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제/경제정책&비평

불황터널

by Diligejy 2017. 12. 10.

p.7

나는 대규모 양적완화정책을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일본 경제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이라는 생각을 한다. 호랑이 등에 올라탔으니 터널을 벗어날 동력을 얻기는 쉬울 것이다. 그러나 터널을 벗어났다는 판단에 호랑이 등에서 뛰어내렸더니 또 다른 터널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면? 아니면 터널은 완전히 벗어났다 하더라도 이제는 그보다 더 무서운 호랑이 입에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p.8~11

"우리에게도 아베노믹스가 필요한가?"

아베노믹스의 경제정책들이 우리에게도 필요한가 라는 질문이라면, 나는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다. 아베노믹스는 20년이 넘는 세월 디플레이션을 겪은 나라가 선택한 극단적인 처방이다. 그리고 그 나라 일본은 GDP 규모가 우리나라의 세 배 이상이고 해외순자산은 스무 배나 많이 가지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열 배가 넘는 정부부채로 고통받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경제 여건이 우리와 확연히 차이가 나는 나라인 것이다. 일본의 대졸자 신규 취업이 호조를 보인다는 최근의 한 기사에 '아베는 싫지만, 우리에게도 아베노믹스 같은 정책이 필요하다'는 식의 댓글이 꽤 달려 놀란 적이 있다. 사실 대졸자 취업률의 차이는 '정책'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구와 산업구조'의 문제인데 말이다. 아베노믹스를 복사해서 온다 해도 그 정책만으로는 청년실업률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아베노믹스 최고의 고민이자 최우선의 정책목표는 '디플레이션으로부터 탈출'이다. 우리나라 역시 가까운 장래에 디플레이션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디플레이션에 빠진 것은 아니다. 디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 나라의 경제 정책이 디플레이션으로 고통을 받아온 나라의 경제 정책과 같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더욱이 경제 규모가 확연히 다르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러나 "일본 경제를 공부할 필요가 있는가?", "아베노믹스의 정책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단연코 "그렇다"라고 답하고 싶다. 아베노믹스는 어느 날 갑자기 선거용으로 급조된 날림정책이 아니다. 그 안에는 지난 25년간,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더 오랜 기간 일본이 경험한 각종 실패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들어있다. "어쩌다 장기 침체에 빠지게 되었는지", "장기침체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부터 시작해 "고령화 사회인 일본에 여전히 경제 성장의 가능성이 있는지, 아니 경제 성장에 필요한 일인지"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지식인들이 고민하고 탐구한 그리고 격렬하게 논쟁한 질문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들 역시 아베노믹스를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2010년대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을 보면, 1990년대 일본이 연상된다는 말을 하는 분들이 많다. 인구증가율부터 시작해서 물가상승률, 금리, 정부채무 등 각종 지표가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일본식 장기불황의 터널로 진입하는 것인가? 많은 분들이 지적하고 있는 대로 열차의 앞부분은 이미 터널의 입구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일본식' 장기침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과거와는 전혀 다른 경제 환경 속으로 진입하는데도 아직도 과거의 타성에 젖어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1992년부터 2010년까지 일본의 연평균 1인당 GDP 증가율은 0.6%였다. 같은 기간 프랑스 역시 1.0%, 독일은 1.1%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무도 '프랑스식 장기침체'가 아닌 '일본식 장기침체'를 얘기하는 것은 일본식 장기침체가 그만큼 어려운 난제들이 많았기 때문이고 한국 경제가 하필이면 일본 경제와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 책의 본문에서도 보겠지만 2010년대 한국의 인구구조가 20년 전의 일본과 유사하다는 것은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은 일본보다 경제성장률이 높은데도 청년실업률은 어째서 일본이 한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수준으로까지 뛰는 것일까? 일본 정부의 채무는 일본 GDP의 200%가 넘는다는데 그들은 왜 그토록 엄청난 정부부채를 가지게 되었으며, 한국은 어느 규모까지의 정부부채를 감당할 수 있을까? 양적완화란 무엇이며 한국에도 적용이 가능한 정책인가? 현재 일본에서는 도쿄 23구의 주택가만 오르고 있다는데 서울의 미래도 그럴까? 집값이 꾸준히 떨어졌다는데 일본인들은 왜 지금도 집을 사는 것일까? 아니면 월세를 사는 사람들은 내 집이 없어도 마음 편하게 살고 있는가? 일본식 장기불황을 걱정하면서도 의외로 일본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은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p.23

