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제/경제정책&비평

김현종 한미FTA를 말하다

by Diligejy 2020. 8. 6.

p.10

1997년 외환위기 때 한국 반도체와 조선 업계가 공적자금을 대출받은 것이 불법보조금이라는 이유로 미국과 EU가 상계관세대상이라고 제소한 일이 기억난 것이다. 그 논리대로라면 다수 산업계가 해당되지 않겠나, 그래서 상계관세가 부과되면 수출에 문제가 생기고 급기야 수출중단으로 이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지 않나!


(상계관세 : 국제무역에서 차별 관세의 하나. 수출국이 수출 보조금이나 장려금을 지급하여 수출 가격을 부당하게 낮게 할 경우, 수입국이 그 효과를 없앨 목적으로 정규 관세 외에 상계관세를 부과한다.)


p.29

참여정부의 첫 FTA상대국은 일본으로 정해져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 당시 일본과 FTA를 출범시키기로 한 약속 때문이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아시아 시장을 위주로 중국, 일본과 먼저 FTA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는 거부할 수 없는 대세였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첫 FTA 상대국으로 일본이 선정된 것에 나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단추는 국익과 직결된다. 때문에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세계 통상전략의 큰 그림도 그리지 않은 채 전 정부의 약속에 묶여 정책이 실행되고 이것이 훗날 국가와 국민에게 불이익이 된다면 대한민국의 통상정책의 미래를 결정하는 현재의 주무자로서 심각한 직무유기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패권에 관심이 있는 중국과 일본의 경쟁 구도하에서 우리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FTA를 체결하면 저들 좋은 일만 시키는 결과만 얻을 뿐이다. 한 중 일의 경제통합이 서구유럽 시장, 그리고 북미 시장과 대등한 위치를 점하기 위한 동북아 3국의 협력이라고는 하나, 그 내용이 어떤지가 훨씬 중요하다. 나도 원안은 동의하나 3국의 균형에 질서가 우선 확립되고서야 진정한 협력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고민이 있었다.


중국은 이미 시장이 크고, 일본은 원천기술이 우세하다. 그러나 우린 아직 세계 시장을 확실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패권을 잡는 데 혈안이 된 일본과 중국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먼곳에서 큰 시장과 먼저 FTA를 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렇다면 그 상대는 미국이다! 일본이 아닌 것이다.


p.35

1세대 FTA는 대개 공산품에 대해 배타적으로 관세를 철폐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형태는 농산품, 서비스, 지적재산권, 위생 검역, 경쟁, 노동과 환경을 포함하여 3세대 FTA로 발전했다.


p.41

미국과 EU, 중국 같은 거대 경제권과 FTA를 꼭 체결해야 합니다. 참여정부가 진보정권이기 때문에 미국과의 FTA를 국민이 이해하고 또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닉슨 대통령이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베이징에 방문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p.49

칠레 APEC 정상회담 때는 싱가포르와 FTA 타결을 이뤄 내지 못했다. 여섯 개에 이르는 주요 쟁점을 두 통상장고나이 합의해 타결해내기에는 너무 버거웠다. 우리 측 실무자들은 통상장관급에 협상 테이블을 넘겼을 경우 3~4개 과제를 초과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값진 교훈을 얻은 셈이다.


p.57

1896년 고종은 집무실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다. 그 유명한 아관파천이다. 고종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친서에 쓴 바대로 "일본의 불법적인 행위를 꾸짖고 나라의 독립을 침해하지 못하게"하기 위해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동안 러시아와 일본은 조선을 분할하는 비밀 협상에 합의했다. 국제관계는 냉혹하리만큼 비정하며, 호소한다고 약자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p.63

미국 사회에서 인정받으려면 대가 약하면 안 된다. 특히 통상 분야에서는 그렇다. 상대방이 공세적으로 나올 때 그 이상의 강도로 받아쳐야만 상대방도 인정한다.


p.64~65

때로 아래 직원은 조직의 장이 어떻게 처신하는지 보려고 시험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안 되는 때가 언제인지 아는 게 중요하다. 


p.65

양자투자협정(BIT, Bilateral Investment Treaty) : 국가 간 투자활동에 규제를 없애는 협정


p.66

한국에서 대통령이 되려면 세 가지 이슈에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미국정책, 둘째는 북한정책, 셋째는 개방정책입니다.


p.89

TPA : Trade Promotion Authority. 무역협상권한, 무역촉진권한을 의미하는 TPA는 국제협상을 효율적으로 체결하기 위해 의회가 대통령에게 광범한 무역협상 권한을 위임하는 것으로, 이 경우 미국 의회는 행정부가 체결한 무역 협정을 수정할 수 없고 일정 기한 내에 찬반 결정만을 하게 된다.


p.114~115

한미 FTA 협상을 출범시키기 직전에 미 행정부 고위급 관리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다. 


"오늘 아침 일본 대사관 직우너이 날 찾아와서 한미 FTA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한국과 FTA를 하지 말라고 그러더군요."


"무슨 이유로요?"


"한국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고 정직하지 않기 때문이라는군요. 또 말하길 미국 정부는 지금 한국 통상장관을 높이 평가하는 것 같은데 그 사람은 낮우에 약속을 지키지 않고 미국을 실망시킬 거라고 지적하더군요."

