연선택은 집단 내의 개인과 집단 전체에 동시에 적용될 수 있다. 각 부족 내에서 겁쟁이는 용감한 자보다 더 많이 살아남아 세대가 바뀔 때마다 평균적으로 그 수가 증가한다. 그러나 동시에 겁쟁이 부족은 용감한 부족에 의해 도태된다. 이 두 과정 중 어느 쪽이 더 강하게 작용할지는 세부적인 요소에 따라 달라진다. 용감함의 대가는 어느 정도인가? 전쟁은 얼마나 자주 일어나며 패배의 결과는 무엇인가? 패한 부족이 멸절되는 경우는 얼마나 잦은가? 용감한 유형의 빈도는 어떤 선택압이 더 큰지 또는 그 힘이 개인에게 작용하는지 집단에 작용하는지에 따라 증가하거나 감소할 것이다.

p.162

살상무기의 발명으로 완력보다는 기술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소년 다윗은 몸집이 작았지만 정확한 돌팔매질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이처럼 느슨해진 선택압의 결과로, 인간 남녀 사이의 크기와 힘의 차이는 대형 영장류에서 가장 좁혀졌다.

살상무기에 의해 물리적 힘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 비중에 대한 주안점은 사회적 지능에 대한 선택으로 이동했다. 공격적이고 포악한 신흥강자를 억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연합세력을 구축하는 것이다. 즉, 이상적으로는 집단 전체가 못되게 구는 놈은 죽어야 한다는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 합의를 도출하고 신흥강자의 친척에게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설득하려면 사회적 기술이 필요하다.

p.176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내가 전쟁을 가리켜 '창조적'이다 또는 '생산적'이라고 하는 것은 전쟁을 찬양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전쟁이 어떤 의미에서 좋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창조적'이라는 뜻은 전쟁이 대규모의 협력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선택압 중 하나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살상을 유발하는 집단 간의 갈등이 어떤 조건에서 창조적이고 어떤 조건에서는 파괴적이 되는가?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다수준 선택론에 눈을 돌려야 한다. 집단 간의 경쟁이 협력을 조장하고 집단 내의 경쟁이 협력을 파괴하는 것처럼, 사회 간에 벌어지는 외부 전쟁은 파괴적 창조의 힘이 되는 경향이 있고 사회 내에서 벌어지는 내부 전쟁은 단순히 파괴적이거나 이언 모리스의 표현대로 비생산적인 경향이 있다.

p.178~179

'파괴적'이라고 해서 꼭 사람들을 죽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파괴되어야 할 것은 사회를 실패하도록(비협조적이 되도록) 만들고 내부적인 평화와 풍요를 방해하는 문화적 특성이다.

p.243

오만을 버리고 겸손한 자세를 취하는 것, 이것이 신흥강자의 성공비결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위계적 사회질서가 그 대안보다 더 바람직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입증해 보이는 것이다.

p.274

많은 군주들이 지배계급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 쪽으로 다스리려고 노력했다. 이런 뚜렷한 시류의 전환은 지중해와 근동지방과 인도와 중국 등지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어찌된 영문일까?

간단히 말하자면 그 답은 종교에 있다. 그보다는, 종교에다가 아주 많은 전쟁을 더한 것이랄까. 일반적으로 이 둘의 조합은 인류의 번영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역사를 통틀어 종교와 전쟁의 조합은 언제나 참혹한 파멸을 초래했고 그 점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물론 대제국의 발흥이 평화적으로 진행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몇 세기 동안 구세계에서 전쟁과 종교는 힘을 합쳐 그때까지 세계가 보았던 폭력의 물결을 크게 되돌렸다.

p.289

군사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아마추어는 전략을 말하지만 프로는 병참을 연구한다." 적진으로 뛰어드는 기병의 돌격은 무모한 행위지만, 역사에는 그런 영웅적 행위가 넘쳐난다. 군대에 식량과 탄약을 보급하고 진창을 헤치고 전장에 도착하는 과정에 대한 복잡한 세부 내용은 이보다 훨씬 지루하고 이런 부분에 시간을 들이게 만드는 책은 인기가 없다(리벤의 책은 아주 기분 좋은 예외지만). 그러나 하나의 집단이 다른 집단을 누를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병참이다. 사실 내연기관이 발명되기 전에 군대와 보급품과 대포를 빠르게 이동시키고 적의 위치와 움직임을 정찰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은 말 등에 올라타는 것이었다.

p.302

이제 당신이 나 같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해도, 논의의 진행을 위해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어떻게 신에 대한 믿음이 전파될 수 있을까? 대규모 익명 사회의 문제는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 심지어 평판도 들은 적이 없는 사람을 믿을지 말지를 끊임없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낯선 사람을 무작정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낯선 사람이 거대한 신들을 열심히 믿는다면 그는 당신을 속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예를 들어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는 형벌을 받거나 지렁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테니까. 따라서 도덕적이고 전지전능한 응징자에 대한 신앙이 뿌리를 내린 큰 집단은 신을 믿지 않는 집단보다 더욱 협력적이 된다. 규모가 작은 사회에서 사람들은 아는 사람이나 이웃이 보고 있기 때문에 친 사회적으로 행동했다. 규모가 큰 익명 사회에서는 신이 보고있기 때문에 선해야 한다. 

p.316

초사회성의 진화를 추진하는 것은 폭력, 즉 서로 전쟁을 하는 사회이고 궁극적으로 폭력을 줄이는 것도 초사회성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역동성과 관련하여 '외인적'인 것은 전혀 없다.

p.322

민족주의와 종교가 많은 비극을 초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긍정적 측면까지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진화가 대규모 사회를 조성할 때 사용하는 재료를 일부 제공한다. 포스트 차축 유형의 민족주의와 종교는 '상상의 공동체', 즉 서로 잘 몰랏지만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과 협력하게 되는 대규모 집단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사회 규모가 커지면 전쟁이 치열해지지만, 폭력의 상대적 강도는 약해진다. 그렇게 민족주의와 종교는 집단 간의 갈등과 집단 내부의 협력을 동시에 증가시켰다. 중요한 것은 협력의 규모가 커지면 사상자의 상대적 비율이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p.331

중요한 것은 누구의 아이디어가 옳은가가 아니라 그것이 생산적인가 하는 점이다. 생산적 아이디어는 자료와 대조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과 가설을 만들어낸다. 자료는 일부 가설을 무너뜨리거나 수정하도록 요구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 과정을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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