경제활동인구가 아니라 전체 인구 중 취업자의 비율을 나타내는 '고용률'이라는 지표를 보면 2015년 한국 20대의 고용률은 57.9%이다. 일본의 고용률은 얼마일까? 2014년에 74.7%였다. 한국의 청년들은 100명 중 58명 정도가 돈을 버는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반면, 일본의 청년들은 100명 중 75명 정도가 돈을 벌고 있다. 역으로 말하면 한국의 청년 100명 중 42명은 학생이든 군인이든 실업자든 아니면 구직을 포기한 무직자이든, 돈을 버는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그 차이가 경제 상황 탓만은 아니다. 한국은 대학진학률이 높은데다 남학생들은 2년간의 군복무를 마쳐야 하기 때문에 일본에 비해 고용률이 낮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의 청년고용률은 2006년을 정점으로 해서 조금씩 떨어지는 추세인 반면, 일본은 2010년을 저점으로 조금씩 올라가는 추세다.


p.26~27

일본의 장기침체가 세계적인 주목을 끈 이유는 낮은 성장률 때문이 아니다. 우선 성장률의 급격한 변화가 이유 중 하나다. 제1차 오일쇼크에서 회복되기 시작한 1975년부터 버블이 꺼진 1991년까지의 연평균 성장률은 3.6%였다. 다시 프랑스, 독일, 미국으로 돌아가보자. 그들은 각각 1.9%, 2.5%, 1.9%를 기록하였다. 5% 정도도 우습게 보이는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일본의 3.6%가 낮은 성장률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같은 기간 거의 미국의 두 배에 달하는 성장률이다. 성장률이 두 배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일본, 프랑스, 미국의 1인당 소득의 추이를 보면 분명해진다. 1975년 일본과 프랑스의 1인당 GDP는 각각 미국의 71%, 84% 정도였다. 일본보다 더 높은 소득수준을 자랑하던 프랑스는 1990년이 되자 일본에 추월 당하여, 버블이 정점에 달했던 1992년에는 일본이 프랑스의 1인당 GDP가 각각 미국의 90%, 82% 정도가 되었다. 일본이 프랑스를 제치고 미국의 90%수준까지 소득을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은 미국과 프랑스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경제성장률을 달성하였기 때문이다.


그랬던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1992년 이후 프랑스의 1%에도 못 미치는 0.6%수준이 되었으니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프랑스는 1.9%에서 1%로의 감소였지만 일본은 3.6%에서 0.6%로의 감소였다. 도대체 일본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제학자들은 전후의 폐허에서 회복되기 시작한 1950년대 이후 일본의 경제성장률에 두 번에 걸친 큰 변화가 있었다고 본다. 1973~1974년의 오일쇼크, 그리고 1991~1992년의 버블 붕괴가 변화의 기점이다. 1951~1973년의 연평균 성장률은 8.0%였다. 제1차 오일쇼크 이후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3.6%로, 그리고 버블 붕괴 후에는 0.6%로 하락하였다.


p.31

IMF는 각국의 잠재 GDP를 계산하여 매년 GDP 갭을 발표하는데 일본은 장기침체의 초엽인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연속 4년간 GDP 갭이 마이너스였다. 그 이후에도 잠깐씩을 제외하고는 대개의 경우 실제 GDP가 잠재 GDP에 미치지 못하였다. 실제 GDP가 잠재 GDP보다 낮다는 것은 생산능력을 100%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일부 자원이 낭비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연속 4년간 GDP갭이 마이너스이다. 2015년의 데이터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저간의 사정으로 보아 마이너스일 것이 확실시된다. 마이너스의 GDP 갭이 연속된 것이 일본식 장기침체의 또 다른 단면인데, 우리도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잠재 GDP의 증가율, 소위 말하는 잠재성장률이 하락한 것도 일본식 장기침체의 한 단면인데 이 역시 일본을 닮아가고 있다. 잠재성장률이 하락한다는 얘기는 잠재 GDP의 증가가 신통치 않다는 얘기다. 이는 곧 생산능력 향상이 부진하다는 말이다. 잠재 GDP가 이전만큼 증가하지 못하고 있는데 실제 GDP는 잠재 GDP보다도 낮으니 그야말로 엎친데 덮친 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p.34~35

도쿄에 10년을 넘게 살면서 일본의 주택시장을 들여다보니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면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일단 일본 사람들은 집을 살 때 매매하는 집의 집값이 앞으로 오르리라는 기대를 별로 하지 않는다. 1991년에 정점을 찍었던 일본 지가는 1990년대의 대폭락에 이어 2000년대에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아베노믹스에 의해 경기가 살아난다고 하는 지금도 떨어지는 속도가 늦추어졌을 뿐이지 하락 추세는 여전하다.


