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

예수전

by Diligejy 2017. 7. 17.

p.18~19

요한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예언자다. 예언자는 자신들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유일한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의 독특한 전통이다. 예언자는 인민을 대변하여 왕의 권력을 견제하며 또한 가난하고 힘없는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권력자와 부자들을 향해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했다. 성서엔 수십 명의 예언자가 등장하지만 정작 예수가 나타날 즈음엔 오랫동안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수백 년째 주변의 강대 제국들에 의해 주권을 잃은 상태였다. 바빌론, 이집트, 그리스의 식민지를 거쳐 예수가 태어나기 60여 년 전부터는 로마의 식민지 상태였다. 외세와 결탁해 영화를 누리던 지배세력에게 예언자 전통의 단절은 아쉬울 게 없었다. 그러나 그와 결탁한 지배세력의 이중적인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던 인민들은 예언자를 갈망했다.


p.20~23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마르코복음]이 집필된 초기 기독교 당시엔 요한을 그리스도로 섬기는 세력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섬기는 세력보다 결코 작지 않았다. 두 세력은 경쟁 고나계에 있었으며 기독교인들로선 자신들의 그리스도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게 명예로울 리 없었다. 만일 예수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게 널리 알려진 사실이 아니었다면 굳이 그렇게 적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마르코복음]을 비롯한 복음서는 예수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은 부인하지 않는 대신, 요한을 시종일관 '예수의 예비자'로 묘사함으로써 예수에 대한 요한의 역할과 영향력을 축소하려 애쓴다. 그런 정황으로 볼 때 예수는 요한에게서 단지 세례만 받은 게 아니라 순수하고 열정적인 갈릴래아의 다른 많은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요한을 존경하고 따랐으며, 요한을 넘어서는 자신만의 사상을 세우고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의 그룹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수는 요한의 제자였던 것이다.

예수는 "갈릴래아 나자렛"출신이다. 이 사실에는 단지 지역적인 의미뿐 아니라 사회적인 의미가 있다. 왼쪽으로 지중해를 끼고 요르단 강을 따라 세로로 길게 뻗은 팔레스타인 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맨 아래가 유다, 가운데가 사마리아, 그 위가 갈릴래아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곳은 역시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유다 지역이다. 사마리아는 유다와 갈릴래아의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이방 지역 취급을 받았다. BC721년 팔레스타인에 쳐들어온 아시리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순혈주의를 파괴하기 위해 3만여 명의 아시리아인들을 이주시켰고 그 결과 사마리아에는 혼혈이 많았다. 갈릴래야 사람들이 유다 지방을 가거나 유다 사람들이 갈릴래야 지역을 갈 때는 '더러운 사마리아인을 피해' 요르단 강 건너로 멀리 돌아가곤 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반발심에 자신들의 성전을 따로 세우고 그들과 완전히 절연했다.

갈릴래아는 팔레스타인을 통틀어 가장 비옥한 땅이고 '바다'라 불릴 만큼 큰 갈릴래아 호수에선 물고기가 많이 잡혀 어업이 성했다. 그러나 갈릴래아 사람들은 매우 가난했다. 그들이 경작하는 땅은 대부분 예루살렘에 사는 지주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지배계급과 로마의 이중적 착취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갔는데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만 갔다. 게다가 갈릴래아 또한 외세의 침략으로 적지 않은 혼혈이 생겼던 지역이었다. 사마리아처럼 이방 지역으로까지 취급되지 않았지만 유다 사람들에 의해 심한 차별과 천대를 받았다.

