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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지독한 하루

by Diligejy 2017. 8. 7.

p.12

과학의 순간이지만 유일하게 과학의 손에 맡길 수만은 없는 그 순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불분명한 분절에 선을 그어 그를 망자로 만들고 무조건 슬픔을 들이켜야 하는 순간, 나는 앞으로도 그 순간의 명명을 언제나 고민하고 고뇌하게 될 것이다.


p.18

"급성심근경색은 5분 내에 전화 주시기로 하지 않았나요? 이 사람 온 지 한 시간이나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간암 말기여서 암성 통증과 혼동했습니다."

"아니, 명치가 아프다고 했으면 그건 심근경색의 주요 증상인데, 심전도부터 확인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심장만 보는 주치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몇 백명의 환자가 계속 몰려와 각종 증상을 늘어놓는 응급실에서는 필연적인 우연처럼 이런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p.46~47

그때 내 뺨을 때렸던 사내가, 불량스러운 걸음걸이로 응급실을 활보하고 있었다. 그렇게 악랄한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니 놀랍고도 두려운 마음에 스테이션에 물었다.


"아니, 아까 경찰, 경찰 있었잖아요. 경찰이 분명 다 봤는데, 저 사람 안 잡아갔어요? 왜 아직까지 저 살마이 활보하고 있는거죠?"
"경찰은 진작에 갔어요. 환자 보호자이고, 당사자가 고소하지 않을 난동이니, 훈방조치래요."


p.48~49

응급의학과는 의사들이 가장 선호하지 않는 과로 꼽힌다. 그리고 응급실은 흔히 지옥에 비유된다. 밤을 새우는 과중한 업무강도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응급실에서는 사회의 치기 어린 난동이나 폭언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폭행이나 폭언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다고 대답할 응급실 근무자는 단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뻔히 알고도 응급실 근무로 뛰어들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의료진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단순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구타당한 사건이 아니다. 나는 당시 응급실을 책임지는 유일한 주치의였고, 항거 불능 상태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진료가 불가능한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더불어 내가 들고 있던 바늘이 환자를 꿰뚫어 죽일 수도 있었다. 또한 내가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을 때, 그 환자를 포함해 더이상 치료받을 수 없는 옆 사람, 그리고 그 옆 사람들이 차례로 죽어나갈 수도 있었다. 이것은 나 개인의 안전을 넘어 많은 이들의 안전을 담보로 한 끔찍한 폭력이었다.


의사는 환자를 이해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환자의 주변 환경과 보호자들까지도 따뜻한 마음으로 이해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지금껏 내게 벌어졌던 난동과 폭언을 최대한 헤아리려 한다. 하지만 병원 내 폭력에 관한 인식이 아직 제자리걸음인 것은 안타깝다. 병원 내 난동은 약자인 환자와 보호자가 강자인 의료진에게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폭력으로 인지되고 있다. 2016년 5월 의료인폭행가중처벌법이 간신히 통과되었지만, 그후로도 폭행 피의자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은 일은 거의 없다. 현장에서 공권력은 대개 방관하고, 현실적으로 환자를 이해해야 하는 의사가 처벌이나 실형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아직도 의료진은 그 무차별적인 폭력 상황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p.91~92

폭발이 일어난 순간부터 그들의 옷가지와 육체는 동시에 불타오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그 불길은 전신의 겉면을 사정없이 구웠을 것이다. 나는 잠시 불길과 인간의 몸이 만나는 장면을 떠올렸다. 왜 이 사람들은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을까. 왜 어떤 불길은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불타오르지 않고, 인간의 육체를 집어삼키곤 이렇게 비참한 존재를 내뱉는 것일까.


p.95

우리는 책날에 손이 베여도, 속이 더부룩해도 아프다고 말한다. 그리고 별안간 운명이 자신의 전신을 불로 지져도 아프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언어 세계에서 온 것 같은 '아프다'라는 단어. 온몸이 검게 불타버린 사람이 내뱉은 말이 고작 "아파요"가 다였다. 그러나 자신이 너무 아프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그리고 평생 이렇게 '아플' 것임을 알아차릴 정도로 사리분별이 되면, 당연히 죽고 싶을 것이다. '절 죽이세요......' 안 돼, 그딴 생각은 안 돼. 나는 소리쳤다.


