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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항해시대(1)

by Diligejy 2016. 7. 5.

p.5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근대 해양 세계의 팽창이다. 비교적 고립되어 발전해왔던 각 문명권들은 15세기 이후 외부 세계를 향해 활기찬 해상 팽창을 시도하였다. 세계의 여러 지역들이 바다를 통해 접촉하고 교류하는 가운데 전 지구적인 해상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 이를 통해 사람들과 상품만이 아니라 가축과 농작물, 혹은 다양한 생태계 요소들이 먼 바다를 넘어 전달되었고, 지식과 정보, 사상과 종교가 교환되었다. 그러나 해양 네트워크의 발전은 단순히 상호 교류의 수평적인 확대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상호 접촉과 소통은 곧 갈등과 지배로 이어지고, 그것은 곧 세계의 수직적인 구조의 형성으로 귀결되었다.


p.7

15~18세기만 해도 유럽은 아직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지구적인 네트워크는 전 세계의 문명권이 참여하여 만든 것이지 유럽의 힘만으로 된 것은 아니다.


p.7

유럽중심주의를 수정한다는 것은 유럽의 활동 상황을 아예 부정한다거나 유럽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과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거기에 맞춰 의미를 부여하는 '신화적인 인식틀'을 수정하는 것이다.


p.10

중국의 '해상 후퇴'와 유럽의 '해상 팽창', 이것이야말로 근대사의 발전에서 결정적인 구조적 전환의 계기가 아니었을까?


p.12

세계가 긴밀하게 연결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경제적 정치적 구조가 짜여질 때 이것을 원활하게 만들어 준 것이 귀금속과 화폐였다. 이러한 세계적 화폐 현상은 단순히 상품과 서비스의 유통의 확대라고 표현할 일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간관계의 형성이라는 더 큰 시각에서 봐야 한다. 화폐는 중립적인 매개 수단이라기보다 세계의 문호를 열고 각 지역의 사회와 경제를 전 지구적 유통망 속으로 편입시키는 강제력으로 작용했다.


p.12

근대 사회는 사상 유례 없이 큰 억압과 희생 위에 구축되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p.13

중국은 명대 초까지 아시아의 바다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그 정점을 차지하는 것은 분명 정화의 대원정일 것이다.


명 건국 초기에 황제는 안으로 절대주의적 황제 체제를 굳건히 하고 바깥으로는 명의 세력과 위엄을 확고히 세운다는 정책을 폈다.


p.26~27

폴 케네디(Kennedy 1987: 148-149)에 의하면 유럽이 지배하는 전 세계의 지역은 1800년에는 35%였다가 1878년에는 67%가 되었고, 1914년에는 84%가 되었다.


p.27

최근 연구들은 18세기 중엽 인도와 중국의 생활수준이 영국과 유사했다고 보고하였다.


p.27

경제적으로 유럽이 아시아를 뛰어넘은 결정적인 시점은 18세기 후반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p.29

세계 인구는 서기 1000년에 2억 7,000만 명, 1500년에 4억 3,800만 명, 1700년에 6억 350만 명, 1820년에 10억 4,000만 명으로 점진적으로 증가했다. 이 800년 동안 세계 인구는 4배로 늘었다.


p.32~33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약 200년 전만 해도 세계 경제는 어디라고 할것없이 빈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부의 성장은 그 이후의 일이다. 물질적 복지라는 측면에서 보면 20세기 이후 선진국 사회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극히 예외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인구와 경제적 성장을 놓고 볼 때 오늘날과 같은 구조는 19~20세기라는 비교적 최근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19세기 이후의 경제 성장이 지역별로 매우 불균등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1820년부터 2001년까지 1인당 GDP 증가 비율을 계산해 보면 서유럽은 16배, 미국은 22배나 성장한 반면, 중국은 6배, 아프리카는 3.5배 증가에 그쳤다. 세계 모든 지역에서 경제가 성장했지만, 그 대신 선진 지역과 후진 지역 사이의 차이가 매우 커진 것이다.


p.33

1500년이 되면 적어도 <표 1>을 보면 이미 서유럽이 중국을 능가하였고 이후 18세기와 19세기 초까지 지속적으로 유럽의 우위가 확고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는 동안 중국은 계속 600달러 수준에 묶여 있는데, 이는 근대 중국 경제가 장기간 정체해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앞에서 언급한 생산 '총량'으로 보면 중국과 인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생산성'으로 보면 유럽이 근대 초에 이미 중국을 앞질렀고, 더 나아가서 19세기 이후 더욱 차이가 벌어져서 결국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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