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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유혹의 학교(2)

by Diligejy 2017. 7. 26.

p.61~62

결핍을 안고 세상에 도착한 인간은 최초의 분리 대신 최초의 유혹을 선물받는다. 유혹은 경계의 형성과 함께 시작한다. 나와 너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첫 번째 경험은 엄마의 몸으로부터의 분리일 것이다. 따뜻한 자궁을 벗어나서 자신의 존재를 외부로 내던지는 절박함은 어미의 따스한 손길과 눈빛으로 보상받는다. 어미는 넉넉한 품과 먹이로 아이를 유혹하고 아이는 보드라운 살갗과 온전한 내맡김으로 어미를 유혹한다. 그 자체로 완결된 유혹의 자장이 무너지는 것은 아이의 성장이요 어미로부터의 분리요 또 다른 세상의 발견이다.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새로운 유혹의 기술을 깨닫고 익히고 발휘한다. 유혹자로서의 자아를 발견하고 유혹의 활동에 당연해지는 것은 한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의 일부이다. 고유한 매력은 저절로 탄생하지 않는다. 남과 내가 다르다는 차이를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때로는 출산의 과정처럼 경계를 허물고 뚫고 흔들고 통로를 발견하고 만나고 겹쳐지는 과정을 통해 단련되고 다듬어진다.


p.65~66

<유혹의 심리학>에서 심리학자 파트릭 르무안은 유혹은 상대방을 새로운 세계로 입문시키는 것이며 최선의 경우 상호적인 입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유혹에 응한다는 것은,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줄 것이라는 행복하지만 불안한 상상을 실현하는 일이다. 선악과를 베어 물듯 자신의 세계를 걸고 하는 도박과도 같다.


이와 같은 유혹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유혹이 번식과 진화, 문명 발달에 직접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유혹은 막강함 사명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제 생활에서 벌어지는 유혹은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공감과 연민, 더 나아가 설득의 소통 과정에 가깝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고 상대에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며 더 크고 더 세밀한 소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다.


우리는 때로 시작도 하기 전에 유혹의 결과를 염려한다. 거절의 두려움은 우리를 주춤거리게 한다. 인간은 때로 폭력과 침범, 재화의 지불을 통해 유혹 행위를 대신하기도 한다. 하지만 유혹하지 않아도 지불을 통해 타인의 호감을 살 수 있는 세상은 무력함을 넘어서 폭력적이다. 난입 혹은 재화로 착취하는 매혹은 종국에 쌍방 모두의 존엄을 파괴하고 타인에게 다가서고 다가오는 길을 손상시킨다. 관계 맺기의 주요 단계인 유혹의 과정이란, 타자성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탐험하는 일이다. 다름을 상상할 수 없어 넘어섬이 당연해지고 존엄의 가치를 대화를 통해 동일화할 때, 개인의 얼굴은 사라지고 인간 전체의 가치는 진열장의 상품철머 대체 가능해진다. 유혹에는 타자성의 존중과 깨달음의 에너지가 있다. 평화로운 소통에의 매력적인 모델이자 오래도록 익혀온 존재 방식이기도 하다.


p.75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는 섹스 풍습의 전환과 함께 20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자본으로 '에로스 자본'을 들었다. 섹스는 결혼의 제약에서 해방되었고, 좀 더 다양하고 자유로운 경험에 노출되는 것은 미덕이 되었다. 매력과 섹시함은 곧 재화이고 우리는 그 가치를 시장에서 매기고 확인받는다. 그러나 재화는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소외받은 자를 위한 구제 제도 같은 것도 없다. 연애의 자유경쟁시장은 선택의 폭을 확장했지만, 선택의 기회비용도 불려놓았다. 일루즈의 두 권의 책 제목대로 '사랑은 아프고 불안하다'. 실패의 책임은 개인의 몫이건만, 경쟁은 사회 조건과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p.76~77

우리는 왜 연애를 하는가? 세상에 단 한 사람으로 당신 앞에 우뚝 서고 싶은 바람 때문이 아닌가. 사랑의 윻고은 상대와 나를 유일무이한 대상으로 놓지 않을 경우 이루어지기 어렵다. 노골적인 계약이나 사전 동의를 거치지 않은 이상 우리는 유혹에서 특별함을 예견하려 하고 유혹은 거짓말을 수반한다. 유한한 삶 속에서 당신과의 영원을 꿈꾸고, 수십억 인구 중 당신만이 유일하다고 말한다. 유혹은 매력의 자유경쟁시장을 감히 속이는 시도, 당신의 거짓말을 믿고 함께 속삭이는 일, 추락과 상처라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기꺼이 저 매혹의 다리를 건너는 일이다.


p.80~83

바람둥이에게도 도덕은 있다. 물론 참바람둥이에게만 존재하는, 난봉꾼과 비교되는 도덕이다. 

