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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일본소설

은하영웅전설 3

by Diligejy 2022. 3. 17.

p.28

지금 율리안 민츠는 생애 최초로 적을 물리친 것이었다. 그것도 아마 백전연마의 조종사였을 것이며, 분명 그동안 수많은 아군이 그의 칼날에 쓰러졌으리라. 첫 출전한 애송이 때문에 인생의 막을 내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

 

흥분이 몸 안쪽에서부터 체세포를 태우는 듯했으나, 용암의 열류 속에 우뚝 솟은 바위처럼 율리안의 마음 한구석에 싸늘한 부분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쓰러뜨린 적은 어떤 사내였을까. 처자식이 있었을까. 아니면 애인이...? 한 대의 발퀴레는 한 병사의 인생으로 이어지며, 그것은 무수히 가지를 쳐 사회 한구석까지 뻗어 나간다.

 

이것은 감상이 아니다. 한 인생을 아무런 권리도 없이 끊어버린 자가, 자신에게도 그 순간이 찾아올 때까지 뇌리에 새겨놓아야 할 마음인 것이다.

 

p.49

"체제가 민중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두 가지만 있으면 된다. 공평한 재판과, 마찬가지로 공평한 세금 제도. 오직 그뿐이다."

 

이 발언은 라인하르트가 전쟁 천재임과 동시에 통치 천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설령 그것이 개인의 야망에서 비롯되었다 할지라도, 민중이 바라 마지않던 것은 바로 그 두 가지였다.

 

p.119

일류 권력자는 권력으로 무엇을 해낼 것인가에 목적을 두지만, 이류 권력자는 권력을 계속 유지하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p.140

"국가, 조직, 단체. 무어라 형언해도 좋습니다만, 인간 집단이 결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지요."

"호오, 그것이 뭐지?"

"적입니다."

p.148

잃어서는 안 될 것을 잃으면, 사람은 바뀔 수밖에 없으니까.

 

p.155

역량 없이 유산을 물려받은 자는 그에 합당한 시련을 받게 마련입니다. 이를 견디지 못한다면 멸망할 뿐.

 

p.167

권력자에게 타인의 생명만큼이나 값싼 것은 없다. '작은 목숨'이라고 당당하게 말한 것은 그들의 본심일 것이다. '한때의 지출'이란 것도 이미 몇 세기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모두 일반시민들이 부담하고 있으며, 그들은 거만한 얼굴로 남의 돈만 분배할 뿐이다.

 

p.168~169

경제 문제로 비롯된 수요가 정치 통일을 촉구한 예는 역사상 수도 없이 존재한다.

 

칭기즈 칸의 몽골 제국이 거대한 통일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실크로드를 왕래하는 교역상인들이 그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가도를 따라 점점이 놓인 오아시스 하나하나가 독립된 소국일 경우 가도 전체 치안이 유지되기 힘들다. 게다가 각국이 마음대로 교역세며 통행세를 거둬 가니 영 채산이 맞질 않았다.

 

그들은 한때 호라즘 제국에 기대를 걸었으나, 황제가 무능한 데다 탐욕스러운 데 실망해, 종교에 대한 관용, 강대한 군사력, 동서교역 중요성을 이해할 능력 세 가지를 겸비한 칭기즈 칸을 지지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들은 칭기즈 칸에게 자금, 정보, 무기 및 제조기술, 식량, 통역, 징세 노하우 등 온갖 것들을 제공해 그의 정복활동을 도왔다. 순수한 군사 행동을 제외한다면 그들 교역상인의 공적 덕에 몽골 제국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교역상인들 중에서도 위구르인은 특히 협조했다. 훗날 그들은 몽골 제국 재정과 경제면을 지배해 사실상 제국 그 자체를 운영했다. 겉은 몽골 제국이지만 속은 위구르 제국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p.171

국가란 인간의 광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국가가 주체가 되면 아무리 추악하고 비열하고 잔악한 행위라 해도 사람들은 이를 쉽게 용납한다. 침략, 학살, 생체실험과 같은 악업이 '국가를 위해'라는 변명 한마디에 때로는 칭송마저 받는다. 이를 비판하는 자가 오히려 조국을 모독한다고 공격을 받기도 한다.

 

국가라는 것에 환상을 품는 사람들은, 우수한 능력을 가지고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위대한 인물이 국가를 통치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것이리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다. 국가권력 중추에 위치한 인간이 일반시민보다도 사고력이 유치하고 판단력이 불건전하며 도덕수준이 열악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물론 일반시민보다 확실히 뛰어난 것이 있다. 권력을 추구하는 열정이다. 그것이 플러스 방향으로 작용할 경우 정치와 사회를 개혁하고 새로운 시대의 질서와 번영을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지만, 이런 사례는 전체의 1할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 왕조의 역사를 보았을 때, 그것은 대부분 당대에 이룩한 것을 십여 세대에 걸쳐 좀먹는 과정일 뿐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왕조와 국가는 매우 끈덕지고 강인한 생명체여서, 몇 세대에 한 사람 꼴로 위인이 나타난다면 세기 단위로 수명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p.180

한 인간은 역사를 구성하는 작디작은 일개 요소에 불과하지만, 미래로 통하는 무한한 갈림길 속에서 하나만을 선택해 현실로 확정짓고, 상호 관계를 맺어가며 무수한 소우주를 형성해나가는 모습은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운명의 손길이 얼마나 절묘한지를 찬미해야 할까.

 

p.183

국가 따위 멸망해봤자 재건하면 그만이다. 한 차례 멸망했다가 재건된 국가는 얼마든지 있다. 물론 재건되지 못하고 사라진 국가가 훨씬 더 많지만, 그것은 역사상 역할을 이미 마치고, 부패하고, 노쇠하고, 존재할 가치를 잃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멸망이 비극을 초래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유는 많은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지킬 가치가 없는 국가를 불가피한 멸망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고 믿으며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그 희생이 아무런 보답도 받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처절하기 짝이 없는 희극이다. 존재할 가치가 없는 국가가 지옥으로 떨어지면서, 살아 마땅한 사람들을 시기해 길동무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최고권력자는? 무수한 죽은 이가 그의 이름을 외치며 전장에서 쓰러져 가는 것을 깡그리 잊은 채 적국 귀족이 되어 풍요로운 여생을 보내는 자마저 있다.

 

p.215

인내와 침묵이 모든 상황에서 미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참지 말아야 할 때 참고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다면 상대는 한없이 기고만장해져 자신의 이기심이 그 어떤 경우에도 통용된다고 믿게 될 것이다. 젖먹이와 권력자의 생떼를 오냐오냐 받아주어서는 좋은 결과를 볼 수 없다.

 

p.216

인간의 행위 중에서 가장 비열하고 파렴치한 행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권력을 가진 자, 권력에 꼬리를 치는 자가 안전한 곳에 숨어 전쟁을 찬미하고 타인에게는 애국심이며 희생정신을 강요해 전장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p.280

수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영웅이나 위인의 권력을 제한했을 때의 불이익보다도, 범용한 인간에게 지나치게 강대한 권력이 돌아가지 않도록 제한했을 때의 이익이 훨씬 크다. 그것이 민주주의 원칙이다.

 

p.320

이게 바로 명장이 싸우는 모습이란 거다. 명확한 목적을 세우되, 이를 달성하면 집착하지 않고 이탈하는 것. 장수라면 저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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