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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by Diligejy 2023.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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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문학 작품에 숨겨진 25가지 발명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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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4

용기(courage)는 고대 프랑스어 cuor에서 유래했고, cuor은 다시 고대 라틴어 cor로 거슬러 올라간다. 둘 다 '심장(heart)'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고대 프랑스어와 라틴어 문장가들에게 용기는 금욕적 미덕이나 이성적 선택이 아니었다. 위험한 순간에 혈관을 타고 돌진하는 공포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기운이었다. 용기는 한 감정으로 다른 감정을 상쇄하고, 뒤로 물러서지 않으려는 심리적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p.68

찬가의 용기 증진에 대한 이 오래된 묘사는 현대 과학의 두 가지 교차 연구로 확인되었다. 첫 번째 연구에서, 억압받는 동안 단체로 부르는 노래는 불안에 떠는 다른 사람들과 가까이 있다는 뇌하수체의 느낌을 증폭시켜, 혈중 옥시토신 수치를 상승시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두 번째 연구에서, 신이 우리와 고난을 함께하신다고 느끼게 하는 기도를 통해서도 옥시토신 수치가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두 가지 옥시토신 유인책이 찬가로 통합되고, 찬가는 다시 대규모 코러스와 경건한 탄원을 결합한다. 그 결과, 살라미스에서 불렸던 찬가는 호전적 연금술로 작용하여 그리스인들에게 두려움을 떨쳐내고 맹렬히 진격하게 했다.

 

p.76

인쇄본에서든 화면에서든 호머풍의 서술자를 몇 가지 발견했다면, 당신의 가장 깊은 두려움을 들춰낼 이야기 속으로 헤집고 들어갈 서술자를 하나 골라보라.

 

삶에 아무런 목적도 없다 싶으면, TV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보라. 우리가 모두 타인의 삶에 거주하는 낯선 사람으로 끝날 운명인가 싶으면, '그레이 아나토미'를 보라.

 

그런 다음 더 큰 목소리가 당신과 연결됨을 느껴보라.

 

그리고 두려움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용기를 얻어라.

 

p.105-106 

욥의 원작 이야기는 당시 성전을 건축하던 사람들에게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욥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순식간에 집이 무너지고 자식들이 죽고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러다 욥과 마찬가지로, 결국 다 회복했다. 그들은 성전을 다시 짓고 손자들을 품에 안았으며, 황금으로 집 안을 장식했다. 정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시험받았고, 다시 그 믿음이 회복되었다.

그런데도 히브리 시인은 이야기를 바꿨다. 왜? 그는 왜 공정성에 관한 욥의 이야기를 건드렸을까? 도대체 왜 정의의 청사진을 손질했을까? 

 

이는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 정의만으로는 바빌론 침략 이전의 삶을 되찾을 수 없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정의만 생각했다면, 공정한 예루살렘 주민들은 억울하게 죽은 히브리 영아의 수만큼 바빌론의 아이를 살해했을 것이다.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당한 만큼 되갚는 식으로 보복하며 갈등을 증폭시켰을 것이다.

 

침략으로 훼손된 비폭력적 삶을 되찾으려면, 뭔가 다른 것으로 정의를 누그러뜨려야 했다. 그게 바로 용서였다. 용서는 상처 입은 마음을 분노의 속박에서 풀어준다. 보복 살해를 멈추게 하고 잃어버린 화합의 나날을 되돌려준다.

 

그래서 히브리 시인은 용서 테크놀로지를 고안하여 욥이라는 한 이교도의 이야기에 적용하면서 화평을 가미한 공정성을 이뤄냈다.

 

p.108-110

우리 뇌는 정의에 대한 욕망을 타고났다.

 

그 욕망이 본성 속에 워낙 깊숙이 흐르는 걸 보면 우리 종보다 먼저 발생된 듯하다. 침팬지와 고릴라, 짧은꼬리원숭이도 모두 공정성에 대한 선천적 갈망이 있다. 즉 최초의 인간 판사들이 과부를 보호하는 우루카기나 법(수메르, 기원전 약 2400년 경)과 눈에는 눈 식의 함무라비 법전(바빌론, 기원전 1750년경) 같은 정의 구현 도구를 제정하기 천만 년 전에, 정글을 휘젓고 다니던 고대 유인원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공정성에 대한 뇌의 갈망은 오래되기만 한 게 아니라 대단히 강하기도 하다. 현대 심리학자들이 발견한 바, 그 갈망이 워낙 강해서 우리는 피해 당사자가 아닌데도 공정성을 집행하려고 재산과 건강을 기꺼이 내놓는다. 누군가가 우리 이웃을 속이면 우리는 부당함을 느낀다. 그 감정적 강도가 워낙 커서 가해자에게 법의 심판을 내리게 하려고 우리 자신까지 위험에 빠트린다.