일본부동산연구소의 자료에 의하면 2000년의 지가지수를 100으로 하였을 때, 2014년의 지가지수는 51.9에 불과하다. 2000년대 들어서도 지가가 반토막이 난 것이다. 다만 예외적인 것이 도쿄 23구의 지가다. 도쿄 도는 23개의 구와 그 23개 구의 외곽에 있는 여러 개의 시로 이루어져 있는데, 도쿄도 중에서도 23구의 지가만을 따로 분리해보면 2014년 도쿄 23구의 지가 지수는 92.2로 2000년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8년에는 112.1까지 올랐던 적이 있고, 아베노믹스 이후 연속 2년간(2014~2015년) 지가가 상승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쿄 23구의 주택가가 전반적으로 오른다고 해도 내가 소유하고 있는 단독주택이나 아파트 값은 웬만해서 잘 오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집을 사면서 집값이 오르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주택가격지수가 오르고 있는데 내 아파트의 가격이 오르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일본에서는 '새 집은 새 집과 헌 집은 헌 집과'비교되기 때문이다.


작년에 도쿄의 신주쿠에서 4,000만 엔에 20평 아파트를 분양 받았다고 해 보자. 신문을 보니 지난 1년간 도쿄 신주쿠의 아파트 가격이 전반적으로 약 2% 상승하였다고 한다. 아파트 가격이 2% 상승하였다고 하니, 올해 내 아파트의 매매가는 4,020만 엔이 될 것인가? 보통의 경우 그렇지 않다. 오히려 4,000만 엔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2% 상승한 것은 같은 조건의 아파트끼리 비교하였을 때의 일이다. 내 집은 이제 1년 된 중고 아파트가 되었으니 작년의 중고 아파트와 비교해야 한다. 중고 아파트 값 역시 2% 상승했고 작년에 1년 된 중고 아파트의 매매가가 3,900만 엔이었으면, 올해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매매가는 거기서 2% 오른 3,978만 엔이 된다. 주택가격지수를 보면 전반적으로 2% 상승했지만 1년 사이에 신규 아파트에서 중고 아파트가 된 내 집의 가격은 소폭 하락하고 만 것이다.


p.43~44

일본은 오일쇼크 때마다 큰 폭의 인플레이션을 경험했는데 특히 1973년과 1974년에 걸친 제1차 오일쇼크 때에는 월평균 소비자물가상승률이 25%를 넘어서기도 했다. 그야말로 미친 듯이 날뛰는 물가라는 의미로 당시의 물가를 언론에서는 '광란물가'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그때의 경험과 보수적인 일본은행의 정책으로, 제2차 오일쇼크에서 회복되기 시작한 1981년 이후로는 상당히 안정적인 인플레이션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7~1990년에 걸친 버블이 꺼지자 물가상승률이 안정적인 수준을 넘어 예외적으로 낮은 수준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1992년과 1993년 연속 1%대에 머물렀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994년 0.6%를 기록한 후 1995년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1995년 1월부터 아베노믹스 정책이 실시되기 직전인 2012년 12월까지의 월평균 소비자물가상승률은 -0.1% 정도다. 18년이라는 긴 세월의 평균 인플레이션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현대적 의미의 물가지수가 측정, 공표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다른 어떤 나라도 경험한 적이 없는 이 기현상이 유동성 함정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유동성 함정은 일본식 장깇미체의 가장 큰 특징이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p.55

아베노믹스는 성공할 것인가? 나는 "해외의 상황이 2009년처럼 악화되지만 않는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답하고 싶다. 내가 성공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부터는 일본 경제가 승승장구할 것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오히려 "일본 경제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니오"라고 답하고 싶다. 일본은 고령화가 진전되는 사회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중국, 인도 등이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세계 2위 경제 대국이던 일본이 지금은 3위가 되었다. 세월이 더 흐르면 4위, 5위로 내려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성공할 것이라는 말인가? 디플레이션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일본 사회에 디플레이션이 끝날 수도 있다는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 만일 경제 여건이 조금만 더 버텨 준다면 디플레이션이 종식되고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정책들이 효력을 발휘하는 보통의 경제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정부부채 등의 문제에도 햇살이 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p.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