p.101

내가 본 것이 유일한 사망자라 가정하면, 내일 신문기사에는 이 도시에서 벌어진 재난으로 한 명이 사망하고 여섯 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실릴 것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이 옮겨 간 병원에서 우울증에 빠지고 삶을 포기하며 전신에서 진물을 흘리다가, 신부전이나 다발성장기부전이 찾아와 결국 사망하더라도 신문엔 관련 기사가 한 줄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또다른 인간의 고통이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끌 것이 분명할 테니까.


일상생활의 비루하고 오물과 피가 묻은 더러운 치열함과 아무것도 없이 새햐얀 종이에 깨끗하게 작가의 손에 의해 정제된 문장, 

이 두 관념의 괴리가 너무나도 커서 책을 읽다 어지러움을 느꼈다.


p.109~111

최근 '소방공무원을 지방직에서 국가직으로 전환하자'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일견 우리는 왜 소방공무원이 현재 국가직이 아닌지, 혹은 왜 당연히 국가직으로 전환되지 않는지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국가직이란 국가에서 임용해 국가기관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고, 지방직은 시 도에서 임용해 지방기관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입니다. 현재 소방관은 지방직이므로 시 도에서 임용해 지방기관에서 근무하지만, 범국가적 조직인 국민안전처 소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체계가 일원화되지 않은 채, 국민안전처의 명령을 받으면서 시 도의 지시까지 받아야 합니다. 이는 특별한 예짐나, 지자체는 자신들의 명령체계에서 소방조직을 독립시키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자체 행사에 비번인 소방관이 불려나와 의자에 쌓인 눈을 닦고, 도지사가 개인 업무를 위해 소방 헬기를 부르는 등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인력이나 자원의 배분 문제가 발생합니다. 국가직이 아니므로, 국가에서 내려온 예산을 지자체가 자의적으로 소방 부문에 편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부유한 지자체일수록 안전 문제에 편성할 여유가 많겠지요. 그래서 서울이나 경기 등 부유한 지자체의 소방 예산은 넉넉하고, 지방으로 갈수록 당장 티 나지 않는 안전 부문의 예산은 줄어듭니다. 그러다보니 인구는 적은데 맡아야 할 반경은 넓어지고, 지방일수록 인력이 부족합니다. 서울의 구급차에는 평균 3명이 타고, 지방의 구급차에는 평균 1.7명이 탄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원칙상 구급차의 탑승 인원은 3명이 맞지만, 지방엔 구급차 4대를 본유한 소방서에 근무 소방관이 5명인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애초에 보유한 차가 전부 출동할 수 없는 이상한 구조입니다.


또한 이 말은 한 명이 구급차를 운전한다고 했을 때, 심페소생술을 할 사람이 0.7명에서 2명까지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에서 당연히 지방으로 갈수록 심정지 환자의 소생 확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력 채용뿐 아니라, 급여도 지자체에서 지급하다보니 지방에서는 수당을 줄 예산이 부족해 억지로 퇴근시키거나 심지어 체불하는 경우도 있고, 복지 수준도 당연히 서울과 차이가 납니다. 게다가 체계가 일원화되어 있지 않아 인력이나 장비를 유동적으로 재분배하는 일도 불가능합니다. 여름 휴가철 바닷가나 봄가을 명산 근방의 대원들은 훨씬 더 바빠질 것이 분명하지요. 하지만 인력충원이라곤 없어 대원들은 그저 과로에 시달리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정직 공무원, 즉 직무의 특수성을 인정해주는 공무원은 우리나라에 약 50만 명이 있습니다. 군인, 경찰, 검사, 법관, 소방관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중 국가직은 약 46만 명이고, 우리나라의 소방관은 4만여 명입니다. 국방, 치안, 안전 중 지방직으로 남은 특정직 공무원 부문은 안전뿐입니다. 국가적으로 관리되지 않는다는 뜻은 가령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은 경찰병원과 국군병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겠지만, 소방병운은 들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방 조직은 전면적인 국가 관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소방관들의 안전을 관리하는 전담병원이 없다는 것은 그 업무의 강도나 특성을 비추어볼 때 타당하지 않습니다.