첫째, 상대의 기뿜에 집중한다. 어디에 있든 누구를 만나든 최선을 다해 즐거움을 안겨준다. 참바람둥이에게 세상은 커다란 무대와도 같다. 그들은 순간의 매혹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상대를 사로잡는 역할에 최적합한 인물들이다. 그들의 성실함은 상대에 따라 역할이 달라지는 맞춤형 연애를 가능하게 한다. 바람둥이는 사소한 경험에도 배움을 얻고 새롭게 해석하고 과감히 활용한다. 자신의 한계와 매력을 알고 이를 돋보이는 법을 깨친 자이기도 하다. 거듭되는 변신에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면, 제대로 선수라고 불릴 만하다. 탁원한 센터링 능력은 경이로운 순발력과 깊고 넓은 성찰력을 바탕에 둔다. 이에 섬세한 감수성을 더하여 상대방을 파악하고 배려하니 불쾌한 상황은 방지하고 상대가 스스로 다가오게 한다.


둘째, 거짓말은 오직 즐거움을 위해 사용한다. 변치 않는 사랑이라든가 이룰 수 없는 약속 따위를 담보로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미끼로 상대를 유혹하는 일은 그들의 자부심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는 그들을 진실함의 경지에 올려놓기까지 한다. 바람둥이에게 성취란 주어진 패를 잘 활용하여 얻는 것이다. 의도치 않은 고통은 유혹의 실패를 의미한다. 연애에 가장 큰 상처를 남기는 자는 사랑의 환상을 자극하고 관계에 오지 않을 미래를 투영하여 마음을 얻으려는 사람일 때가 더 많다.


그러나 서로 다른 형태의 연애를 추구하여 상처받는 일까지 모조리 막을 수는 없다. 상처받고야 마는 것은 연애의 필연일지 모른다. 선택할 수는 있다. 죽음을 보고 인생을 살지 않듯 실연을 두고 연애하지 않는다. 아직 오지 않은 상처를 걱정하기보다는 현재에 집중하는 편이 좋다. 유혹자는 순간의 즐거움을 함께 누릴 적절한 동반자이다. 연애는 우리를 언제나 슬기로운 방향으로 이끌지는 않지만, 다행히도 경험과 배움을 남길 수 있다. 우리는 좀 더 경험에 여유로울 필요가 있다. 


셋째, 바람둥이는 순간의 예술가이다. 누구보다 집중력이 뛰어나다. 함께 있는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이다. 당연한 메뉴얼을 따르지 않으면서 당신보다 반 발짝 정도 앞서 상황을 파악한다. 때로는 나서서 이끌거나 의외의 방향으로 틀어 당신을 즐겁게 한다. 세상을 당신의 눈으로 바라볼 줄 알면서도 거기에 조금 다른 시각을 보탤 줄도 안다. 당신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또 자극받는다.


넷째, 바람둥이는 당신의 특별함을 재발견해준다. 매혹은 캘수록 계발되는 자원과 같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 매혹적 존재로 거듭나는 일은 황홀한 경험이다. 잊지 못할 추억은 물론 앞으로의 연애에 쓰일 훌륭한 연료가 될 수 있다. 바람둥이의 대명사로 불리는 카사노바는 여성마다 자부심을 일깨우고 그들의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는 여성의 삶에 선물과 같은 존재로, 딱 그만큼의 무게와 기쁨으로 남는 법을 알고 있었다.


다섯째, 바람둥이는 멋진 친구가 될 수 있따. 이성과 친구가 되는 일은 연인이 되는 일보다 더 까다로울 수 있다. 진심으로 관계를 즐길 마음이 없다면 시도조차 쉽지 않고 유지 또한 피곤하다. 여기에 바람둥이의 가장 훌륭한 사용법이 있다. 원하는 것을 강요하지 않고 상황을 여유롭게 이끌 줄 아는 그들은 길고 넓은 시야로 관계를 조망한다. 감정에 쉽게 놀아나거나 허투루 헷갈리지 않는 만큼 만남은 고유한 길을 찾아나간다. 그들의 창조성은 관계에서 빛을 발한다. 당장의 연애만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매혹에 기꺼이 움직인다. 우정은 다양한 형태를 지닐 수 있고 뜻밖의 순간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가장 관능적인 사이는 때로 겉으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관계이다. 가능성이 미지의 함수로 남아 있는 그들과의 우정은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다.


p.87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라 그를 구성하는 세계였다. 그가 내게 전부를 할애하지 않는 것은 그를 더 사랑하는 이유가 되었다. 나 역시 그와 그의 세계를 품을 만큼 성장하고 싶었다. 사랑의 시작은 그토록 경이롭다. 세계가 열리고 겹치고 함께 커져가며 풍경을 바꿔가는 일이다.


p.90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세계를 만들고 가꾸고 넓혀나간다. 유혹은 그 세계가 만나고 연대하고 때로는 중첩되고 확장되는 경험이다. 연애의 경험이 벅찬 이유는 천지가 개벽하고 세계가 새롭게 열리는 것을 온 존재로 다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립된 밀실을 전제로 한 유혹은 결국 막다른 골목에 이를 뿐이다. 더는 갈 곳에 없어진 뒤 남은 일은 서로를 갉아먹고 파괴하고 소진하는 거다. 그러므로 유혹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편이 좋다. 광장은 멋진 데이트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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