그 순간 일본이라는 나라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가츠라-태프트 밀약 체결 후 100년이 지났는데도 일본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나중에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된 후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은 한미 FTA를 적극 지지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한반도 통일도 속으로는 반대하면서 막상 되고 나면 지지한다고 발표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두 번째 경제 대국 일본이 한미 FTA 출범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날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웃어넘겨 버릴 수 있는 이야기지만 늘 염두에 두어야 할 사안이다.


p.116

2006년 2월 3일 한미 FTA협상 출범 발표 이후 수석대표와 모든 분과장에게 그동안 미국이 체결한 FTA서류들의 문구와 단어들을 비교 검토하는 차트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지침 중 하나가 상대방을 알고 논리적으로 공략해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전례를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협상테이블에서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전술 중 하나가 과거에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내세우는 방법이다.


p.118

나는 양허표 외에도 우리 협상 초안문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미국 월가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M&A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얻은 한 가지 교훈은, 상대방이 준 초안을 갖고 협상을 하면 불리한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변호사 시절 나는 상대방이 초안을 제공하면 그 초안을 무시하고 내 초안을 작성해서 상대방에게 주었다.


p.130~131

협상 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은 강경수인데, 이런 수단을 쓸 때는 조심해야 한다. 상대방이 더 강한 수를 둘 수 있기 때문이다.


p.134

미국의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에 관한 TV 프로그램을 시청한 적이 있는데, 통념과 달리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무렵 내부 반대가 심했다. 다시 말하면 어떤 큰일을 할 때 반대는 늘 있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p.140

때때로 전술은 드러내 보이지 않아야 실익이 있다.


p.143

협상에서는 가시적인 결과가 필요하고, 수비만 하는 전략 전술은 목적 달성에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며 얻는 것보다 더 많이 잃을 수 있다.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p.145

시장경제지위(MES) : Market Economy Status 정부의 간섭 없이 시장에서 원자재 가격이나 임금, 환율, 제품가격 등이 결정된다고 인정하는 것. MES로 인정받지 못하면 반덤핑 제소를 받았을 때 제3국의 가격을 기준으로 덤핑 여부가 판정되는 불이익을 당한다.


p.156

미국에서 다수당의 교체는 미국 통상정책의 근간이 바뀜을 의미한다.


p.157

흥미로운 것은 미국 TPA상 미 행정부는 미 의약품에 대한 참조 가격을 FTA 협의 문안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점이다. 미국이 요구하는 최저가격은 일종의 참조가격일 뿐이고, 구체적인 최저가격을 제시하면서 요구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이 스스로 참고 최저가격을 수용해 주기를 실질적으로 기다린 것이다! 즉 미국 협상 실무자들은 미국 법의 한계 밖의 요구를 한국 측 협상 실무자들에게 한 것이다. 


p.161

미 행정부는 미국 TPA상 협상 종료 90일 전까지 협상 내용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p.354

기관장은 예측 가능하면 안 된다. 예측 가능하게 되면 대내외 협상을 장악하지 못하고, 새가 새장에 갇히듯이 직원들이 자신들 눈높이에 맞춰 만들어 놓은 조그마한 틀에 갇히게 된다. 그들 방식대로 일을 추진하면 원하는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지 않다. 그 과정에서 일은 정말 열심히 해도 노력하는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게 된다. 결과 미달의 변명으로 "열심히 했는데..."라고 하면, 어느새 '정말 열심히 뛰었기 때문에'라는 식으로 정당화된다. 조직의 장은 이런 악순환을 단호히 끊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짜야 한다. 


p.360~361

우리는 예전부터 어떤 외교적 교섭 사안이 생기면 이러저러한 논리를 동원해서 상대방에게 협조를 '부탁'하는 식의 협상을 주로 해왔다. 이런 구도 아래에서는 상대방이 협조 제공을 거절하면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다. 호소한다고 해서 우리 방침을 반영해주는 국제관계란 없다. 철저하게 계산된 이해관계인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불리한 패러다임을 깨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한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상대방을 설득하고 부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반응해 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이쪽에서 주도적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 협상 테이블에 마주하면 상대방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구차하게 상대방을 설득하고 협조를 구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p.401

인생에서 전환의 순간은 본인 이외에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로 남의 말에 휘둘리면 안 된다. 구약성경을 보면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기 직전 사울 왕은 다윗이 걱정되어 무거운 갑옷을 입힌다. 그러나 갑옷이 무겁고 불편하였던 다윗은 이를 벗어 던지고 전투에 임한다. 어느 통계학자에 의하면 갑옷을 입고 싸우면 다윗이 이길 가능성이 없었고, 갑옷을 벗는 순간 승리의 가능성이 75%가 되었다고 한다. 주변에서는 중요한 순간마다 이런 갑옷을 입히려는 경향이 있는데, 본인의 능력과 적성 그리고 진정으로 마음이 원하는 것은 자신만이 알기 때문에 나의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시를 따라 과감하게 결정해야 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p.429

북학파의 선구자인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고종 치하에서 우의정을 지낼 때 사람들이 조선을 '예의의 나라'라고 부르는 것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이 말을 추하게 생각한다. 천하만고에 국가가 되어 가지고 어찌 예의없는 나라가 있겠는가? 이 말은 중국이 이적 중에서도 예의가 있음을 가상히 여겨 우리를 예의의 나라라고 부른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것은 본래 수치스러운 말로,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천하에 호기를 부릴만한 것은 아니다.


그의 논평은 정확하다. 

댓글