일견 당연해 보이는 소방관의 '국가직 전환'은 현실적으로 요원합니다. 일단 소방관이 지방직으로 남아 있을 때 권력을 누리고 이권을 행사하는 이들이 반대하고, 자원이 풍족한 시 도나 그곳 주민들은 적극적으로 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피해를 입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미미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절박한 사람들은 사회의 변방에 밀려나 있습니다. 정복 차림으로 피켓을 들고 거리에 나와 호소하는 소방관들의 목소리가 매번 대중에게 잊히고 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은 안전에 관한 문제입니다. 고통받는 약자에게까지 소방 조직의 힘이 충분히 닿도록 하는, 어쩌면 사회의 분배와도 직결되는 안전의 문제입니다. 안전과 생명에는 빈부 격차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최근 발의된 '소방공무원 국가직 전환 법안'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국회에서 통과되길 바랍니다.


p.156~157

애초에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한가'라는 질문이 생긴 것은, 모두가 죽음을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일제히 한날한시에 태어나 동시에 죽지 않는 한, 죽음에 관한 난상토론은 계속될 것입니다. 또 어차피 죽음이란 결국 피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종류의 것이라면, 처음부터 죽음의 평등함에 대한 이분법적 질문은 무의미한 것 아닐까요? 그럼에도 그 당연한 질문이 제 안에서 자꾸만 고개를 듭니다. 그렇기에 저는 오늘도 이렇게 죽음에 관해서 쓰고 있습니다.


p.174~175

중증장애아를 키우는 일은 배움의 연속이더군요. 휠체어를 태우는 방법, 기침을 시켜 폐렴에 걸리지 않게 하는 방법, 사레들지 않게 밥을 떠먹이는 방법 등을 배워야 헀고, 아이의 요도에 소변줄을 넣어서 소변을 빼는 방법과 항문을 긁어 대변을 보게 하는 방법도 배워야 했습니다. 움직이지 못해 장작개비처럼 마른 사지도 조금씩 자랐고, 아이는 남들처럼 세상을 깨우치기 시작했습니다. 집 안에서만 보호받는 삶을 살게 하기 싫어서, 저희는 장애학교를 알아보고 곧 아이를 등하교시켰습니다.


아이가 커가는 것은 행복이었지만, 자라는 아이를 돌보는 일은 솔직히 힘에 부쳤습니다. 그래도 착하기만 한 아이가 아빠를 위로해줘서 조금 살 만했습니다. 하짐나 저는 일반적인 직업을 가질 수 없엇습니다. 가끔씩 들어오는 몸을 쓰는 일 외에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 돌보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생활한 지 10년이 넘자 몸에 무리가 갔는지 원래 안 좋던 허리가 더 나빠졌습니다. 최근에는 뼈마디가 심하게 아파서 동네 병원에 갔더니, 류머티즘 같다며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더군요. 오늘은 대학병원에 가는 날입니다.


p.191

지독한 예감은 인간을 물들이고 곧 온몸을 굳게 만든다. 그리고 그 기척은 감정을 지닌 인간이라면 명민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곧 여느 대와 다름없이 느릿느릿 자동문이 열렸으나, 그것이 새로운 비극이 도착했다는 신호임을 알아채고는 모두가 그 방향으로 일제히 뛰었다.