우리 뇌가 왜 이토록 강하게 공정성을 갈망하도록 진화했는지 이해하기 위해, 정의를 저버리고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면서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정행위엔 눈감아버리는 마을을 상상해보자. 내가 만약 사기를 당하면 가해자를 뒤쫓지만, 당신이 돈을 떼이면 나는 그냥 집에 머물면서 당신 혼자 알아서 하라고 둘 것이다. 그런 마을에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강자뿐이다. 약자는 가장 가까운 강자에게 의지해야 한다. 그에게 보호비를 지불하고 그의 무리에 합류해야 한다. 이렇게 점차 끼리끼리 파벌을 형성하여 서로 응징하고 보복하면서 거리는 전쟁터로 변한다.

 

자, 이번에는 그 마을에 정의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우리 중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속이면 다 같이 합심하여 그 사기꾼을 처벌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러한 처벌 행위는 마을을 하나로 묶는다. 그리하여 공동체 안에서 신뢰가 쌓이고 결속력이 강화된다. 그리고 힘의 출처가 공동체이기 때문에, 무기를 휘두르는 강자를 사회의 궁극적 선으로 평가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갖가지 능력, 즉 빵을 굽고 곡식을 기르고 그릇을 만들고 병자를 치료하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등의 수많은 선을 인정하는 문화가 형성된다.

 

지금까지 우리 뇌가 왜 정의를 갈망하는지에 대한 생물학적 답변을 살펴봤다. 정의는 공동체의 장기적 안정과 다양성에 더 좋다. 그런 장기적 선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 뇌는 정의를 대단히 강하게 염원해야 한다. 그런데 단기적으론, 정의가 항상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건 아니다. 이웃을 위해 공정성을 추구하다 다치거나 죽으면 우리에게 전혀 이익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자기보존에 대한 단기적 충동을 억제하려면, 우리 뇌는 진심으로 정의를 갈구해야 한다. 공정성을 위한 심오한 감정적 동인이 있어야 한다.

 

이 심오한 감정적 동인은 한 종으로서 우리에게 유익하게 작용했다. 더 공정한 사회를 건설하도록 격려하고, 욥의 원본 이야기와 같은 정의 우화로 그 사회를 더 강화하도록 격려했다. 하지만 모든 상황에서 항상 좋은 것은 없다. 그게 생물학의 황금률이다.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너무 지나치면 도리어 귀찮아질 수 있다. 정의도 그렇다.

 

p.118

캐릭터의 회환을 순식간에 파악하는 장치, 즉 '공감 발생기'는 소포클레스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이 발명품은 우리를 타인의 마음 속으로 이끄는 문학의 특별한 힘을 이용해, 후회라는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을 보여주고 그를 향한 연민으로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준다.

 

소포클레스가 이 문학적 돌파구를 마련한 후, 후대 작가들은 이를 더 확장시켰다. 오이디푸스가 떠난 지 2,000년 후, 셰익스피어는 관객에게 훨씬 더 악랄한 폭군을 소개했다. 바로 리처드 3세였다. 리처드 3세는 살인을 저지를 뿐만 아니라 제 자식들까지 살해한다. 근친상간도 저지르는데,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이다. 따라서 리처드 3세는 우리의 정의 뉴런을 활활 타오르게 하여, 그가 처벌받는 모습을 기필코 보고야 말겠다는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다 리처드 3세가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는 순간, 우리는 또 마음을 열게 된다.

 

나는 절망할 것이다. 나를 사랑할 생명체는 아무도 없구나.
내가 죽으면, 어떤 영혼도 나를 동정하지 않겠지.
아, 나 자신도 나를 전혀 동정하지 못하는데,
나를 동정할 자가 어디에 있겠느냐?

리처드 3세는 이 지점에서 잘못 알고 있다. 우리가 그를 동정한다. 그의 자발적인 후회는 우리 뇌에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아울러 문학의 테크놀로지는 우리에게 그의 악랄하고 냉정한 복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고 우리 스스로 폭군이 되지 않게 한다.

 

p.129

소크라테스는 근심이나 고통 없이 죽어간 비결을 세상이 알고 싶어할 줄 미리 알았다. 그래서 간단한 답변을 남겨두었다.

 

"진정한 철학자는 자신의 철학으로 죽음을 훈련한다."

 

p.134-135

 

 

p.141

우리 자신을 풍자하면, 뇌에 소크라테스의 고양된 기분뿐만 아니라 통증을 억제하는 신경 약물까지 투여하게 된다. 반면 남들을 풍자하면, 우리 자신을 끌어내려 불안감과 심장마비로 몰아가게 된다. 

 

자, 당신은 이제 히포낙스가 여성을 비웃었던 농담을 제대로 볼 수 있다. 히포낙스는 자신이 대단히 우월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더 아프게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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