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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by Diligejy 2023. 9. 17.

 

 

p.25~26

큰돈을 가졌든 작은 돈을 가졌든 거기에 걸맞게 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평생 이웃들에게 도움을 준 적 없으면서 죽을 때 종교 단체에 전 재산을 기증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후 보장을 받으려는 이기심의 발로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우리 사회에선 드문 일이지만, 돈이 많은 사람이 돈을 잘 쓰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기분이 좋다. 나도 저렇게 돈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켜 일에 대한 의욕과 부자에 대한 존경심, 부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를 갖게 해주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좋은 영향을 준다. 죽을 때보다 살아서 돈을 잘 써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언젠가 화제가 되었던 아흔 살 노인의 이혼소송 사건의 경우, 이 할아버지가 너무 인색하고 포악하여 평생 함께 산 마나님을 박대하고 돈 한 푼 안 주고 내쫓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딴 장학금을 대학에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나님이 견디다 못해 이혼소송을 냈는데 법원의 판결은 '백년해로하시라'였다. 재판부의 이러한 결정에는 그의 장학금 기탁 사실이 미담이 되어 영향을 끼쳤다는데 그것도 미담인지 동의하기 어렵다. 무서운 지옥 꿈을 꾸고 나서 반성하고 너그러운 할아버지로 여생을 마친 구두쇠의 대명사 스쿠르지 영감도 당장 끼니가 없는 조카는 모른 체하고 죽을 날이 임박해 하느님께 재산을 기부했을 수도 있다. 그런 영감을 하느님이 받아들여주셨을까.

 

p.32

날마다 큰 충격을 받으면서도 별일 없이 산다. 명색이 언론인이라면서 현역 기자가, 피디가 흉악범처럼 긴급체포되어도, 주먹을 불끈 쥐고 당장 거리로 뛰어나가 석방하라 석방하라 구호를 외쳐야지 흥분하다가, 그냥 주저앉아 별일 없었다는 듯 산다. 성상납, 성접대 등 구역질나는 사건들이 터져도 이런 너절하고 치사하고 싸구려 같은 인간들 하다가, 인터넷에서 리스트를 구해보고 너냐 너냐 하다가 에잇 더럽다, 김연아나 봐야지 하고 즐거워한다. 국가인권위원회 기구를 일사천리로 화끈하게 축소해버려도 인권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 이 정권의 정체성이란 말이냐 길길이 뛰다가, 그냥 야구를 볼까 축구를 볼까 하고 텔레비전을 튼다. 죄목이라곤 전문대 나왔다는 것밖에 없는 미네르바가 아직도 갇혀 있단느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혀 속이 답답한데도 <무릎팍 도사>를 보며 낄낄 웃는다. 자식 나이의 젊은 배우가 성상납과 술시중에 시달리다가, 또 그 사실이 널리 알려질까봐 자살을 한 지 오래됐는데도 가해자는 없고 수사는 지지부진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오리발을 내밀고 유난히 성상납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의 인권만은 살뜰히 보살펴주는 수사기관의 행각에 분노하다가, 별일 없다는 듯 그냥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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