가난과 차별,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절망감 속에서 갈릴래아 사람들의 저항의식은 늘어만 갔다. 끊임없이 소요와 봉기가 일어났고 대개의 갈릴래아 청년들은 과격한 사회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불의한 세상과 맞서 싸우고 또 죽어갔다. 예수는 바로 그런 참혹한 현실 속에서 성장했다. 예수는 마치 오늘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에 압살당하는 팔레스타인의 소년처럼, 동네 형들과 삼촌들이 불의한 현실에 저항하다 줄줄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p.24
알다시피 오늘 대개의 사람들에게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온 메시아도 유다에서 온 메시아도 아닌 '교리 속에서 온 메시아'다. 그 연원은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325년 최초의 기독교인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에 있는 제 별장에 세계의 주요한 주교들을 모아 놓고 회유와 협박으로 예수가 '하느님과 동일 본질'이라는 결정을 내리게 한다. 당시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은 자유로운 편이었는데 대체로 예수가 하느님과 같은 존재라는 의견보다는 예수가 사람보다는 높지만 하느님보다는 낮은 존재라는 견해가 우세한 편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처음엔 그런 신학 논쟁에 별 관심이 없었으나 이내 예수가 하느님의 지위를 얻으면 자신의 지위도 함께 격상된다는 점을 간파했다. 교리의 통일을 통해 자신의 통치력을 한껏 강화할 수 있다는 점도.

p.25
이성으로든 신앙으로든, 예수를 '갈릴래아에서 온 사람'으로 보느냐 '교리 속에서 온 사람'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예수의 정체성을 선택하는 결정적인 지표가 된다.

p.34~35
'귀신마저 복종한다'며 사람들은 감탄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귀신을 쫓는 무당이나 퇴마사가 있지만, 예수 당시 사람들에게 귀신이라는 개념은 지금과 전혀 달랐다. 그들은 삶과 관련한 거의 모든 부분에 귀신을 관련지었다. 오늘 우리가 과학이나 의학, 혹은 합리적인 사회의식으로 접근하고 해결하는 많은 문제들을 그들은 귀신의 짓으로 생각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의 귀신 쫓기를 오늘날 무당이나 퇴마사의 행위가 아니라 훨씬 더 넓고 근본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귀신이 들렸다는 건 뭔가? 사람이 어떤 다른 정신에 장악되어 자기 스스로 온전하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눈과 입이 돌아가고 미친 말을 해 대는 것만 귀신 들린 게 아니다. 진짜 심각한 귀신 들림은 오히려 겉보기엔 멀쩡해서 귀신 들렸다는 걸 알아차리기 어려운 상태다. 이를테면 오늘 우리는 이른바 '행복과 미래'를 얻기 위해 물질적인 부에 집착하느라 정작 단 한순간도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한 채 인생을 소모하는, 돈 귀신에 들린 '멀쩡한' 사람들을 헤아릴 수 없이 볼 수 있다.

p.36~37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를 종교적 천국으로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선교나 전도로만, 기도를 종교적 간구로만 이해하는 건 본의 아니게 그 의미를 축소하고 왜곡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말로 '새로운 세상'이며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우리의 말로 '세상을 변혁하는 운동'이며 기도는 우리의 말로 '신념을 다지고 성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p.50
사람은 아무하고나 밥을 먹지 않는다. 식사 약속엔 엄격한 사회적 맥락이 들어 있다. 식사에 초대하는 건 그 사람을 내 사회적 관계와 질서 속에 들이는 일이다. 이를테면 내 아버지가 마땅치 않아하던 아들의 여자 친구를 식사에 초대했다면 그건 단지 함께 끼니를 해결하자는 게 아니라 둘의 교제를 허락한다는 의미가 된다. 하물며 고대사회, 특히 이스라엘 사회에서 식탁 교제는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에 속했다. 누구와 먹는가, 어느 자리에 앉는가 따위는 곧 그 사람의 신분과 명예를 표현했다. 그래서 점잖은 사람들은 절대 죄인들과 식사하지 않았다. 그들과 식사하는 건 자신을 더럽혀 하느님께 죄를 짓는 일이었다.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덟단어  (0) 2017.11.19
병법 노자  (0) 2017.09.20
심연  (0) 2017.04.27
고민하는 힘  (0) 2016.11.16
공부할 권리  (0) 2016.11.1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