p.211~212

2016년 8월 건강보험공단의 흑자는 20조 원이 넘었다. 이는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분야에서 수가를 낮췄기 때문에 가능했다. '외상'은 대표적으로 보험 적용이 되는 분야이고, 많은 처치가 급박하게 이루어지므로 환수가 쉽다. 수가 자체도 낮은데다 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전문의도 많이 없으며, 보험 적용은 더 엄격하다. 이런 경제 논리 때문에 진짜 외상을 다루는 의료 분야에는 아무도 지원하지 않으며, 체계도 부실해지고 있다. 정부는 외상센터를 건립하고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지만, 수가 시스템에서 비롯된 문제의 근원은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나라에선 1년에 3만 명이 외상으로 죽는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외상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과 의사가 떼돈을 벌 수 있다면, 지방 어디서든 외상외과 의사가 여러 명 상주해 누군가 다치면 곧바로 투입되어 보호자는 그저 환자를 살려내기만을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본다.


이 사건 이후 보건복지부가 가장 서둘러서 한 대처는 놀랍게도, 책임 소재가 있는 전북대병원의 권역응급의료센터와 전원을 받지 않은 전남대병원의 권역외상센터 지정을 취소한 것이었다. 나는 이 문제의 근원은 입안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시각을 바꿔야 훨씬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그들은 의료계 전반에 강력한 통제를 가하는 시스템을 구축해놓았으며, 2012년 이후 부랴부랴 외상센터의 기준을 확립하고 투자해왔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이 시스템하에서 일하고 있었다. 보건복지부가 투자하고 5년 남짓 시스템을 만들었음에도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면, 시스템에 어떤 문제가 산재해 있으며, 재발하지 않을 개선 방안은 무엇이고, 추가로 어떤 투자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지 검토하는 것이 정책 입안자가 응당 취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실무자를 보조금으로 압박하는 방식을 취했다.


당장은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강력한 의료통제하에서 지원금을 끊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으므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사건이 재발해서 불이익을 보는 일'만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 어떻게든 당장 문제를 일으키지만 말자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된다. 당장 입안자들에게는 책임을 회피하면서, 문제를 잠잠하게 만드는 좋은 방식이지만, 문제의 근원은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다. 게다가 처음부터 '소아 중증외상'에 대한 권역의료센터 선정 기준은 명확히 세워져 있지 않았고, 전북대병원은 그 모호한 기준에 맞춰 일했을 뿐이다. 권력응급센터 선정이 취소되자 당장 전라북도의 권역응급센터는 공석이 되었다. 이 때문에 현장은 망가지고 퇴보했으며, 어김없이 다른 시스템을 갖추기 위한 비용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것이 좋은 해결방식인가. 지우너금이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었고, 무엇이 얼마만큼 개선되었으며, 어떤 미비점이 있어 아이가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는가에 따른 대책을 논의하는 편이 종합적으로나 점진적으로 전국의 중증외상 환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근본적인 해결 없는 임시방편은 '전국 어디서든 외상환자를 살린다'는 모토가 무색하게, 시스템의 미비로 인해 사고가 날 가능성을 여전히 남기고 있다.


중증외상 환자는 끔찍한 상황과 마주하게 된 이들이다. 환자는 죽음 직전의 고통에 계속 발버둥친다. 수술을 한다고 해서 고통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외과의사가 수술했으니 나아질 것이라고 믿으며 고통을 참는 것이다. 어떠한 조치도, 희망도 없이 마냥 응급실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중증외상 환자들은 가만히 보고 있기에도 너무 안타깝다. 어떻게든 수술방에 들어가서 고통을 덜어주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우리나라 외상환자 시스템은 여전하다. 2017년에도 한국에서 교통사고가 나면 다름아닌 시스템 문제로 인해 사람이 죽는다.


p.214~215

"우린 너무 사랑하잖아요. 정말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라면, 서로가 서로를 더이상 찾지 않게 어느 날 딱 붙어서 한몸이 되어버리면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우리가 하나가 된다면, 다시 혼자여서 외로울 거요."


p.234

나는 생각했다. '만약'은 없다. '만약'이 없을 수 있게, 도저히 생각조차 나지 않아 내가 내뱉은 말에 어떠한 가책도 느끼지 않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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